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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달려라, 벗어나라, ‘3월의 토끼!’5 프롤로그 15 제1부 이기적인 유전자 3월의 토끼 23 원죄 33 사랑 49 이기적인 유전자 61 엄마보다는 여자 71 어른들의 선택 81 제2부 작은 희망 아버지의 집에 가다 89 라쿠카라차 111 운명이라는 수레바퀴를 좋아하지 않는다 121 작은 희망 143 불공평 153 슬픔 165 제3부 팜 파탈 가출 195 새로운 시작 203 팜 파탈 221 모든 순간이 너였다 237 실락원 255 존재의 이유 283 |
李定恩, 이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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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주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관계없다. 있지도 않은 신, 그 허상과 싸움이라도 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갈 수 없다. 지금부터의 기록은 생애 전체를 통해 신과 싸움으로 일관한 기록이다.
춘심은 아기 때문에 희망도 생겼고 살아갈 목적이 생겼다. 사노라면 온갖 고통과 싸울 힘도 생기겠지. 내 아기, 열 달 동안 내 몸속에서 함께한 분신인 아기를 생각하며 목숨 걸고 지켜내리라 결심했다. 춘심은 아기 이름을 ‘연화’라고 지었다. 혼탁한 세상이라도 연꽃처럼 청초하게 살라는 의미였다. ‘재주나방 애벌레’ 봄날의 ‘화려한 비상을 위해… 애벌레들의 치열한 생존기. 위장술의 달인, 재주나방 애벌레는 경계색인 붉은색 몸통에 삐죽삐죽 솟은 검은색 털로 공포심을 유발해 1차 보호를 한다. 그래도 공격하면 좀 더 적극적인 방어시스템을 작동한다. 마치 기계 선수처럼 몸을 뒤로 틀어 불룩하게 만든 후, 몸 앞부분도 들어 올려 뱀 같은 자세를 취한다. 재주나방 애벌레 가운데 2쌍은 다리가 기형적으로 자라 단순히 위협용이 아니라 실제로 앞발을 휘둘러 천적을 쫓아낸다. 검은 띠 재주나방 애벌레는 항문 쪽 다리 두 개가 꼬리처럼 변신했다. 자극을 받으면 방울뱀처럼 ‘따르르’ 소리를 내 천적을 쫓는다. 그때는 몰랐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질서, 나쁜 것에 종속되어 운명에 끌려 들어가고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되돌아올 때의 고통과 상실감을 저울로 달 수 없다는 사실을. 같은 조건이라도 남자아이는 처지가 다르다. 그 집안의 씨라는 존재이기도 하고 아무리 눈엣가시라 싫어도 집일을 시키지 않는다. 학교에 갔다가 눈을 피해 공부한다고 자기 방이나 친구의 집으로 스며들어 눈에 띄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혹독한 가사에 매달려야 한다. 앉아 있으면 안 된다. 언제나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한다. 한순간도 쉬지 못하게 한다. 끝도 없는 가사 일, 잔인한 일은 계속된다. 여자아이는 노동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근원적인 운명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니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죄를 짓게 되고, 왜 죄인이 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선택권도 행사할 수 없이 타인 때문에 한 여자의 삶이 뒤죽박죽되고 있었다. 난폭한 운명 화살의 타격을 견뎌내는 것이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의무인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서 저항하며 그래도 희망을 바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지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로 고통을 끝내는 것이 더 편한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건 자살이 개인의 선택이지 신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연화는 질주하는 기찻길 옆에 서서 철로를 보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마침 기차가 오고 있는 게 보였다. 눈앞이 까마득한 암흑, 자신을 향해 기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기차가 자신의 목을 밟고 넘어가는 느낌이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목으로 갔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일생은 먼지와도 같다. 한순간도 못 되는 찰나를 살면서 울고, 분노하고, 적개심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이다. 이런 찰나의 삶이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무한히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이 반복될 것이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하지 않던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자신이 엄마가 되려는 순간, 한 여자의 운명, 그 여인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진다. 험한 세상이라도 겪게 하고, 즐거움도 고통도 느낄 수 있게 한 것이 고마웠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훼손시킨 것이다. 내 아이에게 따듯한 가슴으로 지켜주어야 할 그런 엄마로 거듭나야 한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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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벗어나라, ‘3월의 토끼!’
여기 보호막 없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 한 생명의 삶이 있다. 지금 그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신은 혼자서 인간 만들기가 버거워 인간에게 대신 탄생의 과업을 주었다고 한다. 부담 큰 이 일을 기꺼이 하도록 남녀 간 강렬한 사랑으로써 생명을 탄생케 했다는 것이다. 생명은 양육과정에서도 탄생 못지않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탄생을 위해서일 때보다 더 큰 사랑으로써 여린 생명을 보듬어 자라나게 해야 한다. 낳고 키우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한쪽만 부족해도 인류는 멸종될지 모른다. 살아 남는다고 해도 온전한 인격체로 영글지 못하는 쭉정이가 될지도 모른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른들의 일방적인 생각, 계산에 의해 방치되는 아이들, 사회에 발붙일 곳 없는 아이들은 이내 범죄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사랑의 관심과 격려라는 비빌 언덕이 없는 외톨이들을 돌봐주는 건 사회, 곧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 수 없는데 말이다. 축복받지 못한 죄 없는 생명들, 가난과 불륜으로 세상에 태어나 보호자 없이 막막하게 내 던져지는 생명들, 매 맞는 게 일상이 되어버리는 생명들, 음지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생명들…. 그 고통은 어른이 되어서 복수하고 싶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게도 한다. 고통이 클수록 증오심도 커간다. 이런 부정적 마음에 가득 차서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진정 누군가 잡아주는 손길이 절실하건만.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아간 첩, 그가 낳은 남편의 딸을 키우며 미움을 다스리지 못해 악인이 되어가는 여자. 그 입장이 이해는 간다 해도, 미움의 매질 속에 살아야 하는 어린 생명의 삶은 비참 그 자체다. 그 여자, 그 어미의 죄를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한 일생을 그리고자 했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피해는 과거요, 가해는 현재로 나타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현재 가해자의 후회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동의하게 되기도 한다. 피해는 과거에 이루어졌고, 가해자는 불쌍한 모습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양새다. 피해 현장은 이미 지워졌고, 가해자는 변명이나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현실만 보고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기 쉽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피해자의 고통을 고스란히 대변할 수는 없다. 당시 그 고통을 절감하지 않고는 나름의 판단으로써 선처니 감형이니 용서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는 없으리라. 세상을 놀라게 한 ‘정인이 사건’. 제2, 제3의 정인이들이 고통 중에 죽어간다. 우리는 사망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그 고통을 짐작할 따름이다. 정작 당사자가 당하고 있던 때의 그 고통을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남의 갈비뼈 부러진 아픔보다 내 손톱 끝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더 아프다’고, 피해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그 고통을 다 알겠는가. 『삼월의 토끼』 주인공은 고통으로 인해 태어난 자체를 원망했고, 생명을 버리지 못해 살아남는다. 그늘이 깊으면 증오도 크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벼린다. 버려진 아이들은 어느 연령에 도달하면 고아원도 더 이상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이제부터는 보호하지 못한다고, 자립하라고 내보내진다. 아무 준비도 없이 사회로 내몰리면서 생활고며 사기며 사회악에 당하고 좌절하기 일쑤다. 어느 청년은 늘 칼을 품고 다녔다고 한다. “행여 길에서라도 나를 낳은 여자를 만난다면 칼로 찔러 죽이려”해서 였다고. 끔찍한 말이다. ‘부모님 은혜는 하늘같아서…’라는 노래도 있는데, 하물며 죽이려 한다니! 버릴 거면 왜 낳았는지, 그래서 온갖 고통을 겪게 했는지 묻고 응징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피해자의 편에 서면 복수심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 사회가 그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조금이라도 낫게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장면만 보노라면 이거 지나치지 않은가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채찍에 휘둘린 당사자 주인공의 아픔을 안다면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인과응보의 프레임을 떠나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는 그만큼 벌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을 더해 봐도 그때 약자의 고통을 다 느끼기란 어렵다. 폭력의 결과로 나타난 상처, 멍, 뼈 골절 등으로 짐작할 뿐. 직접 피해자, 주인공의 영과 육, 혼의 깊은 아픔 속으로까지 들어가 봐야 하리라. 영원히 잊힐 수 없는 아픔, 고통에 공감해 봐야 하리라. 그 결과, 복수에의 집착 또한 얼마나 허약하고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약자로 살아가는 어린 생명에게 강자가 가한 폭력은 어떤 벌로도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고통을 모른 체 가해자들이 살아가게 두어서도 아니 될 것이다. 모든 행위에는 적절한 대가가 따라야 마땅할 터이니. 섣불리 용서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당사자도 아닌데 왈가왈부하는 판정은 2차 가해에 다름 아니다. 칼날을 세우던 그 청년은 다행히도 복수의 마음을 버렸다고 한다. 이젠 홀로 설 수 있기에 모진 목숨이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데 대해 감사할 차례라고 말했다. 소설의 사회적 순기능을 마다하고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된 까닭은 내 어릴 적 친구의 무표정한 모습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 그 영혼을 위로해 줄 방법도 없다. 매를 맞고 절뚝이며 마당으로 쫓겨나던 친구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자의 얼굴, 차마 쳐다보기도 어렵던 그 얼굴.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지구상의 물체, 살덩이에 불과해 보였던 모습. 그에게 꼭 복수할 기회가 주어졌으면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혼을 달래주고 싶었다. 좀 더 살만한 세상을 꿈꿔보고 싶었다. 그 어떤 복수든 간에 나는 그녀에게 감히 면죄부를 주고자 한다! - 폭염주의보가 내린 초여름에 이정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