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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 4
1 기술전체주의와 언어의 타락(정형철) ... 17 2 부족의 언어, 혐오의 언어(박권일) ... 43 3 태초에 행정이 있었다 : 시의 언어와 행정의 언어(고영직) ... 67 4 아직 없는 이름, 당사자(엄문희) ... 87 5 누가 말하는가, 누가 결정하는가(김동현) ... 113 6 ‘386세대’의 정치 언어와 자가당착(이택광) ... 133 7 방언의 상상력(전성태) ... 151 8 ‘헐’과 ‘샘’의 출세기(정은균) ... 169 9 속도의 언어와 시적 언어(황규관) ...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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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라고 해도 우리에게 그것들은 언어로 번역, 이해되기에 도리어 언어의 중요성은 부각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에는 언어 자체에 대해 고민하고 투쟁하면 될 일을 이제는 이미지와 영상이 생산, 수용되는 전 과정을 언어적 맥락에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즉각적으로 영상 이미지로 접해지는 유튜브도 결국 수용의 최종 단계에서는 언어로 남는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유튜브도 어쩔 수 없이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언어의 퇴행과 끊임없이 긴장하고 투쟁하는 일일 것이다. 이제 이것은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혹자들의 말처럼 이것은 시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궁극적인 차원의 문제는 그것대로 놔두고 일상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실천하는 문제 또한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말대로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타락이 곧바로 현실의 타락을 촉진하는 환경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여는 글」 중에서 미디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전환이 근대의 서막을 열었고 근대사회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대중매체는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문화적 도구였다. 영상미디어의 등장으로 말과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나 영상으로 사고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류가 탄생했다. 예전에도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사회문화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에 등장한 디지털 미디어만큼 충격적인 경우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디지털 미디어는 기존의 미디어 환경을 초토화하고 대중의 삶의 방식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재편했다. 근대사회 이후 언론 제국이라고 부를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세계적 주류 언론조차 존립의 문제를 고민할 만큼 디지털 미디어의 파괴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 pp.32~33 「정형철│기술전체주의와 언어의 타락」 중에서 또한 벡은 이와 별개로 현재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양한 종교가 상품으로 제공되는 종교 시장에서는 메시지가 강력할수록 공급자에게 유리하며, 이러한 강성의 종교 상품에 대한 선호가 현재의 근본주의의 융성으로 이어지고 있다.”12 종교와 관련된 이러한 두 가지 큰 경향성을 벡은 ‘재주술화’라는 말로 정의했다.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무엇보다 우리의 언어로 드러나고 있다. 바로 ‘부족의 언어’와 ‘혐오의 언어’다. ‘부족의 언어’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혐오의 언어’는 우리 시대의 부정적 단면이다. 그렇다고 언어를 순화하고 정화하겠다는 발상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그런 시도는 늘 실패했고, 더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 해야 할 일은 언어를 바꾸는 게 아니다. 세계를 더 낫게 바꾸는 것이다. --- pp.64~65 「박권일│부족의 언어, 혐오의 언어」 중에서 시의 언어, 혹은 예술의 언어가 관용 프레임을 넘어 다른 시각과 다른 상상력을 보여주는 언어를 구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권력과 자본을 향해 무엇인가를 해달라는 ‘청원請願’을 넘어서는 시적 활동과 예술 활동이 필요한 셈이다. 갈수록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 행정관료들은 절대로 사회 양극화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표현 대신에 ‘중산층 되살리기’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기조인 ‘포용국가’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포용국가라는 말은 현재 기표만 있을 뿐 기의가 없다. 이 말이 제대로 성립되려면 포용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행정의 철저한 인식과 성찰이 필요한데 그런 노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 p.80 「고영직│태초에 행정이 있었다」 중에서 문재인 정부 들어 줄곧 4·3항쟁 추념사는 당사자를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남겨진 유족들로 국한하며 ‘양민’으로 호명했다. 가해 당사자가 진실 규명의 당사자가 되면서 상생을 위한 화해를 발신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양민’이라 칭하는 것이야말로 4·3이 제주 사회에 여전히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로 존재한다는 증거다. 질문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 더욱 확장하고 심지어 폭발시킬 수도 있는 도화선이 그 이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잠재성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발본 가능한 질문을 과제로 가져야 한다. 그것이 4·3을 국가적 승인이라는 틀 안에서 박제화되지 않고 제주 사회에서 실재적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이다. --- p.104 「엄문희│아직 없는 이름, 당사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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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전쟁’의 시대!
이제는 뉴스도 못 믿겠다는 말들을 서슴없이 하게 되는 시대가 됐다. 비위가 발각되어도 예전 같으면 사과를 하고 일정 정도 책임을 지는 모습이라도 보였는데, 지금은 다른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다 보면 사후 맥락이 복잡해지고 그 복잡함 때문에 어느새 진실은 실종되고 만다. 한편으로는 법정으로 진실의 문제를 끌고 가 분탕질을 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진실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뒤이어 윤리 의식까지 희미해져버린다. 유명인의 페이스북 계정이 기자들의 출입처가 되기도 하며,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까지 한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이런 모습은 언론에 대한 불신감을 키웠고 나아가 ‘언어’에 대한 피로감을 갖게 했다. 이런 사회적, 문화적 현상에 때맞춰 그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는 책이 바로 『언어 전쟁』이다. 아홉 명의 필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바라본 언어의 타락 원인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겹치면서 다채롭게 우리의 생각을 우리가 쓰는 언어의 세계로 인도한다. 기술문명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고, 자본주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국가 제도(행정)의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 그 자체가 언어의 타락과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언어 현상에 역사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도 지적한다. 1980년대 이후 의회주의라는 제도는 진보와 보수라는 재현의 언어를 획득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의회는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대통령은 국민의 일반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분리되어 있다. 권력의 행사 방식에 차이는 있지만, 과거 보나파르트주의적이었던 박정희 체제의 구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체제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이해 조정을 제왕적 대통령제로 간섭하는 것을 ‘토착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박정희 체제의 언어가 여전히 외피만 바뀌어서 되풀이되고 있는 셈이다. ─「‘386세대’의 정치 언어와 자가당착」(이택광) 사실 언어의 변화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찾아온다.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강제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변화된 언어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강제를 수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주로 표준어에 타격을 가하지 지역의 방언은 그 정도가 조금 완화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표준어의 변화는 지역방언을 고립시키고 폐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렇게 해서 지역어가 갖는 무궁한 잠재성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방언의 자리도 마찬가지이다. 방언이 얼마만큼 보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러 종의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다양한 언어가 공존할 수 있을 만큼이면 된다. 이를 언어의 생태학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모국어라는 큰 숲이 서울말 일색으로 바뀐다면 그건 소나무만 무성한 숲이거나 아까시나무만 무성한 숲이기 쉽다. 그것을 두고 풍성하고 안정된 숲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방언의 상상력」(전성태) 나쁜 언어와 좋은 언어 지금 같은 언어 현상을 넘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조금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문학은 언어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문학평론가 고영직과 시인 황규관은 ‘시의 언어’를 꼽고 있다. 고영직은 자신이 겪은 관료주의의 예를 들면서 구체적인 시 작품을 끌어들인다. 고영직은 “나쁜 언어를 바꾸는 힘은 결국 살아 있는 시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 시의 언어도 무력해지고 있음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는 세상에서 시의 힘이랄까, 말의 힘은 갈수록 무력(無力)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행정의 언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오늘날 행정의 언어는 우리 사회에서 무력(武力)의 힘을 발휘한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그 점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말이 ‘수혜자’라는 표현이다. 한때 나도 공공기관에서 몸을 담고 일한 적이 있지만, 행정에서는 정책 대상이 되는 사람을 취급할 때 ‘사람’이라는 말 대신에 ‘수혜자’라는 말을 너무나 선호한다. 그러나 정책 대상의 ‘수요자=수혜자’라는 등식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태초에 행정이 있었다」(고영직) 고영직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언어가 달라지면 생각이 달라지고 그렇게 되면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이니까. 박권일의 “해야 할 일은 언어를 바꾸는 게 아니다. 세계를 더 낫게 바꾸는 것이다”는 결론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문제는 우리의 현실을 바꾸는 것이며, 현실을 바꾸는 움직임과 언어를 바꾸는 움직임은 동시에 밀고 나갈 문제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황규관은 좀더 노골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과 자본의 언어가 아니라 시의 언어라고 말한다. 언어라는 것은 구체적인 장소 그러니까 실질적인 생활에 지배받는 속성을 가진다면서 현대 기술문명의 폐단을 정형철과 동일한 문제의식 속에서 비판한다. 황규관은 소셜미디어와 언론이 이미 인공지능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우리의 생각도 인공지능에 지배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만약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속도의 언어를 버리고 시적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황규관이 생각하는 ‘시적 언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시적 언어’라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언어다. 일반화되고 납작해진 언어를 벗어던진 언어이고, 상투적인 유행어를 신경질적으로 배격하는 언어이다. 그것은 정파적 입장이나 정치 이념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각자의 몸에 새긴 언어이며, 그래서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미디어의 언어를 걷어내고 삶의 심장이 펄떡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언어이다. ─「속도의 언어와 시적 언어」 좋은 언어를 시의 언어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인 신뢰를 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의 언어가 우리에게 언어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품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지역의 방언 또한 시의 언어와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국가와 자본은 이 둘을 자꾸 없애려고 한다. 『언어 전쟁』은 그에 맞서자는 책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