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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먹는 식인귀>
당신과 나처럼 / 독실한 채식주의자 고용인 / 되살아난 악습 발튀스, 처음 사랑에 빠지다 / 마지막 기회 / 자신을 바치다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 사라진 얼굴 / 우발적인 유괴 / 차가운 지하실 안에서 가정부로 변한 심술궂은 마술사 / 자유를 빼앗긴 서글픈 바퀴벌레 일요일의 기적 / 불 속으로 뛰어들다 |
Pascal Bruck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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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는 지나칠정도로 엄격했다. 발튀스는 탁아소나 학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아야 했다. 침을 흘리는 즉시 그는 혀가 얼얼해질 정도로 따귀를 맞았다. 두눈을 감으면 온몸에 또다시 전기가 올랐다.
--- p.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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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마티외는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불꽃이 화학자의 얼굴을 지워버렸고, 속돌로 갈듯 그 특징들을 갈아버렸다. 또한 불꽃은 그 얼굴을 정화하고 개수하여, 심한 공포로 뒤틀린 그 얼굴에 미소 같은 무엇,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부드러움을 새겨놓았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훨씬 젊은 다른 남자, 거의 천사에 가까운 남자가 새로 만들어져 도기처럼 새로 구운 것 같았다.
--- p.150-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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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튀스 자민스키는 배가 튀어나오고, 콧수염이 길게 늘어지고, 피와 기름기로 얼룩진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식인귀가 아니었다. 그랬다, 그는 소름끼치게 포효하는 그런 육식동물이 아니라, 언제나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있는 품위 있는 '신사'였다. 두 손이 약간 억세고 이가 아주 날카로울 뿐. 장갑을 끼고 있거나 소리내어 웃지 않을 때 - 그럴 때면 면도날처럼 예리한 앞니들이 드러나곤 했다 - 면 그런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자민스키 일가는 귀족이었다. 폴란드 출신인 그들은 4세기전 고향땅을 떠나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발튀스에게는 도처에 친척이 있었다. 그의 삼촌 하나는 남아프리카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고, 또다른 삼촌은 덴마크 최고행정법원의 판사였으며, 사촌 중의 하나는 뉴욕에서 큰돈을 벌었고, 또다른 사촌은 호주에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 식인귀는 아니었다. 프랑스의 자민스키 일가만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어머니에서 딸이 그런 신분을 이어내려갔다. 만약 식인귀의 아이가 운좋게 부모에게 먹히지 않은 채 열살 - 이것은 아이의 유통기한으로, 그 날짜가 지나면 아이는 늙은 말처럼 피부병이 생기고 육질이 질겨진다 - 을 넘길 수 있다면 그 아이는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된다. 구원의 나이가 될 때까지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은 고용인들의 임무였다. ---p.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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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짐짓 미소를 지어보이자, 아기는 즉각 미소로 대답했다. 그것이야말로 식인귀들의 알 수 없는 점이다. 아기들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알아보고, 설명할 길 없는 이유에서 그들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식인귀들이 자신들에 대해 갖고 있는 관심과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감지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식인귀들이 그들을 잡아먹으려 하는 동안 아이들은 놀이를 하고 있다고 여긴다. 대개 한 입 먹히고 난 다음에야 풀리는 그 불가피한 오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 p.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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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공포의 끝에서 기묘한 슬픔과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검은 동화'
식인귀의 후예인 발튀스 자민스키는 선천적으로 식인귀성을 핏속에 물려받아 세상과 충돌하고, 살충제 회사에 다니는 폴 폴콘은 자신이 누리지 못한 세상을 원망하며 불행에 빠진 나이 든 독신남자이다. 발튀스는 아이가 좋아서 너무 맛있어서 아이 고기를 먹고, 폴은 아이가 싫어서 너무 행복해 보이는 그들이 꼴보기 싫어서 아이의 얼굴을 페인트로 지워버린다. 이처럼 <아이를 먹는 식인귀>와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 두 작품의 주인공 식인귀 발튀스와 화학자 폴에게 기쁨과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는 아이이다. 발튀스와 폴 모두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아이들이라는 대상을 통해 어긋난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아이를 먹는 식인귀>에서 식인귀 발튀스가 '식인귀'의 끔찍한 이미지와는 달리, 멋진 외모에 예술을 사랑하는 교양있는 젊은 법률가로서 보통 사람들처럼 신용카드로 물건값을 계산하고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설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 주위의 누군가가 어쩌면 내 친구가 내 직장동료가 식인귀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식인귀'가 뜻하는 바는 독자의 관점과 느낌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단순히 나쁜 습관을 의미할 수도 있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처럼 기존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먹는 식인귀>의 뛰어난 점은 마지막 반전에 있다. 그 반전이 가져다주는 전율은 이 작품이 단순한 재미나 교훈을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용인이자 후견인이기도 한 카르치오피의 방해로 더 이상 아이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된 발튀스는 급기야 자신의 몸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로 한다. 서커스 무대 위에 마련된 펄펄 끓는 가마솥 안으로 뛰어들며 그는 카르치오피에게 윙크를 한다. 그리고 카르치오피는 그 윙크의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된다. '껍질 한 조각이든 손톱 부스러기든 간에 식인귀를 먹은 사람은 누구든 식인귀가 되기 때문이라고. 이제 사방으로 흩어진 수백 명의 장난꾸러기들이 턱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가는 가운데 입맛을 다시며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노라고.' 어쩌면 오늘날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은 그때 발튀스의 고기를 먹은 아이들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