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프롤로그: 우리가 하는 무서운 일들
1 왼손의 투쟁: ‘좋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2 업보 경찰 행정관 나사루의 비망록: 김춘수 가상 인터뷰∥사랑의 궁리∥도예인의 거듭되는 악몽과 실종에 대한 가설 심의 결과∥부엌엔 팥죽이 끓고∥누구의 방법인가 3 모순에 대한 중단 없는 사랑을 위하여 |
정한아의 다른 상품
|
어쨌거나, 앞으로 올 ‘좋은 시’에 관해서 나는 이야기 할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미래의 소관이며, 시는 언제나 하나의 돌출적인 사건이고, 따라서 시의 효과, 그러니까 여하한 방식으로 시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좋은 시’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월권이기 때문이다.
--- p.18 나는 ‘본질’이나 ‘선험’, ‘고정 불변하는 자아’, ‘실체’ 같은 단어들을 조심스럽게 회의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잠정적’이라든가 ‘당분간’ 같은 어휘를 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개량주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 p.19 그러니까, 무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유한자로서의 현실을 등한시하거나 일시적인 쾌락에 사로잡혀 영원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변화에 열려 있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에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는 일이란 이제까지 사회가 나에게 가르쳐준 언어가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일이라는 것, 내가 상상도 못 했던 어떤 일이 이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며 그것이 나의 눈앞에 닥칠 사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상상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나의 오른손과 왼손의 화해와 투쟁을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 p.24 그는 별로 비상한 인간이 아니라서/ 조만간 더 많은 밀린 일을/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치우게 될 것이다/ 하고 싶은 일들이 없어졌어 할 수 있는 일들이 없어졌어/ 해야 하는 일만 남아서 어이,/ 이것이 삶이란 말인가 --- p.58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미학의 시작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미학과 윤리의 숙명적인 동반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더 멀리 갔어야 했다. --- p.141 미학적 분리주의는 자기모순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지만, 광범위한 자기분열을 방치함으로써 커다랗고 정교한 멍청이를 만들어낸다. 현대의 예술가는 점점 자기 지시적이고 비평적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낭만주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기술을 연마하고, 사라진 천재의 이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인이 되려 한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천재가 아닐 가능성에 사로잡혀 깊은 밤, 머리를 쥐어뜯는다. --- p.143~144 ‘나-독자’는 실망하고, ‘나-시인’은 눈을 가리고, ‘나-비평가’는 이 기획을 원망한다. 이건 협잡이야. 내 오른손으로 하여금 왼손을 쓰다듬도록 하는 협잡이다. 다만, ‘내 안의 그들-우리’ 모두는, 첼란이 고통 속에서 강물에 뛰어들 때조차, 거대하고 비겁한 멍청이를 포함한 이 세계, 자신에게 환호와 모욕과 위협을 가했던 이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 p.146~147 |
|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그린
시와 소설, 산문과 시론을 한 권에 모은 정한아의 ‘시 종합장’ 사랑한다는 것은,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은, 책이든 사람이든 무서운 일인가 보다. [……] 다 읽고 나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시를 쓰는 시간과 시를 논하는 시간 속에서 분열하는 모순된 자아를 견디며 시와 비평을 향한 양 끝 지점으로 치열하게 달려온 시인 정한아의 다양한 작업이 ‘시산문집’이라는 명명 아래 한 권의 책, 《왼손의 투쟁》(안온북스)으로 엮였다. 이 책은 ‘좋은 시’란 무엇인지 묻는 시의 취미기준론에 대한 시론(〈왼손의 투쟁〉)으로 시작해, 시와 산문으로 미학적 권리를 주장했지만 군부 독재 정권의 호명을 받아들인 김춘수의 이율배반을 사후세계 업보를 다루는 행정관과 나누는 대화 형식의 소설로(〈김춘수 가상 인터뷰〉), 시인과 연구자와 결혼 생활자의 삶을 장시로(〈사랑의 궁리〉), 기억과 무의식이 혼합된 시적 자아의 일대기를 미스터리 형태의 소설과 시로(〈도예인의 거듭되는 악몽과 실종에 대한 가설 심의 결과〉, 〈부엌엔 팥죽이 끓고〉, 〈누구의 방법인가〉) 그려내면서 낯설고도 다양한 독서 체험을 하게 하는 한편, 다 읽고 나면 이 모든 글은 ‘정한아의 시’로서 전달되는 하나의 시 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이 책은 이렇게 시에 대해 말하면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미학적 존재자의 존재 방식인 사랑에 대한 사유를 이어나간다. 자본주의 대중 독재 시대에 우리는 다수와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어떤 도덕을, 어떤 정의를, 그리하여 어떤 아름다움을 좇을 수 있을까. 옳으면서 좋고, 좋으면서 훌륭한 그 완벽한 정합을 이뤄낼 수 있을까. 우리가 지금 겪는 이 부정교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그 어려운 사고실험에서 꼭 필요한 질문이 여기 모두 모여 있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분열인지 융합인지 헷갈립니다만 나는 점점 응축되어 갑니다. 온갖 좋은 문장을 모아놓으면 ‘좋은 시’가 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가 좋은 시일까, 오래 기억되는 시가 좋은 시일까.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은 ‘위대한 인간’인가. 태초의 속엣말의 추동에서 시작해 오랜 습작 기간을 거쳐 제도적으로 시인이 되었고, 시에 대한 사랑으로 읽고 또 쓰는 시간을 지나 비평가가 되었지만 시인은, 비평가는 좌뇌와 우뇌가 벌여온 이 수없이 많은 전투에도 더 좋은 시, 절대적으로 좋은 시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좋음’이라는 절대적 이데아에 꼭 맞는 시는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서 다른 버전으로 수정 변환되어 여러 버전을 생산할 뿐 지금 결정되지 않는다. 다만 미결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알 수 없음’의 막다른 길에서도 나아갈 길을 찾는 정한아만의 한 가지 방식이 있다. “너무 멋지게 쓰려고 노력하지 말 것.” 자기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모독하는 온갖 ‘척’들을 배반하고 물리치는 것. 미래의 소관인 앞으로 올 ‘좋은 시’를 위해서는 오직 질문을 계속할 것. 이 책에서 시인 자신은 “윤리적으로도 선하고 인식론적으로도 올바르며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좋은 시’는커녕 좋아해온 시에 관해서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쓸 수가 없”다고 고백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이 고백에 다다른 사유의 여정이 모두 담긴 총체적 조합, ‘정한아라는 시 세계’를 오롯이 맛볼 수 있다. ‘시인/비평가/독자’는 어떻게 하나의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 ‘나-독자’는 실망하고, ‘나-시인’은 눈을 가리고, ‘나-비평가’는 이 기획을 원망한다. 이건 협잡이야. 아름다움에 사로잡히는 일, 그리하여 사랑에 빠지는 일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아름다움은 단 하나의 이유로 설명될 수 있을까. 시인은 매일 같이 왼손과 오른손의 협잡으로서만 가능한 이 무서운 일들을 거듭하면서도 《롤리타》와 《독일 이데올로기》, 메탈리카 4집 앨범과 예수라는 절대적 가치를 한 번에 설명해내는 일, 이 지나친 정합성에의 요구를 포기하는 과정을 이 책을 통해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는 모순과 분열로 일대기를 장식한 위대한 철학자와 시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시를 사랑하면서, 온갖 명명으로 세계를 새롭게 정초한, ‘시에 대한 견해의 대가(大家)’, 즉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론가이자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경우, 만일 그가 나치의 열광적인 지지자였고 인종주의자였다면 시와 인간에 대한 촘촘하고 거대한 그의 사유 뭉치를, 어휘 꾸러미를 우리는 손에서 내려놓아야만 하는 것일까? 김수영은, 김춘수는, 김지하는 위대한 시를 남기고도 왜 후세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을까.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개념을 앞세운 현대 예술가들은 오른손이 만들어낸 완벽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천재가 아닐 가능성에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 멋진 사유들을 펼쳐놓고도 시와 철학은 한 몸에 기거할 수 없는 것인가. 정한아는 시인으로, 비평가로, 독자로 살며 분열을 앓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미학과 윤리의 숙명적인 동반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고 더 멀리 나아가려 한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일’, ‘사회가 가르쳐준 언어들을 의심하는 일’, ‘눈앞에 닥칠 사태를 다양하게 상상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왼손과 오른손의 화해와 투쟁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