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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_ 말글 수호 투쟁은 가장 성공적이고 빛나는 독립운동(김종택 한글학회 회장)
머리말_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본 한글 투쟁사 들어가는 말_ 한글이 목숨이다 하나_ 우리 말글을 지키자 한글 깨어나다 - 국문의 탄생 조선어를 제거하라 - 일제의 조선어 말살 책동 말모이를 만들자 -우리 말글 지키기 작전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조선어학회의 언어 독립 투쟁 둘_ 삭풍이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독립 만세의 씨앗을 뿌리다 - 대종교와 조선어학회 한글은 민족이다 - 국학자들의 어문 연구 한 마음 다른 시선 - 국어 연구 단체의 갈등 셋_ 겨레를 눈뜨게 하라 조선에는 한글이 있다 - 기독교선교회의 한글 전용 배우자, 가르치자 -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 조선일보의 문자 보급반 운동 넷_ 아아, 조선어학회 불안한 조짐들 - 일제의 압박과 신명균의 자결 마각을 드러내다 - 정태진과 영생여학교 사건 야수들의 시간 - 홍원경찰서의 비명 소리 ㄹ자를 배우다 - 기노시타 기쇼오의 나날 다섯_ 그날은 오리라 꿈은 잠들지 않는다 - 해방 그리고 석방 다시 불씨를 피우다 - 서울역의 기적 해방공간의 새 물결 - 우리 말글 되살리기 고난의 종점에서 - 최후의 장애, 한글 파동 부록 1 그때 그 사람들_ 조선어학회사건 33인 소전 부록 2 간추린 한글 연대표_ 훈민정음 창제에서《큰사전》완간까지 참고 문헌 |
李相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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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중국인들도 자기 말글에 위기의식이 있었다. 아편전쟁 패배,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北京점령, 이어진 청일전쟁 패배로 큰 충격을 받은 중국 지식인들은 어려운 한자로는 정치 개혁과 국민 계몽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표음 위주의 문자 개혁을 추진하는 중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의 대문호이자 선각자 루쉰魯迅이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은 반드시 망한다”고 했을까. ---p.16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법률·기술·사회 분야의 필수 언어로 자리 잡은 일본어는 국어가 되었고, 조선어는 일개 반도어, 지방어, 언문, 방언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조선의 교육 현실을 직시한 상하이의 영자 신문 대륙보China Press의 나대니얼 페퍼Nathaniel Peffer 기자는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되었으며, 교수 용어도 일본어다. 몇 시간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는 일본인이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다만 문학적 언어로 배울 뿐이다. …… 조선인 교육의 첫째 목적은 일본어 보급이다. 이 계획은 용의주도해서 보통학교의 매주 수업 시간 32시간 중 8시간은 일본어 시간이다. 즉 조선 아동은 학습 시간의 4분의 1을 외국어인 일본어에 소비한다. 다른 과목에 비교하면 일본어 시간은 배나 된다.’ ---pp.45~46 “독일과 영국이 폴란드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지배했을 때 폴란드어와 켈트어를 말살했듯이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민족 말살 차원에서 선어를 말살할 것입니다. 한글 운동이야말로 민족자존을 위한 투쟁입니다!” ---p.71 스승 주시경의 유지를 받들어 말모이 편찬을 추진하다가 해외에 망명한 김두봉이나 조선어학회의 선봉장 이극로, 독립투사들의 지킴이 인 등 대다수 조선어학회 회원들 역시 대종교인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인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p.89 1838년 12월 1일 조선에서 선교하던 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Imbert 주교는 포교성성布敎聖省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조선 사람들은 그들의 모국어가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데 적합한데도 자기 고유의 말을 멸시한다. 한문 서적만 사용하고 번역하지 않은 상태로 발음만 옮겨 뜻도 모르면서 기도하고 있다.’ ---p.134 사전 편찬의 실무를 맡은 정인승은 명사, 감탄사, 부사 등의 어휘풀이를 담당하면서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 용례 때문에 고심했다. 일례로 ‘궁둥이’에 관련된 어휘를 수집해보니 궁둥이, 궁뎅이, 엉덩이, 엉뎅이, 응덩이, 응뎅이, 방둥이, 방뒹이 등 수없이 많았다. 매사에 적극적인 그는 옷을 벗고 궁둥이를 내놓은 다음 회원들과 함께 어디까지‘궁둥이’고 어디까지‘엉덩이’며 어디가‘방둥이’인지 토론했다. ---p.179 이극로는 월북하기 전 김두봉의 편지를 받았다. ‘나라가 두 쪽이 나더라도 말까지 두 쪽이 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 북쪽에서는 사전 편찬이 시급한데 쓸 만한 학자가 없습니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되니 당신이 북쪽으로 와주십시오.’ ---p.229 “중국인도 한자 때문에 나라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며 문자를 고치려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그 고약한 한자를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가.” 조선어학회는 이런 상황에 당혹감과 절망감이 들었다. 그 무렵 중국의 지식인들은 평생을 배워도 알기 어려운 한자를 개혁하지 않고는 중국의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언문일치가 문맹률을 낮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p.236 휴전 협상이 한창이던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통해 정부 문서와 교과서에 옛날대로 쓰기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석 달 이내에 현행 맞춤법을 버리고 구한말 기독교계에서 가르치던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구한말 성경 맞춤법’은 박승빈의 정음파가 주장하던 표음주의적 맞춤법이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모든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다. ---pp.241~242 우리말《큰사전》6권의 출판이 완료되었다는 것은 한국 문화사상 획기적인 대사건으로, 후대까지 기념할 만하다. 세종대왕이 정음을 제정·반포한 지 510년 만에 순전히 우리글로 우리말을 해석한 사전이 완성된 것이다. ---p.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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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주시경에 이르러 한글로 다시 태어났고, 그의 뜻을 이어받은 조선어학회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주시경의 염원 말모이부터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굴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완성하려 한 우리말 사전 편찬은 겨레의 얼을 지키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 과정에서 분개한 동지의 자결과 옥중에서 죽음 등 숱한 사연이 줄을 이었고, 광복 후에는 피땀 흘리던 동지들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아픔도 있었다. 무지한 지도자의 독선 때문에 한글 파동이라는 기막힌 상황도 겪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던가. 마침내 《큰사전》 여섯 권을 완간함으로써 고난에 찬 그들의 행군은 찬란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 사건이 순수 학술연구를 일제가 모략하여 조작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 말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 맞선 언어독립투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글날 567돌, 23년 만에 공휴일 재지정 올해부터 한글날은 다시 국경일이자 공휴일로 재지정되었다. 1970년에 공휴일로 정해졌으나 1990년을 마지막으로 취소되었다가 2005년 공휴일 없는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올해부터 다시 공휴일이 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과 한글의 의미를 되새기고 겨레의 얼을 지켜온 한글단체와 학자들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다. 또 서울시에서는 한글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세종문화회관 뒤안길에 주시경 선생 조각상을 세우고, 세종로 인근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세움으로써 한글을 가꾸고 지켜온 선열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늦었지만 ‘한글이 곧 목숨’이라고 일갈한 최현배 선생 등 한글 지킴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까. 조선어학회사건은 곧 언어 독립투쟁 이 책은 조선어학회사건이 일제의 순수 학술 연구를 일제가 모략하여 조작한 사건이 아니라, 언어독립투쟁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최초의 교양서이다. 사실, 주시경도 조선어학회사건도 일부 연구자들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주시경은 1910년 무렵 ‘한글’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는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한글』에서 처음 보이지만,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및 국어학자들은 1910년부터 ‘정음’이나 ‘언문’ 대신 ‘한글’이란 말을 사용했다. 물론 맞춤법의 체계를 잡아나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우리가 쓰는 한글이 이때 태어난 것이다.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꿔 나가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켜 장차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이라고 믿었다.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말모이(국어사전)를 만든 것은 우리 겨레의 얼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겨레의 얼을 지켜야 장차 독립을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말모이사업이 항일투쟁, 독립투쟁의 한 방법이었다는 것은 주시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어학자들이 대종교의 일원인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대종교는 독립투쟁의 중심이자 선봉이었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 회원과 대종교의 연관관계를 상세하게 밝혀 말글 수호 투쟁이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주시경과 제자들, 조선어학회사건 33인 한글의 스승 주시경은 말모이사업을 진두지휘하다가 1914년 38세의 나이에 급체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제자들은 망연자실했지만 스승의 유지를 잊지 않고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말모이 사업에 몰두했다. 급기야 일제는 조선어 말살을 획책하다가 조선어학회사건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일제의 조작이 아니었다. 이미 말모이사업은 그대로 항일 투쟁이었고,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주시경과 제자들, 조선어학회 회원들, 조선어학회사건 관련자들을 빠짐없이 추적했다. 그들은 나중에 남북으로 갈리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다른 길을 걷기도 하지만 한글을 가꾸고 지켜내는 일에는 한마음 한 뜻이었고 마침내『큰사전』을 완간해냈다. 한글 연구서가 아니라 테마 근대사 이 책은 한글학자의 한글 연구서가 아니다. 조선어학회사건을 중심으로 기술한 근대사이다. 요즘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 한참인데,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쓰기 때문이 벌어진 논란 아닌가. 문제가 된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에서 일제가 ‘한국인에게 한국어 필수화’로 한국어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친 점을 높게 평가했다. 당시 일제가 조선어를 정규과목으로 편성한 것은 맞지만, 교습시간은 오히려 줄었고, 상급학교 시험과목에서는 아예 제외됐다는 사실을 문제가 된 교과서는 애써 모른 체 하고 있다. 이 책『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에서는 일제의 그런 잔 수를 ‘빛 좋은 개살구’라고 논평하고 있다. 역사는 왜곡할 수 있지만, 진실이 바뀌는 법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