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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집-7
부어족과 로마족-28 달밤의 술래잡기-74 어쩌다, 청춘-113 불발탄들 -181 저녁의 탄생-218 저자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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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이라는 건 집 주소가 미로가 되지 않은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미로. 입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차가 부드럽게 굴러가다가 급정거하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이 이렇게 급정거할 줄은 몰랐다. 문지방을 넘어서 세상으로 나가자마자 ‘집 주소가 미로가 되었다’라고 동사무소에 신고해야 했다. 주민등록증 뒷면에 있는 주소 변경란에 이사 간 새 주소가 아니라 ‘미로(迷路)’라고 적히는 것이다.
‘미로 등록신청서’, 단 한 장의 종이만으로도 집 주소가 미로로 바뀌다니 서류란 놀라운 존재였다. - 이미 한 달 전에 고시원비를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지고 있는 책과 옷들을 몽땅 온라인 중고 카페나 동네 마켓에 팔아도 고시원비를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어제부로 파산에 이르렀다. 어제 지갑에 남아 있던 마지막 돈으로 편의점에서 전주비빔밥 맛의 삼각 김밥과 복숭아 맛 쿨피스를 사 먹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돈이 먹어야 할 것을 골라 주었다. 들어올 대기자만 열 명 넘게 있었으므로 단 하루도 고시원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 --- 「미로의 집」 중에서 -집이 침낭이 되어 버린 건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매일의 노동으로 어깨가 굳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스크래치를 만들며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 집을 잃고 미아가 된 이들은 서울을 헤매고 다녔다. 일세 팔천 원의 고시원보다 싼 사천 원짜리 만화방과 다방에도 사람들이 벅찰 정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신종 여관이 된 만화방과 다방이 방이라는 이름만 남은 지도 오래였다. 나는 집의 레벨이 빠르게 낮아져 그 여관조차 건너뛰고 바로 집 주소가 미로가 된 셈이었다. 이 년 전, 서울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보증금 백만 원에 월 사십만 원 하는 원룸에서 살았다. 가진 돈으로는 반지하나 옥탑방에 가야 했지만 서울 생활의 시작을 든든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렸다. 그 대가로 일 년 만에 보증금까지 까먹고 나와야 했다. 내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한 대학교 신입생이 원룸을 차지했다. 생각해 보면 고시원에서 살 때만 해도 호시절이었다. 중국에도 고시원과 비슷한 집이 있다고 들었다. ‘워쥐(蝸居)’라는 달팽이 집. 캡슐 집이라고도 불렸다. 병이 났을 때 판박이처럼 찍어 낸 캡슐 약을 끼니때마다 먹듯이 달팽이족, 워훈주(?婚族)들은 캡슐에 먹히면서 캡슐의 삶이 하루라도 단축되기를 바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상과 이불만 놓여 있는 캡슐 집의 문을 여닫는 동안 그곳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도 닳고 무뎌질 것이다. 한국에 있는 고시원은 ‘계란판 집’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았다. 계란 크기에 맞춘 구멍들이 일정하게 늘어서 있는 계란판처럼 몸에 꽉 끼는 방들이 붙어 있으니 말이다. 몸을 부리고 나면 남는 공간이 하나도 없어서 집을 입고 산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 계란판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다가 깨진 거나 다름없었다. 깨진 달걀은 계란판에서 나온다고 해도 쓸모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부어족 순례.” “국토 순례랑 비슷한데, 우리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임이라데. 돌아댕기면서 집을 구한다든데. 매달 있다고 하니 한번 가 봐라. 말일에 출발하니 시기가 딱 맞네. 니한테도 도움이 될 거다.” “다음 소식입니다. 정부는 최근 증가하고 있는 청년 부어족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이는 국제기구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부어족 순례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결과로서…….” -서울역 광장에는 나처럼 배낭을 멘 사람들이 많았다. 스무 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은 깃발을 들고 있기도 했다. 제일 큰 깃발에는 집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에게 집을 그리라고 하면 흔히 그릴 것 같은 모양이었다. 집 그림 위에는 ‘부어스’라는 말이 한글로 적혀 있었다. --- 「부어족과 로마족」 중에서 - 요새 부어족이 그렇게 많다던데, 거기까지는 되지 마라. 잘되기를 기원해 주는 대신 잘못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엄마 마음일 터였다. 그렇게 우리는 독립 가족이 되었다. 예산을 스스로 충당하는 독립 영화처럼 각자의 예산을 충당해야 하는 독립 가족. 말은 멋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독립 영화와 비슷했다. 엄마의 말과 반대로 이렇게 부어족이 되어 걷고 있으면서도 엄마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철저히 독립한 셈이었다. -걷고 있는 동안에는 휴대폰을 꺼 놓으라는 대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쉬는 시간에 몰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걸어갈 때는 불빛이 각 조의 맨 앞 사람이 들고 있는 붉은 야광봉에서만 나왔는데 길가에서 쉴 때는 휴대폰 불빛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지상에 있는 별빛들이었다. 부어족이 된 뒤에도 연락 올 사람들이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내 휴대폰은 호수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돌처럼 고요하게 배낭 앞주머니에 잠겨 있었다. 휴대폰이 정지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연락 올 데도 없었다. 시계로도 사용할 수 없는 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순례하는 동안에는 비닐봉지나 플라스틱 케이스 하나도 다 짐이라 휴대폰은 무거운 축이었다. 그래도 휴대폰을 고시원에 두고 오지 않고 기어이 배낭에 넣어 왔다. 구형 퓨대폰이라 어플 하나 실행하기 힘들어도 내 밖의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다. --- 「달밤의 술래잡기」 중에서 - 지금까지 몰랐던 술래잡기는 또 있었다. 음식을 구하러 간 이들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을 사 오라고 준 상당한 양의 회비도 못 돌아왔다. 돈도, 사람도 가로새 버렸다. 슈퍼를 갔다 오는 것이 아니라 텃밭에서 채소를 뽑거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올 정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을 때, 대장은 눈을 번쩍 뜨고 외쳤다. “먹튀로군!”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 회비의 반이 증발했다는 소리지.” “아니, 뭘 믿고 회비를 그렇게나 많이 줬어요?” “이런 데서는 편의점을 찾기 힘드니까, 한꺼번에 많이 사서 쟁여 놓으려고 한 것이 그만…….” 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거대한 함선의 선장 같은 이미지였던 대장의 얼굴이 순간 멍해 보였다. 이번이 첫 순례도 아닌데 덜컥 회비의 반이나 맡겨 버린 배짱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부어족들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는 이도 있었다.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리거나 대장을 노려보는 이들도 있었다. --- 「어쩌다, 청춘」 중에서 -열두 명의 부어족이 몰려들자 좁은 경찰서 안이 꽉 들어찼다. 순례를 포기하고 도망가려던 여섯 명의 부어족도 꼼짝없이 같이 와야 했다. 도망을 못 가 억울하다는 생각보다는 진실을 알고 싶어서 안달 난 듯한 표정이었다. 경찰이 했던 말은 모두 꿈 같았다. --- 「불발탄들」 중에서 -나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마주쳤던 가족의 집으로 향했다. 대문은 잠겨 있지 않 았다. 대문을 살며시 열었다. 조심스럽게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에는 빈 빨랫줄만 걸려 있었다. 그 줄보다 더 많은 전깃줄은 하늘을 갈라놓았다. 유난히 밝은 달이 전깃줄 사이에 걸려 있었다. 다른 이의 집에 함부로 침입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오늘만큼은 집 있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싶었다. 하룻밤만 옥상을 빌리기로 했다. 드디어, 오늘의 집을 찾았다.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 안에 몸을 들이밀었다. 지퍼를 목까지 올린 다음 그 상태로 일어났다. -폭죽의 가느다란 연기에도 눈이 시큰거렸다. 눈물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얼굴을 가리고 싶으면, 침낭을 머리끝까지 올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술래잡기 역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해서 얼굴이 가려져야 술래를 하기 좋았다. 이번에는 숨어 있는 사람들을 반드시 찾는 술래가 될 것이다. 머리카락이 안 보여도 꼭꼭 찾는 술래. 그 술래가 나였다. --- 「저녁의 탄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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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들이 영끌까지 해서 아파트를 매입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의 다른 한편에서는 원룸에서 고시원으로 다시 노숙으로 쫓겨나 길거리에서 몸부림치는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도 있다. 권혜린 작가는 장편 소설 『부어스, 별을 따는 사람들』에서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고시원의 쪽방에서조차 쫓겨난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는 별(집)을 따기 위해 부어스 족들이 밤중에 서울역에 모여 출발한다는 정보를 외사촌에게 듣고 서울역으로 간다. ‘나’는 20여 명의 집 없는 낯선 젊은이들과 함께 밤에만 걸으면서 별을 따기 위한 전국 순례길에 나서고, 그 순례길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많은 에피소드들이 펼쳐지는데... 일독을 권한다
▶ 저자의 말 이십 대 후반에 썼던 소설을 십 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에 세상에 내놓는다. 자리를 찾는 데 오래 걸려서 시간의 간격이 큰 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청년 문제와 주거 문제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쓰는 사람의 마음으로, 낯익은 주제가 낡은 주제가 되지 않길 바라며 글을 다듬었다. 이 소설을 볼 때마다 뜨겁게 걸었던 여름이 떠오른다. 내 자리에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을 따라가며 쓰는 것에 관해서도 많이 생각했었다. 내 글을 쓰겠지만, 나만을 위한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같은 길만 계속 가는 것에 지칠 법도 한데 글의 순례를 포기하지 않아 안도감이 든다. 그 안도감에는 긴장감도 약간은 섞여 있다. 본격적인 길은 지금부터 시작일 것이므로. 당시에는 피로와 더위에 지친 모습만 기억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되는 건 어두운 길을 밝혀 주었던 야광봉과 반딧불이의 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으로 기억되는 길이 앞으로의 걸음을 이끌어 줄 것이다. 흐르듯이 사느라 매듭을 짓지 않고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는데, 이제야 이십 대를 제대로 마감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