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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자유
잔카를로 데 카를로와 프랑코 분추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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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1장: 유년기부터 레지스탕스 활동기까지
2장: 전후 시기
3장: 중년기로 접어들던 1960년대
4장: 건축의 대주제들
5장: 아나키즘

잔카를로 데 카를로의 활동연보
옮긴이의 글: 아키텍처와 아나키

저자 소개3

잔카를로 데 카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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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carlo De Carlo

잔카를로 데 카를로는 1919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1943년 밀라노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휴전 후엔 밀라노의 건축가들과 프롤레타리아 단결 운동과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활발한 사회활동 중에도 건축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949년 베네치아 건축대학을 졸업했다. 1952년부터 ‘근대건축 국제회의(CIAM)’에 참여했고, 1960년엔 ‘팀텐Team 10’의 창설을 주도했다. 1976년 ‘국제 건축도시디자인 연구소(LAUD)’를 설립했고, 건축 잡지 <카사벨라Casabella>의 편집진으로 활동했다. 1978년 건축평론지 <공간과
잔카를로 데 카를로는 1919년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1943년 밀라노 공과대학을 졸업한 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휴전 후엔 밀라노의 건축가들과 프롤레타리아 단결 운동과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활발한 사회활동 중에도 건축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949년 베네치아 건축대학을 졸업했다. 1952년부터 ‘근대건축 국제회의(CIAM)’에 참여했고, 1960년엔 ‘팀텐Team 10’의 창설을 주도했다. 1976년 ‘국제 건축도시디자인 연구소(LAUD)’를 설립했고, 건축 잡지 <카사벨라Casabella>의 편집진으로 활동했다. 1978년 건축평론지 <공간과 사회Spazio e Societa>를 창간, 2000년까지 발행인을 맡아서 팀텐의 네트워크를 활발하게 유지하고 유럽 건축계에 대안적인 목소리를 냈다. 베네치아 건축대학을 비롯해 예일, 코넬, MIT, UCLA 등에서 가르쳤다. 1993년 영국 왕립건축가협회의 골드메달(RIBA Gold Medal)을 수상했고 2005년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르비노 마스터플랜, 우르비노 대학 캠퍼스 플랜, 리미니 중심지구 계획, 테르니 마테오티 마을과 베네치아 마초르보 주거계획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세계의 도시에서』, 『건축과 도시계획의 제문제』, 『건축과 자유; 잔카를로 데 카를로와 프랑코 분추가의 대화』, 『그리스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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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분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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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 Bun?uga

잔카를로 데 카를로의 지도하에 1974년 베네치아 건축대학IUAV을 졸업했다. 1980년대에 알제리의 건축&도시 공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했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에는 건축과 예술의 역사를 가르쳤다. 다수의 자유주의 비평지에 기고하며 주요 필진으로 활동했고? 《ApARTe》의 창간을 주도했다. 자유주의와 유토피아 사상을 기반으로 예술과 건축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했고, 이탈리아 피렌체 국립대학교에서 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번역가로서 이탈리아의 인문학과 문학 작품을 국내에 활발히 소개하고 한국문학 작품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그동안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는 마리아피아 벨라디아노의 『못생긴 여자』, 조르조 아감벤의 『행간』, 에리 데 루카의 『나비의 무게』, 필리페 다베리오의 『상상박물관』,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의 『맛의 천재』 등이 있다. 또한 대산문화재단 번역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인노첸테』를 한국어로, 이승우의 『식물들의 사생활』을 이탈리아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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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388쪽 | 420g | 125*203*17mm
ISBN13
9791189534325

책 속으로

어느 날 우리는 스칼라 광장 갤러리 모퉁이 쪽에 있는 알가니 책방의 가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 외국 신문을 펼쳐보러 자주 가는 편이었는데, 우리를 찾는 파시스트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약간의 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가판대 한쪽에 알프레트 로스의 책 『새로운 건축』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책값은 비쌌고 우리는 터무니없이 가난했어요. 하지만 줄리아나가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책 우리가 사요.”
--- p.68

제가 스파도니라는 인간을 트럭에서 보았을 때, 그는 실컷 두들겨 맞은데다 사람들이 뱉은 침으로 뒤범벅이 된 굴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상황이 정말 참기 힘들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폭력 자체를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두들 즐거워하는 분위기였지만, 저는 만신창이가 된 그 비열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면 볼수록 마치 제 자신의 파멸을 목격하는 것 같았어요.
--- p.88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비를 다시 챙겨 입고 가져왔던 두루마리 도화지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죠.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레제가 제게 두루마리 안에는 뭐가 있냐고 묻더군요. 배의 설계도라고 대답하자, 툴툴거리면서 그걸 보고 싶다고 그랬어요. 두루마리를 펼쳐주었더니 도면을 하나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질문을 던지면서 설명을 요구했어요. 그러다가 마치 그곳에는 없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듯 천천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주가 좀 있군!”
--- p.138

새벽 4시 반경이 되자 모두들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CIAM과는 이제 함께할 수 없다는 걸 느낀 거죠. 그 누구도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오랜 영광의 시대는 끝났고, CIAM은 영예로운 대변자 대신 콧대 높은 사제들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해산을 막아보려는 움직임도 없었죠. CIAM이 해체된 건 더 이상 생존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 p.179

돈을 적게 들여 지은 집이 가격도 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앞서 오늘날 자원이 어떤 식으로 배분되는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못사는 사람들의 주택은 저비용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결정하기에 앞서, 이미 잘사는 사람들을 더 배부르게 하기 위해 추진되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업들과 불필요한 시도들 때문에 어마어마한 자원이 낭비된다는 사실부터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요?
--- p.245

제가 시에나의 탑을 계획하면서 직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설계자는 자신이 막대기 한 묶음을 허리춤에 매달고 비계를 타는 것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구조를 가늠하면서 어느 부분이 견고하고 어느 부분이 허술한지 파악한 뒤 가장 적절해 보이는 막대기를 꺼내 약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거죠.
--- p.327~328

설계를 하면서 저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바다를 바라보는 신사와 숙녀들의 모습을 자주 떠올리곤 했어요. 하늘에는 구름에 가려진 만월, 블루문이 있고, 앞쪽에는 이젤 위로 베네치아를 그린 그림 한 폭이 놓여 있는 모습을 떠올렸죠. 이것이 바로 리도입니다. 아주 독특한 베네치아만의 공간이자 건축적 일탈과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죠. 이 도시의 현대적인 잠재력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기를 바랍니다.

--- p.344

출판사 리뷰

체계와 통제를 거부한 자유주의 건축가

잔카를로 데 카를로는 1919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2005년 생을 마감한 건축가로, 영국 왕립 건축학회의 골드메달을 수상한 자유주의 건축의 대표적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과 파시즘의 시대엔 선박 엔지니어이자 레지스탕스로, 전후엔 건축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며 다이나믹한 삶을 이어간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대화의 방향을 어느 한쪽으로 정해 놓지 말고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제가 생각할 때나 설계할 때도 이런 방식을 따르니까요.” 진정한 자유주의자였던 데 카를로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념은 물론 일상적인 행동과 언어사용에서도 일관된 면모를 보인다.

어디서나 이방인이었던 유년기

어릴 적 어느 건물 통로에서 살쾡이를 마주치는 바람에 도망칠 공간을 찾던 경험으로부터 3차원의 공간을 지각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제노바와 리보르노,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튀니지로 거주지를 옮기며 여행자와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를 키워준 외할아버지가 철로 감시원이었던 덕분에 그는 일찍이 튀니지 곳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 다양한 지역의 건축물을 접하며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취급되던 경험, 튀니지에서 아랍인들의 베일에 싸인 듯한 생활양식을 접하고 느낀 강렬한 인상은 평생토록 그가 당대의 흐름이나 특정 학파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자양분이 되었다.

파시즘에 온몸으로 맞선 아나키스트

파시즘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던 시기에 그는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공산주의에 맞섰다. 반파시즘 운동권의 한가운데서 언제든 붙잡혀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숨어다니던 때에도 그의 삶은 풍요로웠다. 이 시기에 그는 아내 줄리아나를 만났고, 변장을 하고 거리를 배회하면서 친구들과 은밀한 회합을 가지던, 낭만과 위험이 뒤섞인 청년기를 보냈다. 때로 연행되거나 시민들의 냉대를 받으면서도 그는 파르티잔으로서 활동을 이어나갔고, 산속에 숨어 지낼 때 르 코르뷔지에의 도면을 필사하며, 동지들에게 건축 강의를 이어갔다. 파시즘이 무너진 후에는 광장에 거꾸로 매달린 무솔리니와 그 일당들에게 온갖 모욕을 가하는 군중을 보며 인간성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이때를 회고하며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할 비열한 인간들이지만, ‘누군가의 굴욕은 모두의 굴욕이고 인간 자체의 파멸을 의미’한다며 인간성의 한계를 짚는다.

건축은 생동하는 과정

잔카를로 데 카를로의 건축 작업에는 효율성, 위계질서, 일률적 과정, 목표 지향 같은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서구적인 계몽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목표는 언제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어야 하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길로 접어들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의 건축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동기이자 자연과의 접촉이며, 목적이란 주소지와 같은 지향점으로만 작용한다. 아나키스트가 추구하는 지향점이 그러하듯 건축 또한 생동하는 과정이다. 데 카를로가 참여의 건축과 자가 건축을 추구한 것도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은 오로지 생동하는 과정이 유지되어야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건축과 자유

그렇다면 건축과 자유는 어떤 관계인가? 독자들에겐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주제에 대해 데 카를로는 직접적인 언급 대신, 자신이 전 생애를 통해 견지했던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아르케arche/아나키anarchi/아키텍처architecture라는 삼각구도를 통해 건축을 파악한다. 이는 건축을 아르케, 즉 근본적 원리를 지상에 구현하는 최적의 기술techne로 보고 이를 건축의 사명으로 인식하는 태도와는 달리, 원리 또는 진리의 유일성 자체를 상대화하는 ‘아나키an-arche’의 편에 섬으로써, 아르케의 도그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건축에 부여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건축은 자유와 만난다. 잔카를로 데 카를로가 실천을 통해 보여준 이런 관계는, 건축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해방을 향한 절대적 지향이었다. 독자들은 그의 삶을 엿보면서 그동안 아나키즘의 진정한 의미를 매우 좁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것도 건축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개정판 서문

[앞부분 중략]

데 카를로는 도발자였다. 그의 첫 번째 작품이자 문제작이었던 마테라의 계획안은 CIAM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권위적인 스승들이 정해 놓은 모든 규칙을 파괴하며 스캔들을 일으켰다. 도발자이지만 일관적이고 확고한 자유주의-윤리적 가치들의 수호자였던 그는, 건축가로서 일하는 것이 사회의 발전을 위한 의식적 행동임을 굳게 믿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데 카를로 같은 ‘윤리적’ 인물을 위한 공간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대변하던 마지막 인물이 사라진 것을 슬퍼해야 할까?

데 카를로는 제2의 고향이었던 밀라노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굉장히 서운해 했다. 물론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데 카를로가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켰으니까. 대학의 토론회나 회의에서 그와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일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공공건물의 경우 흔히 있기 마련인 일상적인 타협도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데 카를로는 스튜디오가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도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프로젝트에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교회를 건축한 적이 없다. 나는 브리안차에 집이라도 한 채 짓기 위해서라면 자격증이라도 위조할 태세였던 폴리테크닉 졸업 예정자들 앞에서 데 카를로가 지역사회를 망가트리는 설계 용역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사람들이 건물을 너무 많이 짓는다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더 지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존 건물을 합리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니 이제는 더 이상 어떤 건물도, 말 그대로 “개집조차도”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유명 유통업체로부터 대형 슈퍼마켓 건축을 의뢰받았을 때 이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한 적이 있다. 그는 내부의 유통 경로와 동선에도 개입하지 못하고 시설물 전체를 다룰 수 없는 상태에서 구조물만 조립하는 것이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품위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년에 데 카를로는 건축계의 쇠퇴 현상을 지켜보며 가슴 아파했다. 최근 들어 이탈리아, 특히 밀라노에서 그가 건축가로서 활동하며 보여준 다채로운 경력을 공인하고,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몇몇 기념행사가 열렸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건축이라는 분야가 패션이나 디자인에 가까운 단순한 형식적 훈련 과정으로 축소되고, 현대건축의 거장들 역시 여타의 상품들처럼 지구를 짓밟는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르비노에서 하던 마지막 프로젝트가 반대에 부딪힌 일 때문에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 역사적인 도시에 현대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려는 그의 제안은 형식적인 측면만 고려하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인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이 도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데 카를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건축은 생동하는 과정이자 자유의 표현이지 과거를 박제하거나 현재를 공허하게 칭송하는 단순한 건축 양식상의 실험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며 투쟁을 벌였다.

데 카를로의 일기를 출판하기 위해 원고를 준비 중인 그의 딸 안나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에 데 카를로는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참여적인 건축 방식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를 이해하지 못한 학계로부터 얼마나 무시당했고 이탈리아 예술계와 문화계로부터 얼마나 정중하게 비난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 인간으로서, 건축가로서 아주 괴팍했고 지나치게 엄격하며 너무 정직했다는 걸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남은 건, 배척은 아니었으나 침묵과 무관심, 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오늘날 건축계에서는 아무도 내가 한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네. 내 작업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세대를 기다려야 하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스타 건축가들이 일으킨 폐해가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네.”

2014년 5월 5일 브레샤에서 프랑코 분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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