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다른 이름
작가의 말 |
김희진의 다른 상품
|
백화점에 갔다.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태어나 처음이었다.
---「첫 문장」중에서 구매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구매였다. 아무리 봐도 조르지오 아르마니 바지와 낡은 운동화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구두도 한 켤레 샀다. 그러나 큰마음 먹고 돈 좀 써보겠다는 호기도 돌체앤가바나 구두 앞에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첫눈에 반해버린 구두였다. --- p.11 모든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트렁크를 닫았다. 설정해둔 비밀번호로 트렁크가 열리는지 확인하기 위해 세 자리의 숫자 다이얼을 돌렸다. 트렁크는 찰칵, 하고 열렸다. 단호한 만큼 명징했다. 그는 배신 없이 열리는 트렁크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비밀번호로 태어났어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비밀번호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그들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을 테니까. 다시 트렁크를 닫고 숫자 다이얼을 흐트러뜨렸다. 이제 이 트렁크를 열어볼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다. --- p.17 이미 짐작했다시피 그는 흑인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검둥이 새끼’라고 부른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는 검둥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순수 한국 혈통이기 때문이었다. --- p.23 흑인 아들을 낳았다고 늘 억울해하던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도 죽을힘을 다해 이렇게 항변했다. “분명히 말한다만, 난 검둥이와 자지 않았다. 누구보다 결백해. 믿어줄 수 있지?” 그는 울먹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어.” “난 정말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넌 니 아버지 아들이고 내 아들이야…….” “안다니까.” --- p.24 자신을 잡상인으로 오해할까 봐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이 트렁크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핸드폰에 가 있던 몇몇 시선들이 그를 향하기 시작했다. 고무된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와 하루 동안만 같이 있어주시는 분께는 트렁크는 물론, 이 안에 든 것까지 몽땅 드리겠습니다…….” --- p.26 구두를 꿰어 신고 벤치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또 물었다. “혹시 스페인어 할 줄 아세요?” 뭐지? 자기한테 물어보는 게 맞나 싶어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 그뿐이었다. 그런데 영어도 아니고 뜬금없이 스페인어라니. 게다가 여자는 그의 피부색을 보고도 그냥 한국말로 묻고 있었다. 그가 졸린 눈을 끔뻑이며 “스페인어요?”라고 되물었다. “네.” 여자가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p.49 그가 물었다. “근데 미겔은 왜 이 년 만에 답장을 보내온 걸까요…….” 자기도 그게 궁금하다며 그녀의 눈이 가로등 불빛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저 편지에 들어 있을 테죠…….” 그의 시선이 미겔의 편지로 향했다. 비슷한 처지임에도 그와 다른 삶을 살아냈을지 모를 미겔이 떠올라서였을까. 내내 잠잠하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두통이 밤의 우울과 짝을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 p.82 “아, 그러면 되겠다. 제가 식탁 하나 만들어줄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가 “네?” 하고 반문했다. “저 트렁크요, 아무 대가 없이 갖기엔 너무 고가잖아요.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지?” 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대가 없이 받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소라 씨 시간을 저한테 쓰는 거라니까요.” 그래도 이건 도리가 아니라며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근사하게 하나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괜찮아요. 아니, 필요 없어요…….” 그는 극구 손사래를 쳤다. --- p.110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채 말했다. “그건 핑계고, 혼자라 육 인용은 필요 없다 그거죠?” 속내를 들켜버린 그는 차마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엿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털어놓기라도 하듯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모르죠? 제가 만든 식탁은 이상한 마력을 가졌다는 거요.” “그게 무슨…….” “식탁 주술가라는 말도 못 들어봤죠?” “주술가?” “제가 바로 그 식탁 주술가예요. 장담컨대 제가 만든 육 인용 식탁을 집에 들이는 순간 그 의자를 채워줄 사람들이 분명 나타날 거예요.” --- p.111 G를 처음 만났을 때 G는 벤치에 홀로 앉아 새우버거와 캔 콜라를 먹고 있었다. 그가 바라본 G의 첫인상은 정말 못생겼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발걸음은 성큼 G에게로 향했다. 못생긴 여자라서 G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게 아니었다. 탈 인형을 쓴 자기 자신 때문이었다. 탈 인형을 쓰고 나면 그는 ‘장세오’도 ‘검둥이’도 아닌 그냥 ‘호랑이’가 되었다. 그래서 탈 인형 너머의 그는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쳐났다. --- p.160 |
|
“저와 하루 동안만 같이 있어주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트렁크와 그 안에 든 것까지 몽땅 드리겠습니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검은 피부의 남자와 사랑하는 이에게서 온 편지를 꼭 읽어내야 하는 여자의 ‘다른 여름’! 결핍을 가진 남녀가 함께한 여름날의 우연한 여행! 그들이 맞이할 다른 여름은 편안한 계절이 될 수 있을까? 『두 방문객』, 『얼마나 이상하든』 등의 소설을 써온 김희진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한 남녀의 특별한 동행기를 따라가는 『다른 여름』이다. 백 퍼센트 토종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검은 피부의 남자 ‘장세오’와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을 나눈 스페인 남자에게서 2년 만에 날아온 번역되지 않은 편지를 읽어내야 하는 여자 ‘조소라’의 우연한 만남과 동행기를 그린 소설이다. 본인은 철석같이 돌연변이라고 믿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엄마의 불륜을 의심하며 ‘검둥이’라고 부르는 장세오는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 가족들마저 죄다 그의 곁을 떠나버리자 오랜 세월 그를 괴롭혀온 냉대와 차별, 고독에 지쳐 일단의 결심을 내린다. 가진 돈을 거의 털어 최고급 정장을 사 입고 명품 트렁크 가방을 구매해서 무언가를 넣은 후, 거리로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무작정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하루 동안만 같이 있어주면 트렁크는 물론, 그 안에 든 것까지 전부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를 향한 의심과 불신과 냉대와 오해만 마주하고 좌절하게 된다. 지친 그가 공원에서 쉬고 있는데,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 조소라는 생뚱맞게 그에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느냐고 한국말로 물어본다. 그녀에게는 꼭 읽어야만 할 편지가 있기 때문이다. 계획상 자신과 함께해줄 단 한 사람이 꼭 필요했던 장세오는 엉겁결에 스페인어를 배웠다고 말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결핍과 필요를 공유하며 여름날의 기묘한 동행을 시작한다. 조소라는 순례길 여행에서 만나 짧은 순간 깊은 사랑에 빠졌던 남자에게서 2년이나 지연된 편지를 받았지만, 스페인어라 읽을 수가 없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 편지가 너무 궁금하면서도 서둘러 읽고 싶지가 않았다. 하루만 함께 있었달라는 장세오의 제안과 편지에 대한 그녀의 양가적인 감정이 맞아떨어져 그들은 (편지가 온전히 번역될) 며칠 간의 동행에 나서며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하고, 낯선 동네의 아마추어 연극을 보고, 번지점프를 하러 가고, 히치하이킹을 하고, 마침내 장세오의 엄마 친구를 만나러 가기에 이른다. 이들의 특별한 여름 여행은 서로의 결핍과 필요를 보듬을 수 있을까. 그들이 함께한 우연한 동행은 그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편안하고 아름다운 ‘다른 여름’을 선사할까? 『다른 여름』은 사람이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마음을 다한 사랑이 제때에 응답받지 못했을 때, 공동체나 주변 세계로부터 존재를 외면당했을 때, 그 고독과 상처는 무엇으로 치유받고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질문하는 소설이다. 장세오와 조소라라는 독창적인 캐릭터의 합을 보고 있노라면, 독자들도 이 각별한 여정에 동참해 함께 ‘다른 여름’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김희진 작가의 필력으로 빚어진 흥미로운 캐릭터와 예측하기 어려운 전개가 시종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소설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된 도서인 만큼 작품성과 완결도 또한 보장된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