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이 책에 쏟아진 찬사
지금 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인가 _박기영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1. 18년 논쟁의 시작 어느 부동산 재벌의 유산 | 《뉴스위크》의 변신 | 거부할 수 없는 제안 | 아내의 말을 들어라 | 세기의 대결 2막 2. 다시 태어난 새뮤얼슨 경제학자의 탄생 | 굿바이 시카고 | 공과 대학의 경제학과 | 의심받는 베스트셀러 작가 | 신고전파 종합 이론 | 케네디의 제안을 거절하다 3. 프리드먼의 고군분투 평생의 인연을 만나다 | 뉴딜 정책의 수혜자 | 한때의 케인스주의자 | 다시 만날 뻔한 두 사람 | 몽펠르렝 총회에서 만난 사람들 | 케임브리지 서커스와 맞서다 4. 케인스에게 맞서다 『자본주의와 자유』 | 배리 골드워터와의 만남 5. 칼럼 경쟁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 | 케인스 vs 하이에크 | 『노예의 길』 | 무시할 수 없는 도전자 6. 개입과 비개입 케인스학파의 전성기 | 물밑에서의 변화가 시작되다 | 자유 시장을 둘러싼 논쟁 | 새뮤얼슨의 공격 | 팽팽한 대립 | 정부는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 좁혀지지 않는 차이 7. 승승장구하는 통화주의자 케인스와 프리드먼의 접점 | 화폐가 중요하다 | 『미국 화폐사』 | 전미경제학회 강연 | 통화 정책을 펴는 방법 8.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현실이 된 불길한 경고 | 인플레이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행동에 나선 새뮤얼슨 | 새뮤얼슨이 프리드먼을 공격하는 방법 9. 교활한 대통령 닉슨의 비공식 경제 자문 | 소외된 프리드먼 | 청문회에서 맞붙다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10. 시카고 보이즈 197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 논란의 중심에 서다 | 비주류가 남긴 뚜렷한 족적 11. 연준의 통화주의 실험 새로운 연준 의장에 대한 프리드먼의 기대 | 불필요한 가짜 논쟁이 벌어지다 | 통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 | 인플레이션 파이터, 폴 볼커 | 연준의 정치적 방패막이 | 프리드먼, 대중을 사로잡다 12. 죽은 이론이 된 통화주의 프리드먼 없는 통화주의 | 레이건 행정부에 부는 공급주의 경제학 바람 | 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다 | 엇나간 프리드먼의 예측 | 미국 밖에서는 다르다 13. 여정의 끝에 다다르다 공산주의 경제에 대한 시각 | 편집진과의 충돌 | 《뉴스위크》 칼럼 연재가 종료되다 14. 영국에서 다시 찾은 기회 영국의 공식 경제 정책 | 잡화점 집 딸이 내민 손 | 통화주의를 실현할 두 번째 기회 | 실패로 막을 내린 영국 통화주의 15. 다시 오지 않을 기회 클린턴과 프리드먼 | 62년 혹은 63년 | 9/11이 만든 변화 | 그린스펀에 대한 상반된 평가 16. 진정한 프리드먼 추종자 자유 지상주의자의 죽음 |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논쟁 17. 흔들리는 자본주의 듀크대학교 아카이브 | 위대한 경제학자의 마지막 |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증명한 것 | 두 천재 경제학자의 유산 | 그토록 닮은 듯 다른 두 사람 감사의 글 | 주 | 참고 문헌 | 찾아보기 | 사진 출처 |
Nicholas Wapshott
이가영의 다른 상품
오랫동안 연재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칼럼은 모아 놓으면 경제 현황과 미래 전망에 대한 하나의 긴 논쟁이 된다. 이들의 칼럼은 대중이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서로에게 너그럽고 예의 바르지 않았다면 논쟁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사상적으로는 적이었지만, 사적으로는 친구였다. 다만 사상의 차이를 반영하듯 사고방식이나 글 쓰는 스타일은 완전히 달랐다. 새뮤얼슨의 글은 그의 평소 성격과는 차이가 있었다. 글에서 그는 이미 명망이 높고 성공한 학자답게 때로는 상대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여유 있게 도전을 받아넘겼다. 반대로 프리드먼은 끄떡없는 상대방에 맞서 점수를 내기 위해 길거리 싸움꾼처럼 주먹을 날려댔다. 또, 프리드먼은 옹호나 비평을 통해 당대에 벌어진 사건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정치적 글을 쓴 반면, 새뮤얼슨은 한때의 논쟁에 일일이 개입하기보다는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글을 썼다. 프리드먼은 《뉴스위크》 칼럼이 성공한 원인으로 두 사람 사이의 애정과 존경심을 꼽았다. “정책에 대한 의견은 완전히 다를 때가 많지만, 폴과 나는 좋은 친구다. 우리는 서로의 능력과 경제학에 한 기여를 존경한다.”39 새뮤얼슨 또한 프리드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취지로 말했다. “우리가 의견이 갈리는 때가 많기는 하지만, 논리적·실증적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근본적인 지점에서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사람들이 알게 됐으면 좋겠어. 그동안 서로를 향한 애정과 우정, 존경심을 꽤 잘 감춰 왔다는 걸 말이야.” ---「1. 18년 논쟁의 시작」중에서 시카고학파 경제학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새뮤얼슨에게 시카고대학교를 떠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시카고대학교 교수들은 실업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던 1930년대 대공황 상황에서조차 정부가 사람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새뮤얼슨은 대공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고민거리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주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어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배가 고파요. 감자 하나만 주시겠어요?’라고 묻는 어린아이와 어른을 시카고의 중산층 거주 지역에서 매일 볼 수 있었습니다. 가슴 아픈 기억이지요.” 그는 자신이 배운 이론으로 주변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제가 교실에서 배운 지식으로는 북부 인디애나주와 일리노이주의 은행이 거의 다 파산하고 형이 대학에 가려고 모은 돈이 사라져 버린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제 가족은 윤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을 했다면 집에 돈을 더 벌어다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일자리를 찾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습니다.” 새뮤얼슨은 1919~1921년 불경기에 노동자가 파업하자 고용주들이 멕시코 노동자를 들여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에 케인스가 그랬듯 새뮤얼슨도 눈앞에서 벌어진 대량 실업 상황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시카고학파는 그가 보기에 악어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2. 다시 태어난 새뮤얼슨」중에서 비슷한 시기 프리드먼은 중요한 인물을 또 한 명 만났다. 1932년 가을, 막 완성된 시카고대학교의 사회 과학 연구소 건물에서 자신보다 세 살 어리지만 조숙한 학부 2학년생 폴 새뮤얼슨을 만난 것이다. 새뮤얼슨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이미 디렉터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그였다. 둘은 처음부터 강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고, 이는 지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로즈 프리드먼은 새뮤얼슨이 프리드먼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렸다며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심지어 아흔이 넘어서까지 새뮤얼슨이 누린 ‘특권’에 대해 투덜거렸을 정도였다. 새뮤얼슨이 전액 장학생으로 시카고대학교를 다닐 때, 프리드먼은 조교 일을 해서 겨우 학비를 마련했고 누나로부터 300달러를 빌려 집세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할 필요가 없었던 새뮤얼슨이 미시건호의 모래사장에서 매년 여름을 즐기는 동안, 프리드먼은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뛰었다. 그는 학교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웨이터로 일했고 토요일에는 온종일 신발 가게에서 일했다. 프리드먼의 불평에 발끈한 새뮤얼슨은 자신도 일하고 싶었지만, 장학금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는데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는 것이 옳지 않게 느껴졌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나중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저도 여름에 일해서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맥이 없으면 이력서를 800장 돌려 봤자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안 오는 시절이었어요.” ---「3. 프리드먼의 고군분투」중에서 이렇게 프리드먼이 링에 오르면서 1931년 영국에서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시작한 지적 다툼은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은 겨우 넉 달 만에 막을 내렸지만, 1965년 《뉴스위크》 지면에서 시작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싸움은 거의 50년이나 계속되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대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싸움에서도 결정적 한 방은 나오지 않았으며, 아무도 링 위에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의 논쟁에서처럼 이번에도 논쟁의 강도와 열정은 치열했다. 향후 50년 동안 경제 이론이 나아갈 방향과 미국 경제의 관리자로서 연방 정부의 역할이 이들의 싸움에 걸려 있었다. ---「4. 케인스에게 맞서다」중에서 주제가 무엇이든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의 의견 차이가 비롯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30년 전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를 가르고 있던 분열을 만나게 된다. 당시 두 사람, 그리고 경제적 좌파와 우파를 가르던 의견 차이의 핵심에는 다음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정부 개입은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 ---「5. 칼럼 경쟁」중에서 시장의 능력에 대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시각 차이는 근본적인 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무리 오래 논쟁해도 이 차이를 좁히기는 힘들었다. 60년대 말,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세계를 잠식하기 시작하면서 둘의 차이는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서구 세계의 물가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물가 상승률이 치솟으면서 미국은 하이퍼인플레이션에 빠졌다. 하이에크로 하여금 케인스주의가 위험하다고 생각하게 했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었다.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정치인들은 경제학자들에게 인플레이션을 멈출 방안을 묻기 시작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칼럼을 통해 제시하는 해법은 서로 정반대일 수밖에 없었다.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논쟁은 경제 사상을 둘러싼 이들의 기나긴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6. 개입과 비개입」중에서 이제 통화주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프리드먼이 해야 할 일은 정부(미국 정부가 목표였지만, 사실 어떤 정부든 상관없었다)를 설득해 케인스주의를 버리고 통화주의를 채택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다. 그에게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고 자신의 사상을 그 자리에 앉히겠다는 혁명적 야심이 있었다. 전미경제학회 연설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지만, 프리드먼은 아직 사상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통화주의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실험에 시민을 동참시키려 하는 정치 지도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사상을 검증할 기회를 얻어 워싱턴 D.C.에 입성하게 되었다. ---「7. 승승장구하는 통화주의자」중에서 새뮤얼슨은 통화량 변화율이 물가 상승률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인이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에 맞지 않는 사례에 초점을 맞췄다. 첫째, 사람들의 저축 또는 소비 성향이 변하면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량이 변하고 그에 따라 물가가 변한다. 마찬가지로 케인스가 ‘야성적 충동’이라고 부른 기업가 정신이 커지거나 새로운 투자 기회가 급격히 증가하는 경우에도 국민 총생산이 달라지면서 물가가 변할 것이다. 또, 공공 지출이 늘거나 세금이 줄면 생산량에 영향을 미쳐 물가가 달라질 것이고 심지어는 세금을 늘리고 그만큼 공공 지출을 늘리더라도 생산량이 변하면서 물가가 움직일 것이었다. 프리드먼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통화량을 늘리면 시차를 두고 물가가 오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이 1958년 논문에서 말한 것과 달리, 통화량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점이 경기가 하락하는 시점보다 빠르지 않고 오히려 느리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이터에 따르면 통화량 변화가 경기 침체의 시작을 알리는 지표가 된 것은 최근 몇 년의 일이라면서, 이는 “연준이 통화주의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극심한 침체가 닥치기 전에 미래 경기를 예상해 미리 손을 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중에서 청문회 막바지에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은 거의 일대일로 말을 주고받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프리드먼이 민간 기업에 세금을 얼마나 부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와중에 새뮤얼슨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화를 낸 것이다. 새뮤얼슨은 이윤은 노동조합이 임금을 낮추는 데 합의해서 기업이 얻은 몫이므로 “그 합의의 대가로서” 법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법으로 이윤을 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므로 대신 법인세를 대폭 인상해서 이윤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먼은 이 생각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저는 현재 법인세율이 너무 높다고 생각합니다. 법인세율을 내려야 합니다. 아무튼 제가 보기에 법인세율은…….” 프리드먼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새뮤얼슨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노동조합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저소득층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9. 교활한 대통령」중에서 새뮤얼슨은 프리드먼을 외톨이 비주류 경제학자로 그리고 싶어 했지만, 프리드먼의 주장이 경제학을 바꾸고 정부가 침체기에 경기 부양을 위해 지출을 늘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새뮤얼슨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밀턴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고 있지만(나는 그들의 위치를 지도 위에 점으로 표시할 수도 있다), 어느 시점이 되면 누군가는 밀턴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영향력이라고 부른다.” 새뮤얼슨의 말대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현실에서 실패했지만, 프리드먼의 반정부적 주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힘을 얻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공공 프로그램에 돈을 지출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감세가 정부 지출의 정치적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10. 시카고 보이즈」중에서 프리드먼은 볼커의 술책에 너무 짜증이 난 나머지 공개적으로 연준의 정책을 비판하기로 결심했다. 1980년 6월, 프리드먼은 볼커와 함께 미국은행협회 주재로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통화주의자 학회에 연설자로 초빙되었다. 연단에 오른 프리드먼은 기다란 몸을 의자에 구겨 넣은 채 객석에 앉아 있는 볼커 앞에서 그와 연준을 향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연준의 통화 목표는 “전형적으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례”에 해당한다. 볼커가 통화량 증가율을 일정하게 통제하겠다고 “립 서비스”를 하는 가운데, 연준 이사들은 진정한 통화주의 이론에 전혀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이자율을 조작”했다. 연준은 지나치게 긴축적인 통화 정책으로 대공황을 악화시켰던 1931년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1979년에 프리드먼은 통화 공급을 늘려 경제가 회복할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볼커가 이끄는 연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축적인” 통화 정책으로 경제가 돈에 굶주리게 만들어 불황을 심화시켰다. ---「11. 연준의 통화주의 실험」중에서 1982년이 되자 미국에서 통화주의는 죽은 이론이 되었고, 경제 사조의 역사적 흐름에서 벗어난 곁다리로 분류된 채 몇몇 추종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머리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대서양 너머 영국에서는 보수당 대표 마거릿 대처가 프리드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1975년부터 영국 보수당을 이끈 대처는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해 온 합의의 정치를 거부했다. 대처는 실업보다 인플레이션이 훨씬 시급한 문제라고 믿었고, 총리로서 영국 경제를 인플레이션에서 구해내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레이건과 달리 자신이 관장하는 모든 기관을 움직일 권한을 쥐고 있었던 대처는 재무장관과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국은행에 통화주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었다. 대처는 프리드먼과 친구가 되었고, 그에게 통화주의로 인플레이션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일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12. 죽은 이론이 된 통화주의」중에서 《뉴스위크》의 새 편집장 레스터 번스타인의 생각은 달랐다. “미처 알려드리지는 못했지만, 이번 주에 보내 주신 갤브레이스 회고록에 대한 선생님의 글은 싣지 않았음을 알려드립니다. 3주 전에 같은 책을 자세히 리뷰했기 때문입니다. …… 저로서는 다시 그 책을 다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새뮤얼슨은 격노했다. 그는 번스타인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제 이름으로 나가는 칼럼은 제 소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뉴스위크》와의 인연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군요.” 새뮤얼슨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1984년 초, 새뮤얼슨의 자리를 이어받은 레스터 서로가 MIT 슬론경영대학원 학과장으로 임명되면서, 《뉴스위크》 편집장 리처드 M. 스미스는 프리드먼과 서로의 칼럼을 연재 종료하기로 했다. 프리드먼은 이 결정이 “좋으면서도 싫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스미스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칼럼을 끝내게 되어 아쉽습니다.” 보수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과 루퍼트 머독 소유의 영미 보수 언론이 바로 칼럼 연재를 제안해 왔지만, 프리드먼은 마감이 정해진 글은 당분간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프리드먼은 새뮤얼슨과 마찬가지로 원할 때 칼럼을 썼다. ---「13. 여정의 끝에 다다르다」중에서 워싱턴 D.C.에서 밀려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이제 런던에서도 막을 내렸다. 영국에서의 실패는 프리드먼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미국과 영국이라는 경제 강국을 통화주의로 전환시킬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통화량을 안정적으로 늘리는 방식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해 세상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길 기회는 이제 사라졌다. 이번에는 추진력 부족이나 사람 탓을 하기도 어려웠다. 영국 총리인 대처는 미국 대통령과 달리 통화 정책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대처는 장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통화주의 학자 앨런 월터스와 브라이언 그리피스를 개인 고문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대처는 통화주의가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실패한 뒤에 애도 기간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프리드먼을 버리고 제 갈 길을 갔다. ---「14. 영국에서 다시 찾은 기회」중에서 조지 W. 부시 정권을 끝으로 프리드먼이 미국의 통화 공급 방식을 영구적으로 바꿔 놓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에 지친 미국인들은 다음 대통령으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를 선출했다. 변호사였던 오바마는 경제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많지 않았다. 새로 임명된 연준 의장은 조용한 프리드먼 지지자였지만,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가 당선된 이후 미국 경제는 연방 정부 개입이 늘어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프리드먼의 사상은 프리드먼 자신처럼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세계 경제가 신용 경색에 빠지고 은행이 부도 위기에 내몰렸을 때, 연방 정부가 조언을 구한 쪽은 새뮤얼슨을 비롯한 케인스학파 경제학자들이었다. ---「15. 다시 오지 않을 기회」중에서 프리드먼은 2006년 11월 16일 샌프란시스코 자택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9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대체로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 1972년 메이오클리닉에서 협심증 수술(관상동맥우회술)을 받고, 1984년에는 뉴올리언스에서 심장 마비를 일으켜 스탠퍼드 병원에서 두 번째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으나, 이 두 번의 수술을 제외하면 매주 테니스를 치고 매년 스키를 즐겼다. 생의 마지막 5년 동안, 프리드먼은 두뇌 회전이 느려져 예전처럼 혁신적·공격적·반직관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어했다. 2001년, 막 출간한 연구 논문을 보내 온 새뮤얼슨에게 프리드먼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논문을 보면서 즐거웠다네. 하지만 더하거나 뺄 점은 찾지 못했어. 여전히 이런 연구를 할 수 있다니 자네에게는 정력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않은 듯해.” ---「16. 진정한 프리드먼 추종자」중에서 폴 새뮤얼슨은 2009년 12월 13일 매사추세츠주 벨몬트의 자택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새뮤얼슨은 오랫동안 고혈압을 앓았고 혈압약과 콜레스테롤 저하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그는 28년을 함께한 부인 리샤 에카우스와 네 명의 아들, 두 명의 딸, 한 명의 의붓딸, 열다섯 명의 손주를 남겼다.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추도식이 열렸다. 가족들은 추도식에 조화를 보내는 대신 환경 보호 단체인 매사추세츠오듀본소사이어티에 돈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다. ---「17. 흔들리는 자본주의」중에서 |
경제학계 두 거장의 닮은 듯 다른 이야기
폴 새뮤얼슨과 밀턴 프리드먼은 20세기 후반 주류 경제학을 대표하는 두 거장이다. 각각 ‘신고전파 종합’과 ‘통화주의’의 대표 주자로서 경제학을 양분한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좌우 각각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사람은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 같은 현안은 물론, ‘정부는 시장에 얼마나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경제학적 쟁점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은 닮은 점도 많았다. 유대인으로서 유럽 출신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대공황을 경험했으며, 뛰어난 수학 실력을 자랑했고, 시카고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각각 대학에서 만난 같은 전공의 여학생과 결혼했고,(41~46쪽) 새뮤얼슨은 1970년에(265쪽) 프리드먼은 1976년에(270쪽)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새뮤얼슨은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통해,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을 통해 각자의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자타 공인 케인스주의자였던 새뮤얼슨은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자’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시카고학파의 대표 학자였던 프리드먼은 케인스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정부의 실패 가능성에 주목하며 보수 경제학 최고의 이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3년 터울로 태어난 두 사람은 각각 2006년과 2009년에 3년의 시간차를 두고 94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도 분명했다. 새뮤얼슨이 시카고대학교를 전액 장학생으로 다니는 동안, 프리드먼은 조교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생활비를 벌 필요가 없었던 새뮤얼슨이 미시간호의 모래사장에서 매년 여름을 즐길 때, 프리드먼은 학교 식당과 신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누나로부터 돈을 빌려 집세와 생활비를 충당했다.(66쪽) 케네디의 청을 거절하고 3박 이상 워싱턴에 머무른 적 없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여겼던 새뮤얼슨과는 달리,(57쪽) 프리드먼은 닉슨,(229쪽) 피노체트,(259쪽) 대처(361쪽)에 이르기까지 항상 정치인을 가까이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은 무엇보다 대공황이라는 공통된 일생일대의 사건을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이때의 경험은 둘의 성향을 완전히 갈라놓았다. 새뮤얼슨이 오랫동안 경제학계의 중심에 있으며 쉽게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었던 반면, 프리드먼은 항상 주류에 도전하고 저항하고 의심하는 역할을 맡았다.(464~465쪽)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100년 논쟁을 잇는 세기의 대결 20대 초반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새뮤얼슨과 프리드먼 사이의 본격적인 대결은 1966년 두 사람이 주간지 《뉴스위크》에 번갈아 가며 칼럼을 기고하면서 시작되었다.(34쪽) 당시 《뉴스위크》 편집장이었던 오즈번 엘리엇은 양극단의 성향을 가진 경제학자들로 칼럼진을 꾸린 다음 독자들의 이목을 끌어 보수지 《타임》에 맞서는 혁신적인 진보 언론사로 거듭나고자 했다.(28쪽) 기획은 성공적이었다.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이 칼럼을 통해 대결을 펼친다는 소식은 타 언론사인 《뉴욕타임스》에 기사가 날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34쪽) 이로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판하는 논문을 학술지에 실으며 시작된 1931년의 논쟁 이래 주류 경제학 사상 가장 끈질기고 치열한 대결이 될 설전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이 겨우 넉 달 만에 막을 내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싸움은 지면을 통해서만 1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34쪽)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상대와 논쟁하는 것은 새뮤얼슨과 프리드먼 둘 다에게 즐거운 경험이었고 좋은 자극이 되었다. 두 사람은 독자의 관심과 인정을 얻기 위해 경쟁하며 좋은 글을 써 냈다.(109~110쪽) 두 사람의 칼럼은 전국적인 정치 대결로 발전했고 지지자들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기존의 정설을 지지하는 쪽과 그에 도전하는 쪽의 두 집단으로 뚜렷이 나뉘었다. 둘은 매주 칼럼을 연재할 때마다 언론의 관심을 받는 연방 정부의 경제 정책 현안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칼럼이 쌓일수록 두 사람의 글에서는 경제에 대한 관점 차이를 넘어선 세계관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111~112쪽) 핵심 쟁점은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논쟁은 경제 사상을 둘러싼 이들의 기나긴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60년대 말, 서구 세계의 물가가 빠르게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이 가진 사상의 차이는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미국의 물가 상승률이 치솟기 시작했다.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정치인들은 경제학자들에게 인플레이션을 멈출 방안을 묻기 시작했다.(162쪽) 케인스주의자들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원인을 경제가 성장하면서 수요가 증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기 침체 현상도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케인스주의자였던 새뮤얼슨은 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203쪽) 더욱이 1960년대 말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1970년 4%대의 물가 상승률이 10년이 지난 후에는 12%대까지 오르는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212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이론과 실제를 지배해 온 케인스주의가 처음으로 약점을 드러낸 순간이었다.(204쪽) 새뮤얼슨은 인플레이션을 해결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없다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세율을 올리거나, 정부 지출 비율을 줄이는”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세 번째로 제시한 방책이 통화 정책이었다. 연준이 이자율을 높이면 경제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물가 상승률과 고용률이 모두 높은 상태에서 높은 이자율은 기업 활동을 늦추는 역할을 했다.(208쪽) 통화 정책은 재정 정책을 중요시하는 케인스주의에 반대했던 프리드먼이 주장해 왔던 방법이었다. 반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다”라는 신념을 고수해 왔다.(196쪽, 278쪽, 315쪽) 즉, 통화와 인플레이션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으며, 통화량을 경제의 성장 속도보다 빠르게 증가시키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215쪽) 1970년대 들어 미국뿐 아니라 선진국의 물가 상승률이 크게 높아지면서 정치권이 인플레이션 억제에 초점을 맞추자, 상황은 프리드먼에게 유리해졌다. 중앙은행이 화폐 공급량을 통해 경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통화주의 이론 자체가 물가가 왜 급격히 오르는지 설명하고 물가의 지나친 상승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론이었기 때문이다.(139쪽)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해법으로 연준 이사들의 재량권을 없애고 미리 정한 준칙에 따라 통화 정책을 펼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물가가 조금씩 안정적으로 상승해 기업 환경의 확실성이 높아진다고 믿었다. “통화량이 안정적으로 증가하면 신용 환경이 좋아져 독창성, 창의성, 근면, 절약 등 기저에서 기업 활동을 촉진하는 힘들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지금의 지식 수준으로는 이것이 통화 정책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효과입니다.”(193쪽) 정부와 시장 사이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 주제가 무엇이든 프리드먼과 새뮤얼슨의 의견 차이가 비롯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30년 전 케인스와 하이에크 사이의 분열을 만나게 된다. 당시 두 사람, 그리고 경제적 좌파와 우파를 가르던 의견 차이의 핵심에는 다음 질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하는가? 정부 개입은 의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119쪽)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던 이유는 논쟁의 근저에 경기가 안 좋을 때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지, 또는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36쪽) 1951년 새뮤얼슨은 자신의 ‘신고전파 종합’ 이론을 처음 선보인 논문 「현대 재정 정책의 원칙과 규칙: 신고전파 종합」에서 자연적 경기 변동에 제대로 대응해 실업률을 최소화하려면 공공 지출 정책과 조세 정책을 적절히 조합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새뮤얼슨은 화폐의 역할이나 중앙은행의 통화량 조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정부 주도의 재정 정책에서만 경기 변동에 대한 해답을 찾고 통화 이론을 배재한 결정은 그가 통화주의자 프리드먼과 근본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었다.(53쪽) 새뮤얼슨은 정부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고, 시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재정 정책을 쓰는 것에 전혀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137쪽) 예컨대, 새뮤얼슨은 정부가 임금과 상품의 가격을 법으로 정해서라도 인플레이션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연준이 이자율을 올려 성장 속도를 늦추는 것보다는 정부가 세금을 늘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방식이 더 낫다고 보았다.(209쪽) 만약 의회에서 감세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사회 보장 프로그램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는 편이 낫다고 볼 정도였다.(211쪽) 반면 프리드먼은 자유 시장의 힘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144쪽) 그의 사상은 권력자 앞에서도 결코 힘을 잃지 않을 정도로 확고했다. 프리드먼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 경제학자와 정치인의 바이블인 저서 『자본주의와 자유』를 통해 당시 미국 진보주의의 총아인 신임 대통령 케네디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케네디가 취임식에서 한 “나라가 내게 무엇을 해 줄지 묻지 말고 내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라”라는 말이 “정부는 보호자, 시민은 피보호자”라는 세계관을 대변한다고 말하며 이는 “자유로운 인간이 가진 자기 운명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믿음”에 반한다고 주장했다.(94~95쪽) 자유 시장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다고 믿었던 자유 지상주의자로서 프리드먼에게 사회주의는 혐오스러운 개념이었다.(349쪽) 그는 국가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모든 일은 의도가 좋더라도 사회주의적 행동이자 자유 시장을 방해해 경제 성장을 저해하는 행동으로 여겼다. 또한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든 시민의 권리이며, 자유 시장의 힘이 정부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44~145쪽)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케인스의 경제 처방을 받아들여 정부 부문을 키우면서부터 미국 경제가 망가졌다고 주장했다.(349쪽) 자본주의와 주류 경제학의 미래를 가늠해 볼 기회 이 책은 폴 새뮤얼슨과 밀턴 프리드먼 사이에서 벌어진 세기의 대결을 흥미로운 일화와 풍부한 레퍼런스를 통해 보여 준다. 주간지 편집장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의 칼럼 대결은 이후 18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그 자체로서 경제의 현황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자 대중이 경제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20세기 후반의 굵직한 경제적 이슈와 정치적 사건을 바라보는 데도 도움이 되는 입체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새뮤얼슨과 프리드먼 사이의 뿌리 깊은 논쟁은 다시 시험대 위에 올랐다.(434쪽) 2020년 코로나19로 다시 한번 전 세계가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도 이 논쟁은 여지없이 계속되었다.(455쪽) 정부가 시장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선은 어디까지인가?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는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가? 물가와 실업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위기에 처한 금융 기관이나 사적 기업을 정부는 구제해야 하는가, 내버려 둬야 하는가? 이 책 『새뮤얼슨 vs 프리드먼』은 두 천재 경제학자가 남긴 유산을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현대 경제학이 해결해야 할 수많은 질문에 완벽한 답을 제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