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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시집 ≪사슴≫ 이전 발표작

가마구
어린아이들
定州城
山地
酒幕

나와 지렝이
늙은 갈대의 獨白
여우난곬族
統營
힌 밤
古夜

시집 ≪사슴≫ 수록작
얼럭소 새끼의 영각
가즈랑집
여우난곬族
고방
모닥불
古夜
오리 망아지 토끼

돌덜구의 물
初冬日
夏畓
酒幕
寂境
未明界
城外
秋日山朝
曠原
힌 밤

노루
靑枾
山비
쓸쓸한 길
?榴
머루밤
女僧
修羅

노루

국수당 넘어
절간의 소 이야기
統營
오금덩이라는 곧
枾崎의 바다
定州城
彰義門外
旌門村
여우난곬
三防

시집 ≪사슴≫ 이후 발표작
統營
오리
연자ㅅ간
黃日
湯藥
伊豆國湊街道
昌原道?南行詩抄 (一)
統營?南行詩抄 (二)
固城街道?南行詩抄 (三)
三千浦?南行詩抄 (四)
묘비명?咸州詩抄
北關?咸州詩抄 (一)
노루?咸州詩抄 (二)
古寺?咸州詩抄 (三)
膳友辭?咸州詩抄 (四)
山谷?咸州詩抄 (五)
바다
丹楓
秋夜一景
山宿?山中吟 (一)
饗樂?山中吟 (二)
夜半?山中吟 (三)
白樺?山中吟 (四)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
夕陽
故鄕
絶望

외가집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東海
三湖?물닭의 소리 (一)
物界里?물닭의 소리 (二)
大山洞?물닭의 소리 (三)
南鄕?물닭의 소리 (四)
夜雨小懷?물닭의 소리 (五)
꼴두기?물닭의 소리 (六)
가무래기의 樂
멧새 소리
박각시 오는 저녁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童尿賦
安東
咸南道安
球?路?西行詩抄 (一)
北新?西行詩抄 (二)
八院?西行詩抄 (三)
月林장?西行詩抄 (四)
木具
수박씨, 호박씨
北方에서
許俊
아카시아
≪호박꽃 초롱≫ 序詩
歸農
국수
힌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塘에서
杜甫나 李白같이
당나귀
나 취했노라
머리카락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七月 백중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 方

분단 이후의 시
계월향 사당
등고지
제3인공위성
이른 봄
공무려인숙
갓나물
공동식당
축복
하늘 아래 첫 종축 기지에서
돈사의 불

전별
천년이고 만년이고…
탑이 서는 거리
손’벽을 침은
돌아온 사람
석탄이 하는 말
강철 장수
사회주의 바다
조국의 바다여
나루터

분단 이후 동시 동화시
병아리 싸움
까치와 물까치
지게게네 네 형제
집게네 네 형제
쫓기달래
오징어와 검복
개구리네 한솥밥
귀머거리 너구리
산’골 총각
어리석은 메기
가재미와 넙치
나무 동무 일곱 동무
말똥굴이
배’군과 새 세 마리
준치 가시
메’돼지
강가루
기린
산양
오리들이 운다
송아지들은 이렇게 잡니다
앞산 꿩, 뒤’산 꿩
감자
우레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저자 소개 1

BAEK SEOK,白石,白奭,백기행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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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1월 08일
이용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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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EPUB(DRM) | 11.8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0만자, 약 3.4만 단어, A4 약 63쪽 ?
ISBN13
9791128878671

출판사 리뷰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기 중후반기의 조선 문단을 배경으로 활동을 하다가 분단을 겪으며 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심한 교란을 겪게 된다. 당시 모든 문학인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이라는 가파른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수년간 서울 문단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만주 일대를 유랑민처럼 떠돌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유적(浮游的) 삶을 살았다. 그러한 와중에서 해방이 되었고, 조국은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체제로 분단되었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한반도의 관서 지역이었다. 시인의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 모두가 고향 부근에서 살았다. 시인 또한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면서 고향 가까이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서울로 월남해 내려올 만한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노선이 별도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북쪽에 수립되었던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그는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당시 사회의 중심권으로 진입하지 않고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한때 거주했던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완전히 잊힌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일러 문학사에서의 매몰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다가 1987년 서울에서 분단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을 모은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후로 그는 남한의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인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이름은 백석(白石, 1912∼1995)이다.
이제는 백석 시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백석은 인기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오죽하면 젊은 시인들조차도 문학 수업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시인의 한 사람으로 단연 백석을 일컬을 정도로 백석 문학의 감화력과 영향력은 이미 객관적 검증을 받은 상태다.

백석의 시는 시간이 지나도 그 특유의 신선함과 발랄함, 그윽함과 도란거림의 예술적 음영과 세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특이한 효과로 점차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확장과 보편화가 주는 놀라움의 근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백석 문학이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민족적 전통성이라는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서양 문학(영문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강의를 들었던 시인들이 대개 서양 문학의 방법론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단순 추종자나 그 에피고넨이 되기가 십상인데 한국 문학사에서는 특이한 세 시인이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김소월, 정지용, 백석이다. 서양 문학을 공부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민족의 전통이라는 후미진 뒷골목으로 돌아들었던 것이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재학하며 영미 문학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충분히 습득했던 백석이 어떻게 민족적 전통이라는 가치관 쪽으로 확연히 돌아앉아 시 창작의 중요 테마로 떠올리며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가? 백석의 시는 모더니즘을 통해 창작 방법론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더니즘이 지닌 한계와 제한성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지 자본주의가 드러내고 있던 여러 부정적 파괴적 징후를 시인이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고뇌하는 활동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백석의 문학 세계가 나타내는 전통성의 다양한 갈래와 그 의미에 대해 낱낱이 점검하고 확인해 보면 시인 백석이 식민지라는 정치적 문화적 폐쇄 공간 속에서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작업에 몰두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이 당시 시인이 품고 있었던 일정한 비평적 의도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명과 반문명이라는 대립항에서 일제가 그토록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졌던 문명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반문명이었다는 사실을 백석 시인은 강조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이야말로 상대적 제국주의문화를 압도하고 진정한 문명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길이었음을 시인은 작품을 통해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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