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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서문 | 4
글을 시작하며… | 8 글을 마치며… | 284 제1장 복음의 여명 1. 이수정과 마가복음 | 28 이수정의 개종 | 29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다 | 31 조선의 마게도냐인 이수정 | 33 마가복음으로 시작한 선교 | 37 2. 남장로교와 유니온신학교 | 39 선교 열풍이 미국을 휩쓸다 | 39 조선 선교를 호소하다 | 41 남장로교 선교사 양성의 산실 | 44 7인의 개척자 조선에 오다 | 46 제2장 동학과 백낙규 1. 조선, 침체의 늪에 빠지다 | 51 동학농민항쟁의 발발 | 51 전주화약 | 54 청일전쟁과 일본의 승리 | 55 일본의 내정간섭 | 56 2. 동학(東學)에 참여하다 | 57 18세 청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 57 동학에 입도하다 | 58 삼례기포에 뛰어들다 | 59 우금치 전투 | 60 3. 익산(益山)에 은신(隱身)하고 둥지를 틀다 | 65 백제의 고도 금마, 요교호의 전설 | 65 황등의 유래 | 72 제3장 군산선교부와 초기선교 1. 수탈의 애환이 서린 군산 | 76 군산의 개항과 침탈의 시작 | 76 소작농이 급증하다 | 80 옥구 농민 소작쟁의 | 81 식민지 하부구조로 전락하다 | 82 2. 선교사역의 시작과 활동 | 84 선교사들의 정착 | 84 선교 스테이션을 조성하다 | 88 전도선 선교 | 88 3. 시련을 딛고 자리를 잡다 | 91 드루 박사의 귀국 | 91 전킨의 사역과 그의 죽음 | 91 데이비스의 죽음과 하위렴의 합류 | 94 부위렴 부부 선교사의 활약 | 98 뱃길을 따라 충남지역으로 | 102 영명학교와 인돈의 교육사역 | 103 의료선교사들의 활약 | 105 4. 남장로교 선교부의 통전적 선교전략 | 109 거점據點중심 선교를 펼치다 | 109 순회사역으로 지도력을 세우다 | 111 열린 교육을 지향하다 | 114 팀 사역으로 선교 효과를 극대화하다 | 115 제4장 백낙규와 동련교회 1. 복음을 만나다 | 119 장터에서 만난 선교사 | 119 신앙공동체를 꿈꾸며 | 126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 127 보편적 가치와 사명을 깨닫다 | 130 조직교회로서 자리가 잡히다 | 133 2. 예수꾼 공동체, 동련교회 | 135 공동체의 정체성을 세우다 | 136 계몽에 앞장서며 전도의 기회로 | 139 말씀을 실천하며 본을 보이고 | 143 윤리적 기준에 맞춰 권징까지도 | 144 3. 해방 이전까지 동련교회를 섬겨온 목회자 | 146 하위렴William B. Harrison | 147 황재삼 | 152 매요한John McEachern | 154 박연세 | 157 김중수 | 160 보이열Elmer T. Boyer | 162 구연직 | 165 선교부 철수 이후 동련교회를 맡은 목회자들 | 169 4. 핍박과 고난의 시절 | 170 신사참배의 강요 속에 교회가 해산되다 | 170 아! 백낙규 장로의 소천 | 176 제5장 백낙규의 실천적 신앙의 전개 1. 영성의 변천과 사명의 재발견 | 182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 182 고향을 등지는 농민들의 이산離散을 보며 | 190 3·1 운동, 독립의 열망을 함께하다 | 194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찾고자 | 196 2. 청소년 교육에 힘쓰다 | 200 갑오경장과 교육조서 | 200 교육구국운동의 물결 | 202 계동학교를 세우다 | 203 민족교육의 요람 | 209 3.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은 하나 | 213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 213 나무 심기 운동과 농촌계몽 | 217 4. 선교적 공동체를 지향하며 | 220 선교적 교회로서의 역할 | 220 포자 교회와 교회분립 | 222 제6장 갈등을 넘어 토착화로 1. 토착화 과정의 전개 | 230 예양협정과 선교구역의 분할 | 230 다양한 문화적 토양 | 233 복음의 수용성과 교회성장 | 237 2. 도약과 성장 | 240 뜨거운 성령의 역사 | 240 지역별 복음화율 | 244 3. 갈등과 분열의 아픔을 견디며 | 247 제7장 동시대(同時代)를 동역(同役)하며 1. 지역교회와 지도자들의 활약 | 255 『김인전과 서문교회』 | 258 『최흥서와 지경교회』 | 260 『홍종필과 개복교회』 | 262 『조덕삼/이자익과 금산교회』 | 264 『김계홍과 삼례교회』 | 268 『최학삼과 대창교회』 | 270 『강평국과 구봉리 교회』 | 274 『이승두와 번역자회』 | 276 『오인묵/오긍선 부자父子와 구암교회』 | 278 2. 초기교회 리더십의 역할과 기능 | 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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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도 신사참배를 애써 국민의례 정도로 여기며 황민화를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백낙규는 신사참배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병으로 쇠약해져 거동이 불편해진 상황이었고, 노회 활동에도 참석하기 어려워 외부와의 만남을 끊었다. 면내 총독부와 같은 황등 주재소의 순사들은 이러한 백낙규의 거동을 주시하면서, 병을 핑계 삼아 협조에 불응하는 것으로 여기고, 백낙규와 동련교회를 요시찰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계동학교를 불령선인 양성소로 취급하며 개똥학교라고 부르기도 하고, 각종 규제로 묶어두고 늘 감시하던 터였다.
1917년 전북노회 창립 이래, 줄곧 백낙규는 노회 활동에 적극적이었으나 군산노회가 전북노회로부터 나뉘던 1939년 백낙규는 이미 노환이 찾아오고 있었다. 신사참배에 대한 총회의 결의로 선교사들마저 철수한 상태에서 1942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산되어 일본 교단에 편입이 되자, 교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인욕(忍辱)의 세월을 지내온 백낙규 역시 나이와 건강을 넘지 못하고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의 나이 예순일곱. 백낙규는 질려와 형극으로 뒤덮인 협착한 시대의 뒤안길을 쉼 없이 달려와, 1943년 6월 18일 숨 가빴던 행려(行旅)를 마감했다. 오로지 교회만을 생각하고 신앙인으로만 살고자 몸부림치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의 죽음은 고락을 같이했던 성도들은 물론 지역공동체의 슬픔이었다. 온 교인들은 비탄에 잠겼다. 나라를 잃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신앙마저 지킬 수 없는 어려운 시기에 교인들의 울타리가 되어 이끌어주던 백낙규의 죽음은 교회와 온 교인들을 암울하게 만들었다. 예기치 못했던 교회의 수난이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 백낙규가 죽고 2개월 뒤 일제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당회의 의결도 거치지 않은 강압적인 통보를 교회는 수용해야만 했다. “소화 19년 3월 31일 동련교회는 시국하에 의하여 황등교회와 병합한 바, 교인 및 모든 재산까지도 합하되 현재 직원은 그대로 임무를 대(帶)하고 병합하라.”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비협조적이던 동련교회는 결국 1944년 교회의 폐쇄와 더불어 황등교회와의 강제적인 병합 수순을 밟게 되면서, 동련교회는 이름조차 사라지고 실질적으로 해산이 되고 말았다. 병합된 황등교회는 일본 교단에 포함되고 말았다. 이 지역에 모(母)교회였던 동련교회의 해산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온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날을 안타까워했다. 황등교회가 동련교회로부터 분립해 나간 교회였음에도 오히려 동련교회를 황등교회에 병합시키고 있는 것은 일제의 교활한 책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사참배에 비협조적이었던 동련교회와 민족교육을 힘써오던 계동학교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차에 동련교회를 폐쇄, 황등교회에 병합시킴으로서 부설 학교인 계동학교까지 함께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황등산 자락에 신사를 세우면서 이미 문이 닫힌 계동학교 후원회 지주석(支柱石)을 빼내 ‘皇紀 二千六百年’이라 새기고, 일장기를 꽂아두는 기대석(旗台石)으로 사용했다. 돌의 고장 황등에서 많고 많은 돌중에 적당한 돌이 없어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를 뒤져 신사의 기대석(旗台石)으로 가져갔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것은 동련교회와 계동학교의 탄압을 계획적으로 시도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 돌은 해방 후 어떤 지역주민이 문설주로 사용하던 것을 우연히 발견해, 1988년 동련교회로 다시 옮겨와 신사참배로 말미암은 교회탄압의 역사 자료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아! 백낙규 장로의 소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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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규 장로의 신앙과 영성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 는 1900년도 남장로교 선교사 하위렴William W. Harrison에게 복음을 듣고 동련교회를 설립하신 백낙규 장로의 신앙과 영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일찍이 동학농민항쟁에 뛰어들어 소접주로 우금치 전투에 참여했지만, 패전 후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다가 복음을 듣게 된 특이한 신앙 이력의 소유자이다. 한국 초기교회사를 뒤돌아보면 다양한 영성을 가진 분들이 출발하고 있지만, 백낙규야말로 역사의 한복판 격동의 시대를 지나며 기성에 회의하고 그가 들었던 복음을 따라 지향을 추구한 외곬의 신앙인으로 실천신앙과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분이다. 남장로교 초기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기독교의 발아를 지켜보신 분으로 그가 익산군 황등면에 세운 동련교회는 올해 120주년을 맞는 유서 깊은 교회로 실재하고 있고, 한국기독교의 분열과 갈등 속에 기장에 속한 교회로 지역사회에 귀한 사역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이기도 하다. 남장로교 선교사를 다룬 많은 교회사 학자와 목회자들이 있지만, 아직도 묻혀 있는 초기교회 인물들을 세세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책 백낙규 장로의 활동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잊혀 가는 그 시대와 초기교회의 진경을 새롭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동학과 백낙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몸부림치던 초기 지도자들의 삶과 신앙 백낙규가 맞닥뜨린 역사는 동학에 깊이 줄을 대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해방 이후 최근까지도 그렇게 엄연(儼然)했던 동학농민항쟁을 짐짓 내몰리던 역사로만 밀어두다 보니, 벼랑 끝에서 절규했던 민초들 이야기는 어느새 들여다볼 수 없을 만치 지워져 있었다. 많은 기록물을 뒤져보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참여한 인물들의 구체적 행적을 추적해둔 것들이 있을까 하는 기대는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흩어져 있는 구술과 기억을 찾아내 주섬주섬 엮어본다고 했지만 훼손되어 복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드러난 결과를 손에 들고 과정을 돌아보아야 하는 부분에 와서는 어쭙잖은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백낙규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백낙규를 이끌었던 영성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의도였지만 그래도 드러난 흠결(欠缺)이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돌려 백낙규가 활동했던 시공간을 조망하면서 조금이라도 그를 짐작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바람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지역을 오버랩시켜 지역 교회사에 드러난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동시대를 맞대고 고민했던 그들의 공통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을지를 추적하다 보면 지역교회 저변에 깔려있던 인식 가운데 행여 드러나지 않은 백낙규의 지향점과도 일치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몸부림치던 초기 지도자들의 삶과 신앙 속에서 백낙규와 일치를 찾아내는 퍼즐게임은 독자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고 싶다. 백낙규의 삶 속에서 그가 매달렸던 실존적 상황을 살피다 백낙규는 구한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사람으로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고 더구나 남아 있는 이야기들마저 흩어져 마모된 것뿐이기 때문에 둔탁해진 잔해(殘骸)만으로 그의 생애를 요연(瞭然)하게 살펴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아 전해지는 것들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그가 마주했던 시대적 상황을 탐색하고 활동했던 공간에 남겨진 흔적들만이라도 촘촘하게 거두어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반사적일 때가 많은 법. 비록 망각에 묻히고 남아 있는 자취가 희미해졌다 할지라도 남겨진 자국들을 조심스레 인출(印出)해낼 수만 있다면, 달을 그리지 않고도 구름을 그려 달을 드러내듯 그의 삶의 윤곽을 짐작해 볼 수가 있지 않을까? 홍운탁월(烘雲托月)! 구름을 그려 달을 그려내듯 요흔(凹痕)의 언저리에 드러난 백낙규의 삶 속에서 그가 매달렸던 실존적 상황을 살핌으로 그의 영성과 신앙도 함께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백낙규(1876-1943)가 살았던 시대는 어쩌면 조선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질곡의 시기였다. 부정부패와 외세의 침략으로 격동을 치던 구한말 시기에 몰락한 양반으로서 고향을 떠나 동학에 몸을 던져 농민항쟁의 중심에 섰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목숨을 걸고 역사의 가파른 협곡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벅찬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고 살았을지 헤아려봄 직하다. 그는 이 땅에 살면서 개혁의 주체가 되어 보고자 몸부림을 쳤으나 패배와 좌절을 맛보았다. 밀려오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잃고 혼돈(混沌)의 세월을 살면서도 그는 거기서 끝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만난 복음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 하나님 나라에서 비전을 보았던 백낙규는 교회를 세우고 젊은이를 가르치려 학교를 세웠다. 끊임없이 치열함을 가지고 살았던 그였지만 목숨을 다할 때까지 어둠의 터널이 여전히 그를 가로막고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씨앗을 뿌렸으나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황국화 신민 정책으로 학교가 폐교되고 교회가 문을 닫는 아픔을 겪으며 코앞에 둔 해방을 보지 못하고 향년 67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포로로 끌려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을 소망하며 외치던 스가랴 선지자처럼 백낙규도 역시 가난한 이웃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들과 함께 해방을 꿈꾸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읊조리며 살았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스가랴는 이 땅에 살았던 백낙규의 표상(表象)이었다. “이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슥 9:16) 구한말 조선 땅에 태어나 외세의 지배 아래 굴레 씌워진 민중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기 삶에 주어진 역할과 사명을 올곧게 감당했다. 어두운 질곡의 삶을 살면서도 소망했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루려 바라고 믿었던 바를 실천에 옮기며 살았던 그의 역정(歷程)을 살피며, 주변에 남겨둔 흔적을 따라 이야기로 풀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