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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5
제1장 다원론적 실재론 · 11 제2장 시간의 실재성 · 83 제3장 영혼의 색채 이론 · 109 제4장 업과 영혼의 관계 · 127 제5장 상대주의적 인식론 · 151 제6장 요가 수행론 · 177 제7장 불살생과 식생활 원리 · 209 제8장 채식주의 음식 문화 · 231 제9장 나체 고행주의 · 267 결어 · 295 참고 문헌 · 301 인도어의 음역 표기법 · 311 찾아보기 · 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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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는 불교와 같이 슈라마나 전통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도의 민족 종교이다. 흔히 불교의 교조인 가우타마 붓다와 자이나교의 제24대 조사 마하비라가 동시대 인물이었다는 점을 토대로 하여 불교와 자이나교의 유사성을 논하기도 하며, 일부에서는 마하비라의 가르침이 붓다의 교설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의 초기 경전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마하비라는 샤키야무니보다 생존과 입멸 연대가 이르며, 붓다가 슈라마나적 전통에 따라 수행을 한 끝에 정각(正覺)을 얻어서 새로운 교단을 창시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할지언정, 마하비라가 붓다의 전법 이후에 등장하여 붓다의 영향 아래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인도 철학파에서 깨달아야 할 지식과 지혜의 대상은 각 학파에 따라 상이하다. 깨달아야 할 대상이 진리이고 지혜라 할지라도 각기 다른 철학적 전통에서 설파하고 있는 깨달음의 내용은 일치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각 종파의 전통에 따른 지혜나 지식을 깨달아 알면 그 종파의 기준에 따른 깨달음을 성취한 자가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어느 특정 종파의 고유 명사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깨달음, 그 자체는 인도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관점과 논점이 달라져야 한다. 정작 깨달았다는 내용 자체는 불교와 자이나교가 다르고 자이나교와 힌두교가 다르다. 따라서 자이나교의 전통에서는 깨달음 그 자체를 논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라는 가능성과 개연성을 부여받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자이나교에서는 최상의 지혜를 완벽하게 획득한 경우를 완전지(完全知)의 상태라고 상정하고, 그 단계까지 이르는 방법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로 설명할 뿐이며, 반드시 완전지의 경지를 얻은 경우만을 가리켜서 깨달았다거나 깨달은 자라고 하지 않는다. 완전지자와 불완전지자의 상태가 구별될 뿐, 완전지와 불완전지의 구분 개념으로 ‘깨달음’의 유무를 말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점차로 깨달아서 최종적인 완전지에 이르기까지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단계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유무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jn?na)의 정도로 단계를 달리하며, 지혜가 낮은 사람은 보다 더 높은 지혜를 가진 이에 대해 존경심을 내고 의지하는 것이 자이나 신앙의 본질이다. 그리고 더 나은 지혜를 갖기 위해서 저마다 각고의 수행을 다하는 것이다. 요컨대 자이나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보다 나은 지혜를 갖는 데 있으며, 단식과 명상을 비롯한 온갖 고행 방법은 오로지 완전지의 성취로 귀착된다. 바로 그 지혜의 궁극점에 도달한 자가 바로 싯다(siddha)이자 티르탕카라(t?rtha?kara)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