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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 4
들어가며 │ 7 나가며 │ 296 제1부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마 9:9) 제1장 하위렴의 고향 켄터키 서부로 가는 관문 22 남북전쟁과 켄터키 23 출생과 성장 26 모교회 레바논장로교회 29 제2장 선교사가 되기까지 의사가 되기로 마음 먹다 32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생자원운동(SVM) 33 의과대학을 자퇴하고 신학교로 34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35 개척선교사들의 내한 여정 37 조선 선교의 교두보 ‘딕시(Dixie)’ 40 제3장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으로(1896) 하위렴 선교사 조선에 오다 44 북장로교 선교부와 의료사역 협력 50 호남선교를 시작하다 51 선교지를 전남 지역까지 확대하다 52 제2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마 28:19) 제4장 풍남문(豊南門)의 성곽길을 따라(1896~1904) 농민항쟁에 스러진 함성을 껴안고 56 전주지부에 합류하다 60 데이비스와 결혼(1898) 62 1차 안식년(1899~1900) 69 데이비스와 함께 복음사역에 전념하다 70 신흥학교의 설립 74 스테이션 조성사역 80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82 제5장 탁류의 선창(船倉)에 복음의 닻을(1904~1908) 상처(喪妻)의 아픔을 딛고 군산으로 85 부임 당시 선교부의 상황 86 스테이션 조성공사를 마무리하다 90 팀 사역을 이끌다 91 구암(궁말)교회 당회장으로 94 순회전도 사역 95 개복교회/동련교회/고현교회/대붕암교회(제석교회)/ 웅포교회/선리교회/황산교회/만자산교회 사경회와 지도자 수련 107 영명학교 사역 116 제6장 에드먼즈와의 운명적인 만남 북감리교 내한선교사 에드먼즈 119 도티(Susan A. Doty) 양의 소개로 만난 에드먼즈 125 2차 안식년(1908~1909)과 에드먼즈와의 재혼 127 제3부 땅끝까지 이르러(행 1:8) 제7장 남도에서 부르는 전도자의 송가(頌歌)(1909~1912) 유진 벨과 목포 선교지부 132 유진 벨의 후임으로 목포에 오다 136 양동교회에서의 협력 목회 136 백만인 구령 운동의 열풍 속으로 137 양동교회 재건축과 리더십 이양 140 스테이션 조성공사 144 순회사역 145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 154 전라노회 창립에 참여하다(1911) 158 사경회 강사로 참여하다 160 순천 선교지부 개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 161 제8장 선택의 갈림길에 서서 출산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163 혼신을 다한 목포에서의 사역 165 아내의 신병 치료을 위해 귀국하다(1912) 173 몬트리트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다(1913/1914) 176 고비를 딛고 다시 한국으로(1915) 178 제4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 제9장 다시 금강을 따라 궁말 언덕에(1915~1918) 3차 안식년을 마치고 182 다시 군산으로(1915) 186 사역분담과 전문화 188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하다(1916) 197 전북노회 창립과 활약(1917. 10.) 201 전북지방 선교 25주년 기념행사(1917. 11.) 204 군산지역 선교 초기 역사를 갈무리하다 206 제10장 3·1 운동과 군산 선교지부(1919~1921) 군산 3·5 만세운동과 영명학교 223 영명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1919~1921) 224 일제의 간섭과 조선인 탄압에 대해 교단의 관심을 촉구하다 226 조선의 상황에 대한 교단의 반응 228 콜레라가 창궐하다 230 제5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요 4:36) 제11장 황토의 들녘에서 추수꾼으로 순회사역에 매진하다 234 동련교회/송산리교회/옥곡교회/제석교회 왕골교회(초왕리교회)/고현교회/함열교회/두동교회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를 추모하다(1920. 6.) 260 하위렴 선교사 내한 선교 25주년 기념행사(1921. 2. 18.) 263 교사 연수회 개최(1921. 3.) 266 제12장 만종(晩鐘)이 울리는 석양에 서서 세대교체가 일어나다 270 인돈 부부의 귀환 272 4차 안식년(1922. 7.~1924. 8.) 274 리더십의 이양을 촉구하다 275 해리 로디스의 군산 방문(1924) 277 안식년을 마치고(1924. 8.) 280 유진 벨의 사망 소식을 듣다(1925) 280 제6부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 4:7) 제13장 하위렴을 추모(追慕)하며 32년 조선 선교사역을 마치다 285 세계주일학교연맹에 김중수를 추천하다 287 소천(1928. 7. 3.) 288 제14장 자녀들의 이야기 딸, 셀리나 해리슨(Margaret S. Harrison) 292 아들, 찰스 해리슨(Charles W. Harrison) 293 부록 연보(年譜) 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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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안식년(1912~1915)을 마치고
1912년에 신병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던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이태를 훌쩍 보내고 1915년에 접어들고 나서야 조선으로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에드먼즈의 회복이 늦어진 데도 이유가 있었지만, 에드먼즈의 친정아버지 노아Noah가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그해 겨울을 캐나다에서 체류했던 원인도 있었다. 그는 78세의 나이로 1914년 성탄을 2주 앞둔 12월 11일 세상을 떴다. 그들이 캐나다에 머무는 수 주간동안 몰아친 한파와 눈 폭풍으로 에드먼즈의 친정이 있던 온타리오의 시골 마을은 수 피트나 쌓인 눈으로 통행이 어려웠다. 하위렴은 장인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도 한 동안을 캐나다에서 머무르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미국으로 내려와 내한 준비를 서둘렀다. 1915년 2월 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베로 향하는 우편 증기선 시베리아(Siberia)호에 몸을 실었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무는 동안 두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 벌써 셀리나가 6살, 찰스가 4살이 되고 있었다. 해외 선교부에서도 하위렴 선교사 내외가 건강을 회복해 조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내한 선교부에 단신으로 전하며 함께 축하해 주었다. 그 배에는 중국, 일본 그리고 조선으로 파송되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승선하고 있었는데 하위렴 선교사 내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해 처음으로 임지에 나가는 남장로교 초임선교사들로 하위렴 선교사의 어린 두 자녀를 포함해 일행은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2주간의 항해 끝에 태평양을 건너 고베에 당도했고, 다시 하위렴 선교사의 일가족이 제물포를 거쳐 군산에 도착한 날은 그해 2월 27일이었다. 이때 시베리아 호에 함께 승선했던 일행 가운데 토마스 윌슨(Thomas E.Wilson(1886~1917))이라는 선교사가 있었는데, 아칸사스주 컬럼버스(Columbus), AR가 고향인 그는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한 하위렴의 후배로 건장하고 열정이 남다른 젊은 목사였다. 그는 조선 선교상황을 보고하는 집회에 참여했다가 그곳에서 하위렴 선교사를 만나 조선 선교를 지원한 초임선교사였다. 미혼이었던 그는 파송이 되면서 곧바로 광주지부에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보다 먼저 내한한 여선교사 조지아(Georgia C. Willson) 양을 만났다. 2년여 교제 끝에 동료선교사들의 축복을 받으며 1917년 5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곧바로 광주로 내려와 선교사 숙소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신혼의 단꿈도 채 가시지 않은 그해 가을, 윌슨(T. E. Wilson) 선교사는 아내의 태중에 유복자를 남긴 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광주지부는 물론 남장로교 동료선교사들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며 안타까워했다. 그해 아내 조지아는 만삭의 몸으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미국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하위렴은 자신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선교사를 자원했던 후배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되어 사역다운 사역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는 것에 더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조선에 파송되어 죽음을 맞았던 동료선교사와 그 가족들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몸을 떨었다. 전킨과 그 세 자녀의 죽음, 유진 벨의 두 아내의 죽음과 자신의 아내 데이비스의 죽음, 오웬 선교사의 죽음과 그리고 이번엔 후배의 죽음까지, 계속해 이어지는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조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깨달았다. 그리고 조선 선교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다시 한번 새롭게 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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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호남선교의 기틀을 다진 하위렴 선교사
맨 처음 하위렴의 행적을 마주한 것은 그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된 필자의 증조부이신 백낙규 장로(동학농민항쟁 당시 우금치전투에 참여했다가 패한 후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후에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향리 익산에 동련교회와 계동학교를 세워 복음 전파와 민족계몽에 앞장섰다.)의 개종의 과정을 좇으면서부터였다. 그와 관련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예기치 않았던 하위렴의 선교행적을 만나게 되면서 내친김에 책으로 엮게 된 것이다. ‘조선 선교사 하위렴의 선교행전’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이 책은 그의 연보(年譜)를 따라 전기형식을 취했으며 무엇보다 조선에서의 사역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에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지던 조선에 들어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는 동안, 호남선교의 기틀을 다져온 남장로교 선교사였다. 군산 선교의 기틀을 놓았던 전킨(William M. Junkin)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후,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뿐더러 그의 사역을 마무리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비록 그의 재임 기간 내내 부위렴(William F. Bull) 선교사를 비롯한 여러 선교사가 함께 사역했지만, 지부는 줄곧 그의 리더십 아래 있었다. 특히 군산 선교부를 이끌며 이 지역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선교사 가운데 전킨과 부위렴 그리고 하위렴 이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남부 출신이라는 공통점에, 유니온신학교 동창이라는 끈끈한 학연으로 맺어진 선후배 관계에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들 모두의 이름은 윌리엄이었다. 그 후에 하위렴 선교사가 선교부의 긴박한 사정으로 지부를 옮긴 적도 있고, 또 아내의 병고로 자리를 비우던 시기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여러 지부의 사역을 공시적(共時的)인 안목으로 파악하고 호남선교의 교두보를 구축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테이션의 효율적 운용의 주역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는 양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늘 무심함에 가려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선교역사가 절반을 점하고 있는 한국 교회사이기에 선교역사가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이제는 가려져 있던 선교사들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다행히도 하위렴 선교사의 행적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하위렴 선교사의 행전 발간을 계기로 묻혀 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과 활동을 새롭게 조감(鳥瞰)하고 초기선교 역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바라보게 하는 지남차(指南車)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저자의 바람이다. 덧붙여 이 책에 인용한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인쇄물에서 퍼온 것들이라 초점이 흐려 유감이지만, 글로만 전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모를 전달해 주리라 기대하며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위렴 선교사의 역할과 비중 이 책에서는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하위렴 선교사의 사역을 정리하면서, 그의 역할과 비중에 주목하고 그가 가시화했던 남장로교 선교전략이 이 지역 선교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의료, 교육, 복음 사역 등의 분야에서 전천후 사역을 할 만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선교사였으나 공교롭게도 그가 사역했던 3개 선교지부 어디서도 스테이션 조성이라는 마뜩잖은 일이 맡겨지고 있었다. 전문적 지식이나 안목이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사역이었으나 그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그의 역량을 발휘해 성공적으로 완수해 냈다. 병원과 학교건축 그리고 교회 설립 등을 포함한 유형의 선교기지 조성은 물론 나아가 공의회와 노회 설립에도 깊숙이 관여해 교회 조직과 제도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도 그의 수완(手腕)은 빛을 발했다. 이처럼 그가 구축한 유무형의 인프라를 통해 그 이후의 호남선교는 발길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남장로교의 선교 기반을 다듬어 낸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기치 않은 시련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7인의 개척선교사였던 아내 데이비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선교 초기부터 그의 사역에 위기를 맞아 군산지부의 전킨과 사역지를 교환하기도 하고, 얼마 후 에드먼즈와 재혼하면서 그의 선교 여정에 재시동을 걸었으나 무리한 사역은 그의 섬약한 체질을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부진했던 목포지부가 맡겨지고 있을 때도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교회, 학교, 병원 등 어느 것 하나도 빠짐이 없이 정상화시키는 동안 자신은 물론 아내 에드먼즈마저 다시 병고에 시달리면서 또 한차례 시련이 찾아왔다. 1912년 미국에 돌아가 3년 가까운 치료와 요양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건강이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이때가 선교사로서 그의 진퇴를 결정해야 할 만큼 그에게 닥친 최대의 위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선으로 복귀해 몇 해 만에 군산 선교를 정점에 올려놓으며 기염을 토했다.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은 성령의 능력 1922년 군산지부를 방문했던 해리 로디스Harry A. Rhodes 목사는 이때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지난 25년 동안 군산에서 거둔 놀라운 결실은 씨 뿌리고, 가꾸고, 돋우며 수고한 모든 사역자의 결과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관할 지역의 크기나 스테이션의 위치 등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75개의 교회에 5,000여 명의 교세를 일구고, 성인 세례교인만 1,500명에 이르는 부흥에 크게 놀라워하면서 손배돈과 동역하며 전국 남장로교 병원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최고의 전성기를 이뤄낸 야소병원에 와서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복음을 들고 외길을 줄달음쳐 사명을 완수한다고 하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사역은 바로 그분의 임재와 함께 부어지는 능력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위렴 선교사가 시련을 딛고 이 땅에서 이뤄낸 사역의 결과물들 역시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조선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 그 자체였다. 하위렴 선교사가 조선 땅에 쏟아부은 고귀한 헌신의 자취를 추적하며 이 책을 통해 그의 선교 여정을 드러내 보고자 한 것은, 전체적인 한국 선교(사宣敎史)를 바라보게 하는 귀중한 단서들을 놓치고 싶지 않은 저자의 욕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키워낸 맹아(萌芽)로부터 그렇게 풍성한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송구스러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