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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목욕하는 남자 메트로, 불로, 도도 사막의 강 훤 태몽 디저트 상사화相思花 지중해 목욕하는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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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가련한 신세와 서러운 처지를 곱씹고 있는데 어두운 잿빛 하늘에 떠있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붉은 세 줄의 목욕탕 표지가 반짝이며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힘에 이끌리듯 그는 병원 대신 목욕탕으로 들어간 것이다. 옷을 벗고 탕에 앉아있다 보니 목욕탕에서는 잘나고 높은 놈이나 찌질한 놈이나 다 그저 그런 존재라는 생각이 진리처럼 스쳐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의 뜻이 이런 것이었나, 오히려 뱃살이 축 늘어진 상무보다는 아직은 탄력이 남아있는 자신이 더 쓸만하지 않을까, 괜한 자부심까지 스미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가지 않고도 아무런 후유증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낙후된 시설의 동네 목욕탕이 케케묵은 복덕방 영감 분위기라면, 모던 스타일의 커피 전문점에 흐르는 젊음의 활기 같은 것이 노쇠해가는 핏물을 미약하게나마 진동시키기는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젊음이 넘치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는 일로 기분전환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귓전을 흔드는 부산스런 음악 소리가 정신을 교란시키는 커피숍보다는 커피 한잔 값으로 아늑한 탕 안에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는 훨씬 더 편안하고 경제적으로 여겨졌다. ---「목욕하는 남자」 중에서 그의 나이가 오후를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메트로, 불로, 도도를 중얼거려 본다. 영원한 도도에 빠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을 메트로, 불로, 도도를 해야만 할까. 오후가 설핏 기운다. ---「메트로 도도 불로」 중에서 너 사막에도 강이 있다는 걸 아니? 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사막에도 몇 년 혹은 몇 십 년 만에 폭우가 쏟아지는 때가 있다는 구나. 그러면 그 물이 모래 틈으로 스밀 사이도 없이 골짜기로 모여 흘러서 강이 되어 흐른대. 그런 강을 와디라고 한다지, 그게 이해가 가니? 사막에서 강이 범람한다는 게? 내가 제일 괴로웠던 것은 다른 게 아니었어. 이 집안에 와서 내가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이었지. 나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 시집가서 집안을 일으킬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었어. 그런 걸 아예 꿈도 꾸지 않았지. 나는 평강공주가 될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니까. 남편이 빨리 학위를 마치고 대학에 자리 잡으면 나는 집 안에 들어앉아 교양 있게 소설책이나 읽다가 여성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집 안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고, 저녁 먹고 나면 남편과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와인이나 한 잔씩 나누는 그런 거, 그런 게 내 꿈이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이가 나타났어. 내가 사막처럼 버석버석 말라가고 있는데, 그이가 나타났단 말이야, 마치 오아시스처럼 ---「사막의 강」 중에서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밝고 훤하게 살라고 명, 훤이라고 이름 붙여준 딸들이 왜 당신이 생각했던 궤도에서 벗어나는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만하면 교육도 잘 시키고 반듯하게 길러서 자랑스러운 두 딸들이었다. 경제 교육을 잘못 시켰나, 너무 현실을 모르는 걸까, 약게 키우지 못한 것이 잘못이었나.---「훤」 중에서 해방 전의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나라 잃은 ‘유랑민’의 처지였으나 해방된 후의 생활은 ‘이방인’이었다고, 독립된 나라의 국민이 되고 보니 그처럼 불타던 민족적 감정이 한낱 노스탤지어로 바뀌고 말았다고 한탄하신 글을 찾아보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일본에서 불문학을 공부하였냐는 질문에 대해 선생님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프랑스에 갈 수 없었고, 창작을 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인 줄 알고 있으나 남이 창작해 놓은 글을 읽으면서라도 절대적인 자유를 향유하고 싶어서 문학을 한다고 솔직히 말하셨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흠 없는 자유, 그래서 불가능한 자유, 역사가 왜곡시키고 상처 입힌 이 흠 없는 자유를 만회하려고 문학을 하는 것이지, 문학이 값비싼 취미거나 오락의 장난이 아니라고. ---「지중해」 중에서 공중에 떠다니는 말은 어디엔가 머물다가 다시 돌아온다니까, 차라리 물로 씻고 또 씻어서 멀리 떠내려보내는 편이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나을 성싶기도 했다. 민수 엄마야, 누구 안엔들 쏟아내지 못한 말이 없으랴, 그냥 그렇게 품고 출렁거리다가 하수도로 흘려보내면 그뿐인 것을. ---「목욕탕하는 여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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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민혜숙의 우아한 감수성으로 전하는 우리 삶의 온기와 위로'목욕하는 남자', '메트로 불로 도도', '사막의 강', '훤', '태몽', '상사회', '지중해', '목욕하는 여자' 수록
199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민혜숙의 네 번째 소설집 [목욕하는 남자]가 소명출판에서 출간되었다. 민혜숙의 [목욕하는 남자]는 그간 문학지 등에 발표했던 '사막의 강', '목욕하는 남자'를 포함 총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모았다. 사회생활, 사랑, 결혼, 꿈, 죽음 등을 소재로 한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가장 큰 모티프는 단연 삶이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불쌍하지도 않은 평범한 우리의 이야기를 편안하고 세련되게 풀어나간다. 주목받지도 소외당하지도 않은 우리의 주변은 어떤 모습일까.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하다. 흔하디흔한 부장, 중년의 가장, 교사, 싱글맘, 주부, 대학원생 등. 평범한 이들이 만나는 인물들 역시 어찌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주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은 각각이 가진 다른 것에 주목하는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부모와 자식, 친구 등 사람과 삶의 관계의 간격을 좁혀 나간다. [목욕하는 남자]는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이루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여덟 편의 단편을 통해 가만히 마음을 울린다. “도대체 부장님은 왜 그렇게 목욕탕엘 자주 가요'” “자주' 자주가 아니라 매일이야.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씩 갈 때도 있어.” 표제작 '목욕하는 남자'는 쪼아대는 상무와 날로 더해가는 책임으로 시달리는 제약회사 부장의 수상한 목욕탕 외출을 그렸다. '목욕하는 남자'와 '목욕하는 여자'에서 목욕탕은 일종의 해소의 공간이다. 그러나 '목욕하는 남자'의 목욕탕이 산업화 선배세대와 디지털 시대 젊은이들 틈에서 끼인 처지를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과 치료의 공간이라면, '목욕하는 여자'의 목욕탕은 모든 소리가 모이는 곳이다. '목욕하는 여자'에서 가정주부인 나는 목욕탕 안에서 온갖 농과 교육정보, 이웃집 가정사까지 듣는다. 목욕탕은 소리를 듣는 공간임과 동시에 그 소리를 물로 씻고 흘려보낼 수도 있는 해소의 공간인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세상 일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 '메트로 도도 불로'는 주인공이 우연히 지하철에서 본 기사 소제목 “메트로(metro, 지하철) 도도(dodo, 잠) 불로(boulot, 일)”로 “지하철 타고 가서 죽도록 일하다가 지하철에 돌아와서 잠자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행사 직원의 이야기다. '사막의 강'은 중·고등학생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 전 남편을 만나며 겪는 심리적 변화를 사막의 강에 묘사한 작품으로 작가 민혜숙의 감성적 문체를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훤'은 밝게 살라고 명(明)이란 이름을 받은 내가 동생 ‘훤(')’의 이야기를 하며 시작한다. 광채나게 살라고 프로그래밍된 동생은 말 그대로 훤하게 살줄 알았다. 그러나 시댁의 빚 때문에 제부는 해외지사로, 동생 훤은 친정에서 떨어져 아이를 키우며 살기를 몇 년이 지난다. 훤은 점점 말이 없어지고 어머니의 앓는 소리는 많아진다. '태몽'역시 걱정 많은 어머니가 등장한다. 사남매의 어머니는 ‘천국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 같은 길을 걷던 자식들 중 돌연 한 명이 돌아가는 꿈을 시작으로 노심초사 자식걱정뿐이다. “왜 군것질부터 하는 거예요' 디저트는 디저트라니까. 디저트가 밥을 대신할 수는 없다니까요.” '디저트'는 잘나가는 변호사에 자상하고 반듯한 성품까지 완벽하지만 늘 후식부터 먹는 남자친구 성훈의 이야기다. 지금 함께 ‘밥’ 먹는 사람보다 후회라는 매력적인 ‘디저트’인 옛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성훈이다. '상사화'에는 박스로 편지더미를 안고 살던 승현 아빠 안우진이 첫사랑과 젊음의 기억을 껴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 집착을 버리고 성훈과 우진 각각이 그것들을 ‘추억’으로만 남기는 내면의 성숙 과정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안내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지중해를 그토록 그리셨어요'” “글쎄, 그걸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냐만 일단 이름이 멋있지 않아' 지중해, 이름 그대로 육지 가운데 들어있는 바다…” '지중해'는 박사논문을 심사 중인 대학원생이 바라본 불문과 노교수를 통해 인생과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민혜숙은 이상의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간결하고 단단하게, 그러나 따뜻하게 우리의 삶 자체를 고스란히 [목욕하는 남자]에 담아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