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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판 서문초판 서문1. 영매가 그리스도인이 되다 2. 신임 설교자 3. 스파턴버그 4. 캘리포니아의 천막 집회 5. 저술가와 여행자 6. 호주: 뒤섞인 반응 7. 호주: 두 교회의 목회 8. 할 일이 없는 설교자 9. 섭리의 비밀 10. 핑크의 고립에 대한 해석 11. “우리가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2. “이만 통의 편지” 13. 지극히 유용한 숨은 사역 14. “모든 것이 다 잘되었도다” 15. 교사로서의 핑크 16.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핑크의 견해 부록 1. 아더 핑크의 원고 부록 2. 설교 노트 부록 3. 핑크의 주요 저술 목록주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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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in H.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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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아더 핑크의 삶, 신앙, 신학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 아더 핑크의 생애과 활동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 연보 수록-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2권독자 대상 - 아더 핑크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픈 독자- 진리를 품은 한 인물이 어떻게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인물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고 싶은 그리스도인 - 신학자와 더불어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목회자, 신학생, 선교단체 간사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 연보1886년 4월 1일 | 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에서, 자영업자이던 아버지 토머스 클레멘트 핑크와 벨퍼 출신 어머니 아그네스 헌트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핑크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녔다.)1902년 |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로 자리를 잡다.1908년 | 22세에 자신의 침실에서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다. (당시 사이비 종파인 신지학회에 깊이 빠졌던 그를 돌이킨 것은, 아버지가 전해 준 잠언 14:12 말씀이었다.)1910년 6월 | 영국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 있는 2년 과정의 무디 성경학교에 들어가다. 6주가 지난 후, 성경학교를 떠나 목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다.1910년 8월 | 콜로라도 주 실버턴의 회중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다.1913년 | 캘리포니아(두 번째 목회지로 추정)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8개월간 머무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쟁이 일으킨 모든 흥분을 목도하게 된다.)1915년 | 미국 켄터키 주 버케스빌과 올버니에서 1년간 목회하다.1916년 | 30세의 늦은 나이에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과 결혼하다. 켄터키 주 스코츠빌에서 목회하다.1917-1920년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의 노스사이드 침례교회에서 목회하다.1918년 |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 출간되다. (이 무렵, 핑크는 점점 더 청교도 고전을 탐독하게 된다.)1920-1921년 | 미국 동부의 여러 주와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 설교자’로 활동하다.1922년 | 사설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발행하기 시작하다. (영어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배부된 이 잡지를 통해 독자들은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된다.)1925년 3월 | 호주 시드니로 이동하여 여러 집회와 함께 시드니 벨브와 가 교회와 독립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다.1928년 7월 | 영국으로 돌아와 8개월 동안 머물며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랐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다. (이후 1936년까지 핑크 부부는 열두 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살아야 했다.)1929-1930년 | 켄터키 주 모턴스 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다. “우리는 1930년 한 해 동안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점점 더 보기가 어려웠다.”1931-1934년 | 동부 펜실베이니아로 근거지를 옮겨 연구하고 집필하다. (이때는 미국이 경제 대공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1934년 9월 | 영국으로 귀국하여 첼트넘, 글래스고, 호브에 정착하여 책을 집필하고 「성경연구」를 발행하는 일에 몰두하다. “마침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는 모든 희망과 노력을 단념하고, 모든 공중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제 나는 잡지 발행이라는 이 행복한 사역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편지 왕래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려고 합니다.”1940년 11월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안전하고 조용한 사역을 위해 영국 북서부 루이스 섬의 스토너웨이로 이사하다.1952년 7월 15일 | “성경이 스스로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66세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감하다. (그는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겨 스토너웨이 샌드위크 묘지에 묘비 없이 묻힌다.)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의 저작들을 여러 출판사에서 재발행하게 되고, 그 결과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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