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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슬픈 온대 음영의 사랑 포 노 원(For No One) 2부 토성의 겨울 아무도 모르게 최초의 전거 김정훈의 죽음 * 진창에 처박히다 해설 |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쓴다는 것, 그리고 읽는다는 것 | 전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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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용의 첫 소설집 『토성의 겨울』은 ‘소설가’ 혹은 ‘소설 쓰기’에 대한 질문을 통해 진실의 존재 방식과 관련된 우리 시대의 증상을 탐사한다. 「최초의 전거」의 ‘나’는 도서관의 전거 사업을 담당하는 외주 업체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동료 작업자 중 한 명,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생이 ‘최초의 전거’를 찾아보자는 흥미로운 제안을 건넨다. ‘최초의 전거’를 가진 작가의 책은 수많은 장서들의 지식을 압축한 저술로, 그것만 찾아내면 문학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나’와 대학원생은 최초의 전거를 찾기 위해 미궁처럼 펼쳐진 도서관을 배회하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대학원생은 도리어 그간 작업해놓은 전거들을 모두 삭제해버리기까지 한다.
어떤 고정불변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맹신에는 종종 폭력이 수반된다. 말하자면 중심/보편/상식을 가정하고 그 외의 것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많은 문제가 비롯되곤 한다. 인종, 젠더, 환경 등의 문제도 중심과 주변을 구획하고 위계질서를 만들어 중심 밖에 놓인 존재를 간과함으로써 생겨났다. 문학에 국한해서도 이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문학에 무엇이 담겨야 한다, 문학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진리는 오히려 문학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령 소설은 어떻게 써야만 한다는 준거가 있고 그에 작가가 속박된다면 그의 소설은 오히려 소설의 본질과 멀어지는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학원생이 전거를 모두 삭제했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 행위는 문학에 관한 체계화된 지식이나 정의를 지워버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토성의 겨울」의 주인공인 B32는 꿈을 현실로 누벼내는, 즉 허구 안에서 살아가는 실험에 참여 중인 피험자다. 과거 B32는 현실에 심어진 꿈속에서 연갈색 단발머리의 끝자락만 푸른색으로 물들인, 파랑새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여성을 만났다. 다만 첫 실험의 꿈은 현실과 완벽하게 동화되지 못하고 어렴풋한 흔적만 남긴 채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실험이 거듭되었을 때 B32는 다시금 꿈속에서 같은 여성을 만난다. 그러나 실험은 완전하지 않았고, B32는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되어버린 틈바구니 어딘가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이야기에 실존하는 텍스트들이 오버랩되면서 B32의 사연은 소설 밖의 세계와 다시금 뒤섞인다. 토성에서 사명을 다한 무인 탐사선 카시니호(1997~2017), 다큐멘터리 영화 「코야니스카시」(1982), 영화 「라탈랑트」(1934)와 같이 우리의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이 작중에도 등장한다. 이렇듯 하나의 소설 텍스트를 여러 텍스트의 환기나 인용을 통해 기술하는 방식을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토성의 겨울』 속 소설들은 대체로 이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 「토성의 겨울」 외에 「최초의 전거」 케이스도 있었고, 「포 노 원」에는 비틀스의 다큐멘터리가 오버랩되었으며 「김정훈의 죽음」을 읽을 때도 오페라 「마술 피리」나 소설 『죽은 아버지』, 『모래시계 요양원』을 떠올리게 된다. 이로써 작중 인물의 삶과 우리의 삶 사이의 선이 점선도 되었다가 실선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슬픈 온대」는 학습지 물류센터에서 만난 ‘나’와 남자의 서사를 담고 있다. 이 ‘나’라는 일인칭 주어에는 “타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김정훈의 죽음」, 202쪽) 작가의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잘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인칭의 ‘너’의 이야기를 하는 ‘나’가 그려진 「포 노 원」을 보면 ‘너’가 아무리 ‘나’를 불러대고 ‘나’를 ‘너’에게 겹쳐놓으려고 해도 그것이 불가능하며 둘이 닿지 않는 사실만 부각되고 있다. 진리라 여겼던 모든 체계가 무너져버리는 느낌, 또는 스스로 무너뜨리는 경험. 그 끝에 남은 것은 ‘소설은 사람 그 자체’라는 믿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그런 소설은 어떤 것인가.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고 무엇도 내걸지 않”으며 “오직 한 사람만이 읽”히는,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이 되는 소설. 그러기 위해 “소설가는 완벽하게 지워”(「김정훈의 죽음」, 206쪽)지는 소설이 아니었을까. 여러 소설에서 활용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방식은 작가의 그림자를 최대한 지우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소설이 작가의 창작물이자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장치가 그것이다. 그런 소설에서 작가는 문화와 담론의 편집자일 뿐이니 대신 작중인물, 또 그와 소통하는 독자가 부각될 수 있겠다. 요컨대 이 소설집은 그 자체로,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 작가가 자신의 문학론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부단히 지워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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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겨울』의 소설들에서는 유령 이미지가 아른거린다. 물론 유령의 존재는 흔히 삶을 기웃거리는 헛것들을 연상시키기보다 유령스럽다고 해야 할 형용사에 가깝다. 이곳과 저곳으로 나뉘는 이분법의 세계의 헛것들이 아니라 기억, 망상, 꿈, 거짓말, 나아가 서사물 따위의 왠지 더 생생한 비존재의 세계를 현실로 승인한 자리에서 재배열된 이미지들이다. 이 시뮬라시옹의 세계가 김갑용의 소설에서는 현실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들도 현실감각이라는 꼭지를 따내고 이 소설들을 펼칠 필요가 있다. 도대체 이야기가 가능한 세계인가, 그래서 소설은 쓰여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김갑용은 마치 레비-스트로스가 된 듯 원본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밝히려는 문학적 실험을 한다. 그의 인류는 토대가 불안정하고 이 시대에 겨우 존재하는 젊은이들이다. 이 인류는 7년이나 지속되는 토성의 겨울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갑용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 시대, 이 사회에 대한 보고서를 몸소 쓰는 냉철한 리얼리스트이고, 그의 리얼리즘은 소설의 새로운 능선 하나를 발견해낸다. - 전성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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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겨울』에 수록된 많은 이야기가 소설에 대한 소설, 또는 소설가 소설이지요. 소설(글)을 쓰려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 (불)가능성이 타진되는 소설이 많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아니 일단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매시간 변화하고 늙고 성장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존재가 아니던가요. 그러니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모른다’일 것입니다. 기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사람처럼 불확정적인 존재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로 정형화될 수 없으며 질서 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바로 그런 ‘사람’, 또 ‘사람의 삶’을 가급적 그 자체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전소영 (문학평론가 ·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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