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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판 서문
초판 서문 1. 영매가 그리스도인이 되다 2. 신임 설교자 3. 스파턴버그 4. 캘리포니아의 천막 집회 5. 저술가와 여행자 6. 호주: 뒤섞인 반응 7. 호주: 두 교회의 목회 8. 할 일이 없는 설교자 9. 섭리의 비밀 10. 핑크의 고립에 대한 해석 11. “우리가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2. “이만 통의 편지” 13. 지극히 유용한 숨은 사역 14. “모든 것이 다 잘되었도다” 15. 교사로서의 핑크 16.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핑크의 견해 부록 1. 아더 핑크의 원고 부록 2. 설교 노트 부록 3. 핑크의 주요 저술 목록 주 찾아보기 |
Iain H.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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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이 무엇인지에 관해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고 그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어려운 길을 따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가면서 “모든 점에서 나는 많은 실패를 겪었다”고 말했지만, 이제 우리는 그가 피상적인 것들이 횡행하던 날에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증인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철저히 성경을 사랑하고 한마음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증보판 서문'
그는 1918년 4월 23일에 헤렌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형제가 ‘하나님의 주권’을 다루는 5장의 내용을 읽고 복을 받은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뻤습니다. 원고를 안전하게 돌려받게 되어 감사합니다. 형제가 여기를 다녀간 후로 나는 하나님께서 형제의 마음눈을 밝혀 주시고 형제의 마음을 넓혀 주셔서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하며 귀중한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시기를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나는 이 주제를 지금까지 9년 동안 부지런히 연구했고, 이 교리는 내 영혼의 ‘큰 닻’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의 집필을 마치고 출판할 수 있게 허락하신다면, 이 책에 신랄한 비판이 따를 것은 분명합니다.……하지만 나는 이 책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당면한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합니다.”---3장 '스파턴버그' 5월 어느 날 밤에 남편이 졸도를 해서 몇 분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의식이 들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금방 영광스런 본향에 갈 것 같아. 아주 빨리 갈 거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정말 기뻐. 내가 정말 그 시편대로 찬송을 부르는 것 같아.” 남편은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여보, 왜 우는 거요? 당신도 내가 곧 본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뻐할 줄 알았는데.” 나는 혼자 뒤에 남게 될 것 때문에 운다고 했습니다. 나도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남편에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헤어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남편이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날 동안에 그처럼 놀랍게 우리를 선대하셨고, 지금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오셨어요. 주님께서 당신을 아주 큰 곤경에 버려두시지 않을 거요. 전심으로 주님만을 의지해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저버리시지 않을 거요.” ---14장 ‘모든 것이 다 잘되었도다’ |
특징
- 아더 핑크의 삶, 신앙, 신학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 아더 핑크의 생애과 활동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 연보 수록 -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2권 독자 대상 - 아더 핑크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픈 독자 - 진리를 품은 한 인물이 어떻게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인물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고 싶은 그리스도인 - 신학자와 더불어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목회자, 신학생, 선교단체 간사 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 연보 1886년 4월 1일 | 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에서, 자영업자이던 아버지 토머스 클레멘트 핑크와 벨퍼 출신 어머니 아그네스 헌트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핑크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녔다.) 1902년 |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로 자리를 잡다. 1908년 | 22세에 자신의 침실에서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다. (당시 사이비 종파인 신지학회에 깊이 빠졌던 그를 돌이킨 것은, 아버지가 전해 준 잠언 14:12 말씀이었다.) 1910년 6월 | 영국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 있는 2년 과정의 무디 성경학교에 들어가다. 6주가 지난 후, 성경학교를 떠나 목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다. 1910년 8월 | 콜로라도 주 실버턴의 회중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다. 1913년 | 캘리포니아(두 번째 목회지로 추정)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8개월간 머무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쟁이 일으킨 모든 흥분을 목도하게 된다.) 1915년 | 미국 켄터키 주 버케스빌과 올버니에서 1년간 목회하다. 1916년 | 30세의 늦은 나이에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과 결혼하다. 켄터키 주 스코츠빌에서 목회하다. 1917-1920년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의 노스사이드 침례교회에서 목회하다. 1918년 |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 출간되다. (이 무렵, 핑크는 점점 더 청교도 고전을 탐독하게 된다.) 1920-1921년 | 미국 동부의 여러 주와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 설교자’로 활동하다. 1922년 | 사설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발행하기 시작하다. (영어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배부된 이 잡지를 통해 독자들은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된다.) 1925년 3월 | 호주 시드니로 이동하여 여러 집회와 함께 시드니 벨브와 가 교회와 독립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다. 1928년 7월 | 영국으로 돌아와 8개월 동안 머물며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랐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다. (이후 1936년까지 핑크 부부는 열두 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살아야 했다.) 1929-1930년 | 켄터키 주 모턴스 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다. “우리는 1930년 한 해 동안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점점 더 보기가 어려웠다.” 1931-1934년 | 동부 펜실베이니아로 근거지를 옮겨 연구하고 집필하다. (이때는 미국이 경제 대공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1934년 9월 | 영국으로 귀국하여 첼트넘, 글래스고, 호브에 정착하여 책을 집필하고 「성경연구」를 발행하는 일에 몰두하다. “마침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는 모든 희망과 노력을 단념하고, 모든 공중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제 나는 잡지 발행이라는 이 행복한 사역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편지 왕래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려고 합니다.” 1940년 11월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안전하고 조용한 사역을 위해 영국 북서부 루이스 섬의 스토너웨이로 이사하다. 1952년 7월 15일 | “성경이 스스로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66세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감하다. (그는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겨 스토너웨이 샌드위크 묘지에 묘비 없이 묻힌다.) 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의 저작들을 여러 출판사에서 재발행하게 되고, 그 결과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