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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의 첫 관객에게
1장 서른의 아침이 말을 걸었다 86년생 배우 최희서입니다|우리의 처음|어느 새벽, 신촌에서|혼인이란 것은, 부부가 된다는 것은|봄비 2장 우아한 현장 우아한 현장|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감독 이준익|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까|생각과 마음|그녀의 독백|검은빛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 3장 기적일지도 몰라 입춘|수필의 정의|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이조부!”|기적일지도 몰라|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아주 오래된 관계 4장 여러해살이풀 오늘도 뛰고 있을 윤자영에게|NG여도 좋다|여러해살이풀|반디 이야기|부부의 봄|하우 이즈 유어 라이프?|질문이 시작된다 에필로그 연극을 보러 온 당신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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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있는 상상을 해본다. 그 누군가가 카페에 앉아, 혹은 이불 속에 엎드려, 내 부끄러운 페이지들을 버스럭거리며 읽고 있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온다. 그런데 이 아찔함은 무대에 오르기 전의 기분 좋은 긴장감과 닮아 있지 않는가. 마치 막이 오르기 전,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처음으로 관객을 만날 때의 긴장감과 설렘처럼. 그렇다. 내가 쓴 글들이 한 권의 책이 되어 독자를 만난다는 것은, 어느 극 중 인물도 아닌 사람 최희서가 관객과 마주하는 일일지 모르겠다. 내가 연기하는 인물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 p.5~6 그렇게 나는 2014년 4월, 지하철에서 연극 대사를 외우다가 신연식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해 겨울, 신연식 감독님이 제작하고 이준익 감독님이 연출하는 시인 윤동주의 영화, 〈동주〉에 캐스팅되었다. 그야말로, 영화와 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진 것이다. --- p.77 인간은 쓸쓸하고 고독한 존재다. 인간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다. 인간은 권력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쟁취하는 존재다. 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투쟁의 끝에서, 그녀가 미화되고 동정받고, 혹자에게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현재의 가네코 후미코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싶다. 어느 기구한 운명의 여인, 박열의 아내, 일본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어떤 사람의 찬란했던 투쟁의 기록으로. 그러나 그 과정을 그 무엇보다도 인간적이고 솔직하게 담아내고 싶다. --- p.111 처음으로 모른다고 해버렸다. 잘 모르겠고, 이 역할을 잘할 자신이 없다고 실토해버렸다. ‘어렵다.’ ‘잘 모 르겠다.’ ‘내 한계인 것 같다.’ ……그런 나약한 말은 내뱉는 순간 내 발목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모멸감이 밀려올 줄 알았는데, 웬걸, 이 상하게 기분이 좋다. 속 시원한 눈물이 터져 나온다. --- p.207 우리가 하는 많은 일이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매일 나 자신을 단련하고, 감당하는 일이겠지? 이겨내기와 진실 찾기에 몰두하던 서른한 살 윤자영, 서른두 살 최희서를 지나, 서른여섯 최희서가 묻는다. 나는 오늘 왜 달릴까./ 나는 지금 어디를 달리고 있을까./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나는 내 자신을 오늘도 단련하고 있는가. 그 단련의 끝이 비록 실패더라도, 그 보잘것없는 내 모습을, 그 진실된 내 모습을, 나는 감당하고 있는가. --- p.218~219 ‘예술가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의 가슴에 점을 찍어야 합니다. 미미하고 희미할 수 있으나 색깔 혹은 말, 소리 혹은 촉감으로라도 점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 무대에서도, 혹은 영화나 뮤지컬 같은 또 다른 형태의 예술로도, 관객의 마음에 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작게나마 점을 찍다 보면, 언젠가는 점들이 모여서 선이 되겠지요. 그리고 그 선들이 그린 지도가 언젠가는, 당신이 기억할 저의 얼굴이 되지 않을까요. 먼 훗날 완성될, 한 예술가의 초상이 되지 않을까요. --- p.284~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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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록
배우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출연 목록, 필모그래피를 소중하게 기록할 것이다. 2009년 영화 〈킹콩을 들다〉의 여순부터, 〈동주〉의 후카다 쿠미,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아워 바디〉의 자영,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한정원과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의 황치숙 역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우 최희서는 한 편, 한 편 그 제목과 함께 자신만의 대본 노트를 남겨놓았다. 살아내고 싶은 인물, 그 인물이 되고자 했던 기록이 세세하게 담겨 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 흔적과 치밀하게 분석한 깨알 같은 메모, 그리고 촬영을 마친 이후의 후기 등, 최희서는 연기하는 것만큼 기록하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입김이 어는 설산에서 우아하다는 말의 정의를 실현하는 현장의 사람들, 함께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극을 만들고 이끄는 감독과 스태프, 배우 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함께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 덕분에 첫 산문집 《기적일지도 몰라》에는 그동안 참여한 작품의 제작노트에서 볼 수 있는 캐릭터 분석과 현장 일지, 그리고 후일담들이 재밌게 펼쳐진다. 그녀의 작품을 사랑한 관객이라면 너무나 반가운 책이 될 것이다. 2021년에는 배우들의 단편 연출 프로젝트 ‘언프레임드’에 참여해 영화 〈반디〉의 시나리오를 쓰고 출연과 연출을 해내기도 한 최희서는 사람들에게 영화가 필요한 이유를 좋은 스토리, 좋은 시나리오라는 ‘이야기’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녀는 연기를 할 때 자신이 어떤 스토리의 일부로 쓰이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밥 먹고 잠드는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다른 인생을 살아보거나, 다녀보지 못한 세계에 다녀오는 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야기. 최희서는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찾아 또 다른 배역에 도전할 것이며 연기를 하든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을 하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는 스토리텔러가 되는 일, 자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일을 그렇게 찾아나설 것이다. 이 글을 읽은 유진목 시인은 “여행자처럼 현재형으로 걸어가는 문장들이 경쾌하기만 하다”고 “자신의 책을 덮고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발을 내디뎌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만 같다고 말한다. 매번 빛나진 못할지라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 왜 연기를 하는가, 왜 연극을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가 묻는 일.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점 하나만큼의 울림을 전달하기 위해 배우 최희서는 오늘도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기적은 매일 조금씩, 느리게 일어나고 있다 배우 최희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질문에 단연 연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무대 위나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면 행복해지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배우를 꿈꾸고 살아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오디션은 자주 떨어졌고, 동료들과 사비를 털어 만든 연극의 관객은 적었으며, 제작한 단편영화는 영화제에 입선하지 못했다. 사촌 동생의 과외를 하거나 번역 알바를 하면서, 대사 한두 마디가 전부인 단역을 위해 왕복 네 시간 거리를 오가며 일곱 시간씩 대기해야 했다. 20대 즈음의 젊은이라곤 뒤통수도 찾아볼 수 없는 뒷산을 오르내리기도 여러 차례. 하지만 스스로 제작하고 출연한 연극을 위해 지하철에서도 멈추지 않고 대사 연습을 하던 중 한 제작자의 눈에 띄어 프로필을 보낸 일이 캐스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시나리오 회의에 참관했다가 여주인공으로 발탁되기도 한다. 조선인을 학살하고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 내용을 담은 영화를 일본인의 관심과 의지로 일본에서 상영하게 되었고 객석뿐 아니라 입석까지 가득 채운 관객들의 환대를 받기도 한다. 스스로를 동네 유일한 백수라 칭하며 오르내리던 뒷산에서 여러 해 동안 계속될 삶의 순환, 사랑, 희망, 죽음 등을 생각하다 여러해살이풀들이 살아가는 뒷산을 배경으로 한 작은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며 쓰고 지우던 중 배우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단편영화 프로젝트를 제안받고 참여하게 된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 어느 시대에도, 작품이 없을 땐 백수여야 하는 불안한 직업이지만, 백수가 아닐 자신의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며 즐기는 일. 최희서는 어쩌면 기적은 비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매일 조금씩 느리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