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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 『에세이 효봉』을 엮으며 8
프롤로그_ 낯선 만남 12 1부 삶의 길 방문객 22 화려한 지옥 29 귀향 36 운봉雲峰 vs 원명元明 43 견성의 노래 50 금강산을 떠나며 58 뱃사공의 길 66 ‘효봉曉峰’의 탄생 75 학눌學訥의 길 83 효봉이 가야산으로 간 까닭은? 91 통영에서 쏘아 올린 작은 꿈 99 정화의 길 109 동화사에서 던진 질문, ‘이 뭣고?’ 118 고요 속으로 126 2부 사유의 길 체험과 해석 138 마음이란? 146 마음 찾는 길 154 깨침의 길 162 닦음의 길 170 정혜쌍수의 실천 178 화두 바라보기 187 보림과 보살행 196 바른 정진 205 부처의 뜻, 부처의 말 214 목우가풍의 전승 223 에필로그_ 학봉學峰의 길 232 부록_ 효봉 스님의 생애를 그린 구상도九相圖 / 현호玄虎 스님 2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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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健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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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은 이런 희유한 인연으로 사바세계를 방문했다. 그가 속가의 이름인 이찬형李燦亨으로 왔던 때는 1888년 음력 5월 28일이다. 그는 평안남도 양덕군 쌍룡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아버지 이병억李炳億과 어머니 경주 김씨金氏 사이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비록 망해 가는 나라였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부유한 집안의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랑받을 조건을n 충분히 갖춘 셈이다. 게다가 그는 신동神童이었다.
--- p.23 그는 1913년 26세의 나이로 귀국한 후 10년간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을 거쳐 지금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평양 복심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한다.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백성들은 일제로부터 온갖 수탈을 당하고 뜻있는 젊은이들은 나라를 찾겠다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식민지 체제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 p.34 그는 3년 동안 전국을 떠돌면서 엿장수 생활을 한다. 그것은 추위와 굶주림이 따라다니는 지독한 고행의 길이었다. 길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면 ‘이게무슨 생고생이야.’라는 생각에 그만두고 싶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독립군 청년에게 사형을 선고하던 그날이 떠올라 마음을 다잡곤 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참회하는 길밖에 없다. 지금 겪고 있는 타향살이의 고통이 참회의 길이라 자위하면서 그는 걷고 또 걸었다. --- p.38 1925년 음력 7월 8일 찬형은 서른여덟의 늦은 나이로 사미계를 받고 엿장수에서 출가 사문으로 옷을 바꿔 입는다. 이때 스승인 석두 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 원명元明, 법호는 운봉雲峰이었다. 늦깎이 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문에게 출가한 날은 또 다른 의미의 생일生日이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날, 삶의 질적 전환을 이룬 날이기 때문이다. 훗날 효봉은 매년 이날이 돌아오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출가의 기억을 떠올리곤 하였다. --- p.41 1년 6개월 동안 토굴에서 자신의 업과 치열하게 싸우던 효봉은 마침내 문 없는 문을 박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 가득한 실존에서 벗어나 마침내 당당한 봉우리를 밝게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낙타의 삶을 청산하고 사자의 삶으로 질적 전환을 이룬 대사건이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 금방 쓰러질 것 같은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사자의 외침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海底燕巢鹿抱卵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火中蛛室魚煎茶 타는 불 속 거미집엔 물고기가 차를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p.52 어쩌다 보니 이제야 첫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답사를 못한 측면도 있지만, 효봉이 출가하고 수행한 곳이 주로 북한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 효봉이 금강산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과정을 그려야 한다. 그의 발자취를 좇아 어디든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디를 먼저 찾을까 고심한 끝에 첫 발자국을 수덕사에 찍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효봉에게 선옹船翁이라는 법호와 함께 전법게傳法偈를 내려 준 스승 만공선사의 마음을 느끼고 싶어서다. 그는 왜 제자에게 선옹이라는 법호를 내려 준 것일까? 오늘 풀어야 할 화두다. --- p.66 吾說一切法 내가 말한 모든 법 都是早騈拇 그거 다 군더더기. 若問今日事 오늘 일을 묻는가? 月印於千江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1966년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새벽 3시, 효봉은 제자들에게 ‘나오늘 갈란다.’라고 말하였다. 순간 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구산이 진리의 스승에게 지금도 화두가 성성惺惺한지 묻는다. 스승의 입에서 ‘무라, 무라.’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스승과 제자는 이별의 순간에도 마음과 마음으로 진리의 문답을 나누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어디에서 쉬이 볼 수 있겠는가. 오전 10시 정각, 효봉은 가부좌한 채 그렇게 고요 속으로 들었다. 세수 79세, 법랍 42년의 삶이 인연을 다하는 순간이었다. 표충사 도량에는 효봉의 입적入寂을 알리는 108번의 열반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 pp.130~131 효봉이 안내한 길은 다름 아닌 부처를 찾는 일이다. 그는 우리에게 마음이 곧 부처이니 그것을 찾으러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 유명하다는 도량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기도를 한다. 그곳에서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부처를 찾아 또 다른 영험한 곳으로 몸을 옮기곤 한다. --- p.159 효봉이 강조한 정혜쌍수는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수행체계다. 지눌은 마음에 대해 깊이 성찰하여 공적하면서도 영지한 바탕이라고 분석하였다. 그가 심성론心性論에 깊이 천착한 이유는 그것이 곧 마음을 깨치고 닦는 기초였기 때문이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치우친 수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마음을 잘못 이해하면 잘못된 수행이 나오게 된다는 뜻이다. --- p.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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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스님을 주제로 한 전기문과 소설은 이미 많이 출판되었지만 『에세이 효봉』은 글을 쓰는 방법이 차별화되어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가면 곳곳에서 흥미로운 이야기와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당시 효봉의 문제의식을 함께 느끼고 오늘의 시선에서 그를 그리려고 했다. 이를 위해 그가 걸었던 길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래서 이 글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세이를 읽듯 단숨에 책 한 권을 다 읽어 내려 갈 수 있는 힘이 있다. 저자는 학봉學峰의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일찍이 효봉 스님이 지눌을 배운다는 뜻으로 학눌學訥이라 이름하고 길을 나선 것처럼, 저자 역시 효봉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공부하고 글을 써 보리라는 마음으로 스스로 학봉이 되어 그의 길을 걸어 보려고 나름 애써 보았다고 밝히고 있듯이 효봉 스님에 관한 사소한 부분까지 펼쳐 보였다. 특히 목우가풍을 계승하여 불교를 친절하게 소개한 인물 효봉 스님의 발자취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금강상 유점사 - 수덕사- 송광사- 해인사- 통영 도솔암- 미래사- 쌍계사- 동화사- 표충사) 여건이 허락하는 한 직접 방문하여 사진과 이야기로 더욱 현실감을 더한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스님의 일대기에 덧붙여 목우가풍을 이어 받아 지눌의 선사상과 정혜쌍수, 돈오점수, 선교회통 등 별도로 스님의 사상을 서술하여 인간 효봉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수행자이자 선지식 효봉의 면모를 면면히 드러내었다. 『에세이 효봉』2020년부터 2년 3개월 동안 월간 〈송광사〉에 연재한 글을 엮어 출간한 것이다. 보조사상연구원 이사장을 지낸 현호玄虎 대종사의 원력으로 세상에 나온 책이다. 스님은 오래전부터 효봉 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하겠다는 원願을 세웠는데, 여러모로 부족한 필자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효봉 스님의 생애는 현호 스님이 정리한 행장을 많이 참고하였다. _ 머리말 중에서 학봉의 길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 인격에서 불격佛格으로 질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길이다. 오늘의 우리가 그를 공부하고 학봉의 길을 걸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길이 있어도 사람들이 걷지 않으면 잡풀만 무성한 채 사라지고 만다. 효봉이 만든 길 역시 불자들이 걷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 그 길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손에 손 잡고 함께 걸어가면 좋겠다. 『에세이 효봉』이 작은 안내판 정도의 역할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_에필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