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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 지금 여기에서 금지당한 것들에 대해
트럼프는 무엇인가 반지성주의 우리의 악은 먼 곳에서 시작됐다 팬덤, 광신, 그리고 민주주의 금지당한 정치 지그문트 바우만의 교훈 1968년 5월과 CIA ‘세계 없음’으로부터 어떻게 세계는 존재하게 되는가 비트코인이라는 절망적 희망 페미니즘과 진보의 재구성 ‘남성 혐오’는 없다 혐오를 넘어서 마치며 : 내용 없는 민주주의와 대안 없는 민족주의를 지나서 부록 자크 랑시에르 인터뷰 : 모든 대안은 이미 현실에 다 있다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 트럼프 이후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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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 계급’은 유력 정치인들, 은행가들, 정보 산업 기술로 부를 축적한 갑부들, 할리우드 스타들이 망라한다. 이 계급이야말로 ‘성공한 명사들의 멤버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멤버십에 초대받는 것이 곧 10%의 과두정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이 10%의 자격을 규정하는 그 성공은 살아갈수록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무기력한 장삼이사들, 자본주의가 최종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선언한 소외된 이들의 희생과 연결돼 있다. 그럼에도 이런 희생이 자격을 박탈당한 장삼이사들의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으로 치환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 p.17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와 유사한 측면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메시아주의적 성격이 강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한국에 유입한 장본인이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였고, 1970년대 이후 반공주의적이었던 박정희 체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입장들이 다분히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기초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런 유사성의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다. --- p.29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과두정’은 유럽식 다당제보다 미국식 양당제를 선택했다. 돌이켜보면 그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 야권 지도자들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의 저항을 통해 열린 정치적 공간은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결과가 개인의 야욕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전망의 한계 때문인지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1987년의 성과는 모두 ‘대통령 직선제’로 수렴돼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에 대한 ‘선택 아닌 선택’으로 한정돼버렸다. 민주주의가 자유롭고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여기에서 깨진다. 물론 이것을 지금의 한계로 보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정치 운동의 지속을 위해 타당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의 모순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이 모순이야말로 민주주주에 대한 요구를 지속할 수 있는 요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 p.51 이런 ‘무지한 대중’은 말 그대로 특정할 수 없고, 그래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포퓰리즘’이든 ‘○빠’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불러낸 명칭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일어나는 행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트럼프 당선’이든 ‘문자 폭탄’이든 엄연히 눈앞에서 발생한 일이지 않은가.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한 일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을 문제 삼자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행위 또는 행동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따른다. 이 평가와 판단은 서로 중립적인 척하지만, 사실 편견을 내재한다.한국에서 이 편견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든 ‘대중은 무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편견은 ‘대중’을 통제하기 어려운 광신 집단으로 규정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 p.65 청문회와 ‘문자 테러’는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쳐 일어난 촛불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든다. ‘시민 혁명’이라는 수식어도 있지만, 당시에 벌어진 상황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진 ‘평화 시위’였다. 시위가 평화적이어서 문제였다기보다 그 시위가 왜 촛불로 표현되면서 평화적으로 진행됐는지 그 사실이 중요하다. 분명 경찰로 대표되는 국가 폭력은 항상 그랬듯 청와대 앞을 지켰다. 그럼에도 경찰은 법원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았다. ‘참주’로 받아들여지던 대통령의 명령보다 법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이 변화는 작지만, 내포된 함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슈미트의 구분법에 따르면 독재는 위임적 독재와 주권적 독재로 나뉠 수 있다. --- p.84 자유가 관계적이라는 말은 자유를 분배하는 사회적 관계 또는 구조가 사회적 지위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을 뜻한다. 특정한 사회적 지위가 자유의 할당을 결정하는 재원과 권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우만에게 자유는 근대의 발명품이라기보다 인류 사회의 산물이다. 다만 이 자유가 근대에 이르러 특정한 형태로 변형됐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이 자유의 변형에 결정적인 것이 바로 소비주의다. 우리는 분명 오늘날에도 강력한 근대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허공으로 사라지는 시대에 사는 것이다. 바우만은 이 근대를 고체와 액체의 시기로 나누는 것이고, 고체 근대의 견고성은 이제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 p.94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했듯 아직 ‘68년 5월’은 일어나지 않았다. 체제의 관점에서 본다면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전후 체제의 동요가 가시화하는 요즘 ‘68년 5월’은 여전히 ‘진리의 철학’을 호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 p.109 예를 들어 지난 촛불의 경험을 떠올려보자. 촛불의 개개인들은 촛불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지 그 개개인들을 모두 나타낼 수 없다. 항상 촛불은 어떤 집합의 모습으로 재현되지만, 개개인들은 거기에 셈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셈해지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실제로 촛불의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121 ‘세계 없음’의 ‘사유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한때 한국을 휩쓴 비트코인 열풍일 것이다. 가히 광풍이라고 불릴 만한 ‘쏠림 현상’을 비트코인 열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쏠림 현상’도 ‘사유 없음’의 징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 p.123 미투가 폭발력을 보이는 까닭은 이처럼 남녀라는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권력 관계를 통해 억압됐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문제는 바로 이 한국적 미투의 특이성이다. 미투는 미국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단순하게 특정 개인의 성범죄를 폭로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젠더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성의 억압 문제가 보편 인권의 문제와 결합했다는 점에서 한국적 미투의 폭발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덧붙여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인내해온 불평등의 구조가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p.136 나는 한국의 가족 구조와 생산 관계가 결과적으로 이런 ‘여혐’을 통해 구성됐다고 본다. 가장 핵심적 증거는 바로 임금 차등이다.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입사해 일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노동자는 임금을 적게 받는다. 이 문제는 이미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불거진 것이다. 당시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와 똑같이 일하면서도 임금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런 차별은 이른바 경제 개발 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는 언제나 ‘임시’였고, ‘보조’였다. 남성은 큰일을 해야 하고, 여성은 현모양처로서 남성을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런 경제 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였다. 여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 p.151 ‘지적 대화’에 대한 관점이 이렇게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백과사전적 지식을 구축한 ‘완전한 자기’를 추구하는 경향은 이미 초기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력 못지않게 명예를 추구한 부르주아는 과거 귀족이 누렸던 문화유산을 그대로 계승하고자 했다. 오늘날 유럽을 관광 대국으로 만들어주는 ‘볼거리들’이 대부분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부르주아는 귀족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귀족으로 만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 p.1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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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란 쓰고 읽고 나누고
이택광 저자는 지난 촛불의 광장에서 『빨간 잉크』 대부분의 원고를 구상했다. 많은 사람이 혁명이라고 부른 그 사건은 저자에게는 현재를 바꾸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과거를 불러오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2008년 이래 촛불은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증상이었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하는 분위기에 반해 저자는 진보의 비가역성을 주장해왔다. 알라딘의 램프에서 거인을 불러낼 수 있지만, 다시 들어가게 할 수는 없다. 이 거인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지난 대통령 탄핵의 촛불이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마지노선을 확인해줬고, 이 마지노선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1987년 이후에 달성한 근대 시민성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저자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면 이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고, 어떤 과장이나 폄하도 없이 민주주의가 초래한 낯선 상황을 마주할 수 있는 침착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한한 부정성의 세계를 파고들어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이 계속 글을 써야 하는 이유라고 밝히면서 미력한 책을 묶기로 결심한 까닭은 이런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독자들이 아직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과연 이런 종류의 비평은 어떤 의미일 것인지 회의적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급변하는 상황에 즉각적 대응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오늘의 비평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전한다. 한국의 어제와 오늘 트럼프 대통령 당선, 팬덤, 비트코인 열풍, 미투 운동, 사이버 불링, 판문점 선언 등 현재 이곳에서는 여러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 이런 각종 사회 현상으로 당장 무슨 큰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일지언정 이념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무엇인가의 이면에 가려져 있다. 차례만 살펴봐도 알 수 있듯 『빨간 잉크』는 저자가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주도면밀하게 통찰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비평집이다. 저자가 아우른 한국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탄핵 이후 모든 것이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세계는 세계 없음을 가리고 있는 스크린이다. 마치 디즈니랜드처럼 평화로운 세계는 세계 없음이라는 진실을 가리기 위한 가상의 현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가상의 현실은 파란 잉크처럼 진리의 빨간 잉크를 공백으로 간직한다. 진보와 보수가 치열하게 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동산 문제에 가면 둘의 목소리는 하나로 잦아든다.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소리 높여 말하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남북 경협이라는 경제 논리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남북문제에서 민족 이외에 다른 가치를 제시할 수 없는 곤경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되새겨봐야 한다. 평화가 우리 민족끼리 잘 사는 문제에 그친다고 한다면 지난 세기에 되풀이했던 문제를 다시 불러들이는 제스처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 전개되는 정치 상황은 이런 우려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집권 여당은 보수주의로 확고하게 이동했고, 그 대안은 이제 더 왼쪽에 있는 좌파가 아니라 더 오른쪽에 있는 우파다. 그러나 우파의 보수주의가 궤멸한 상황에서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것은 유럽의 경우와 유사하게 극우주의일 것이다. 대한문 앞에서 벌어지는 태극기 집회가 냉전 극우주의라면, 앞으로 다가올 극우주의는 냉전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전의 패러다임에 근거한 극우주의일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이후 많은 사람이 거대 담론의 종언을 이야기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 지구화가 초래하는 초국경의 상황은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로 나아갔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예멘 난민을 둘러싼 분위기는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만 세계 시민을 지향할 뿐이지 사실상 한국의 정책은 대내용인 경우가 허다하다. 포퓰리즘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정신이다.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성 제도와 포퓰리즘의 갈등은 규제를 완화하고 일부 세력의 특권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런 평평한 공간은 극우주의도 하나의 가치로 인준받는 과정을 예비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