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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서문 I. 생명정치라는 수수께끼 1. 생명-정치 2. 정치, 자연, 역사 3. ‘생명의’ 정치 4. ‘생명이 대상인’ 정치 II. 면역화 패러다임 1. 면역성 2. 주권 3. 소유권 4. 자유 III. 생명권력과 생명력 1. ‘위대한 정치’ 2. 항력 3. 이중 부정 4. 인간 이후 IV. 죽음정치(게노스 사이클) 1. 재활 2. 퇴화 3. 우생학 4. 종족학살 V. 비오스의 철학 1. 나치즘 이후의 철학 2. 살 3. 탄생 4. 생명/삶의 규율 역자 해제 |
Roberto Espos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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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의 과제가─생명정치 앞에서조차─어떤 정치 활동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 있다거나 생명정치를 어떤 혁명이나 개혁의 깃발로 내세우는 데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러한 입장이 지나치게 급진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혀 급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입장은, 생명을 정치 바깥의 운영체제에 의탁하는 식으로 정치와 생명을 해체하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 서두에 언급했던 ─ 전제와도 모순을 일으킨다. 물론 정치와 생명의 해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정치가 고유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인 생명/삶을 상대로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행동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면 어디서든 새로운 주권권력의 압박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럼에도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적어도 전문적인 철학자의 입장에서는─역방향의 사고다. 다시 말해 생명/삶을 정치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사유할 것이 아니라 정치를 생명/삶의 형식 그 자체로 간주하며 관찰할 필요가 있다.
--- p.29 포스트-모던적인 현실의 미화 시도는 아예 예방 차원의 반-미화 시도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세계의 글로벌화도 우리가 다루는 패러다임에 또 다른 탐구 영역을 - 아니 결론적인 배경을 - 제공한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비대 현상은 보편화된 면역화의 전복된 신호에 불과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국가들의 입장에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기하는 면역화의 요구는 글로벌한 전염의 역효과 내지 알레르기성 거부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 p.108 탈마법화[이성화], 세속화, 정당화의 패러다임이 전제하는 것 역시 이 패러다임들이 벗어나려는 영역이라는 - 마법, 신성, 초월성이라는 -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패러다임들은 이를 때에 따라 소모되거나 점차 사라지는 무언가로, 혹은 적어도 다르게 변신하는 무언가로 전제한다. 반면에 임무니타스의 음각 내지 정반대인 코무니타스는 관련 영역에서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임무니타스 자체의 대상인 동시에 동력으로 기능한다. 뭐랄까 면역의 대상은 다름 아닌 공동체지만, 면역의 방식만큼은 공동체를 부정하는 동시에 보존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임무니타스는 코무니타스의 원천적인 의미 지평을 부정하면서 코무니타스를 보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면역화는 어떤 공동체가 ‘더불어 갖추어야’ 할 방어 장치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내부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부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면역화는 공동체를 공통성의 감당할 수 없는 과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와 분리시키는 주름에 가깝고, 공동체가 공통성의 의미론적 강도를 극단적인 형태로 수용하며 자기일치를 꾀할 때 이를 가로막는 미분학적 여백에 가깝다. 모든 공동체는 생존을 위해 스스로와 정반대되는 면역화의 부정적인 방식을 - 비록 그것이 공동체 자체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이라 하더라도 - 내면화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 p.111 모든 외부적 속박에서 자유로운 권력의 독립성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이 권력이 인간들에게 투영하는 해방의 여파 역시 절대적이다. 인간들은 누구 못지않게 절대적인 개인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공통의 의무에서 면제되는 과정, 즉 임무니타스를 통해 일어난다. 주권은 개개인의 조금도 공통적이지 않은 존재와 일치한다. 주권은 개개인의 비사회화가 취하는 정치 형태다. --- p.128 고유의 몸에 소속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확고해진 ‘소유의 논리’는 뒤이어 점점 더 큰 파도를 일으키며 공동체의 공간 전체를 뒤덮을 수 있을 정도로 널리 확장된다. ‘소유의 논리’는 공동체를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용하면서 분해한다. 이때 공동체는 공통성과 정반대되는 형태로 전복되며 수많은 파편으로 쪼개진다. 이 파편들은 모두 각각의 소유주가 고유화한 소유물이라는 사실만을 유일한 공통점으로 지닌다. --- p.139 우리는 ‘긍정적인’ 것을 ‘인정하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부정적이지 않은’ 것으로만 이해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난 이유를, 개인주의 패러다임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유와 타자(혹은 이타적인 것)의 구축적인 고리가 단절되는 현상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이 단절 현상이 자유를 주체가 자기 자신과 유지하는 관계 안에 가둬버린다. [...] 분명한 것은 ‘자유’를 더 이상 어떤 존재 방식이 아니라 무언가 고유한 것을 지닐 권리로, 다시 말해 타자와 관계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질 권리로 이해하는 순간, 이러한 관점이 자유를 탈취적인, 따라서 부정적인 소유의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유’에 점점 더 예외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형의 엔트로피적인 과정이 다름 아닌 근대 사회의 자기보존 전략과 맞물릴 때, 공통성을 유지하던 고전적 자유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면역적인 자유로 전복되어 본질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 p.148 ‘몸’은 그 자체로 정치적 원칙에 따라 - 즉 실존의 궁극적일 뿐 아니라 원천적인 차원으로서의 ‘투쟁’이라는 원칙에 따라 - 구축된다. 이 투쟁은 ‘자신’의 바깥에서 또 다른 몸들을 향해 벌어지지만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멈출 수 없는 분쟁의 형태로 벌어진다. 즉자적 존재이기에 앞서, 몸은 언제나 무언가와, 즉 스스로와도 맞서는 존재다. --- p.177 p.256 면역의 패러다임을 특징짓는 것은 단순히 어떤 배제 혹은 퇴치의 차원을 뛰어넘어 상이한 것, 기이한 것, 비정상적인 것을 현실의 혁신과 변화에 기여하는 힘으로 간주하며 오히려 수용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움직임이다. --- p.256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나치는 법을 단순히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장시켰고, 그 이유는 법의 한계를 분명히 초월하는 것마저 법 내부에 포함시키기 위해서였다. 법을 생물학적 영역에서 도출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치는 생명의 영역 전체를 규율의 명령에 위탁하고 말았다. 강제수용소는 분명히 법의 공간이 아니지만 단순한 독단의 장소도 아니다. 강제수용소는 오히려 독단이 합법적으로 변하고 법 자체가 독단적으로 변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 우리는 나치즘의 경험이 생명정치의 절정을 - 적어도 이와 정반대되는 죽음정치와의 절대적인 무분별이 나치의 특징이었다는 의미에서 -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생명정치가 바닥으로 침몰하며 일으킨 재해 자체는 오히려 이 범주를 - 우리가 앞서 살펴본 일련의 사건과 오늘날의 전반적인 상황을 관찰하며 확인할 수 있듯이,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는 이 ‘생명정치’를 -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 p.287 오늘날의 예방 전쟁에서 - 즉 전쟁을 피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자가-반박적인 형상에서 - 면역 과정의 부정성은 스스로를 매개로 배가되고, 결국에는 상황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달리 말하자면, 전쟁은 더 이상 세계적 공존의 언제나 가능한 위배가 아니라 오히려 유일한 현실로 간주된다. --- p.308 심각하게 악화된 자가면역질환의 경우에서처럼, 오늘날 진행 중인 지구촌 분쟁의 경우에도 과잉 방어의 악영향으로 인해 지키려던 몸 자체가 오히려 분쟁을 활성화하고 더욱더 강화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에 뒤따르는 것은 전쟁과 평화, 공격과 방어, 생명과 죽음처럼 정반대되는 것들이 절대적으로 일치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들 사이에서는 모든 차별화의 틈새가 곧장 소모된다. 오늘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위험이 - 혹은 적어도 그렇게 감지되는 것이 - 다름 아닌 생물 테러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더 이상은 죽음만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가 죽음의 가장 치명적인 도구로 활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09 자가-정체성-확립을 토대로 형성되는 더욱더 폐쇄적인 조직들의 - 외견상 걷잡을 수 없는 - 확산 현상은 면역화의 차원에서 역동적인 글로벌화를 거부하며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통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의미의 정치공동체적 ‘몸’이 맞이한 개기 현상과 함께 이 몸의 실체인 듯 보이는 무언가가 파편화된 상태에서 확산되는 정황을 가리킨다. --- p.333 ‘비정상’으로 정의되는 것은 어떤 별난 특징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규율’의 내부에 포함될 뿐 아니라 규율의 ‘인식’ 조건으로, 그리고 이에 앞서 ‘존재’ 조건으로 정립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정상적인 것은 논리적으로만 [정상적인 것] 뒤에 올 뿐 실존적으로는 먼저 온다.” 위반될 가능성의 영역 바깥에서만 주어지는 규칙이란 대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아니, 생물학적 차원에서 완벽하게 정상적이거나 건강한 상태는 오히려 그 자체로 탐지조차 될 수 없는 현상이다. ‘건강’이 “신체기관들의 침묵 속에서만 주어지는 삶”이라면 이는 우리에게 유기체의 모든 생리학적 특성들을 - 부정적인 형태로 - 알려주는 실체가 다름 아닌 질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p.386 “품고 있다가도 언젠가는 꺼질 수 있고 반짝이다가 타오를 수도 있는” 이 불확실한 생명의 불꽃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 불꽃이, 절대적으로 유일하다는 차원에서 ‘개인’의 영역을 뛰어넘어 어떤 비개인적인 현실에 - 즉 누구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에 -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p.391 푸코가 계몽주의에 관한 칸트의 질문에 주목하며 ‘현재’의 관점을 강조할 때 암시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로 인해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이라기보다는 현재적 관점이 과거와 과거의 해석 사이에 어떤 틈새를 열어젖힌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푸코는 근대가 마감되는 시점을─혹은 적어도 일찍이 초기의 생명정치 이론들이 밝혀 놓은 근대적 범주들의 분석적인 틀을─어떤 점이나 선, 즉 시대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관점들이 만들어내는 ‘궤도의 해체’로 이해한다. ‘현재’가 더 이상 이제껏 상상해왔던 것이─혹은 그것만은─아니라면, 그래서 현재의 실마리들이 어떤 상이한 의미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현재의 중심에서 전대미문의, 혹은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피어올라 우리의 매너리즘을 반박한다면, 그렇다면 이는 과거 역시─현재의 시원임에도 불구하고─우리가 알고 있던 과거와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 다른 과거는 고유의 얼굴, 모습, 윤곽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 얼굴을 지금까지 가리거나 은폐해온 것은 어떤 식으로든 중첩되거나 강요되어온 역사적 ‘이야기’, 모든 측면에서 전적으로 거짓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고 또 지배적인 논리에 충실했을 뿐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완전할 수 없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 p.56 |
『비오스』는 저자의 생명정치 삼부작을 완성하는 마지막 책이지만 이 기획의 실질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비오스』의 구도는 이론적 전제로 간주될 때에만 연구 결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는 저자가 생명정치의 양분된 현실에서 면역화라는 중재/분열 패러다임을 먼저 찾아낸 뒤 이를 기준으로 발견한 것이 근원적인 차원의 두 세포 패러다임, 즉 배타적 공존과 우호적 압제의 형태로 교류하는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였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이 패러다임들이 1부와 2부에서 먼저 다루어진 이유는 논리-개념적인 관점에서든 역사적인 관점에서든, 『비오스』에서 분석되는 전적으로 ‘생명정치적인’ 현상들을 선행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정치’가 융합된 형태의 패러다임 ‘비오스’는 정확하게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현실적인 조합과 분해 현상의 이름이다. 달리 말하자면 ‘비오스’는 언제나 생명/삶의 문제 또는 형태로만 부각되는 ‘공역’과 ‘면역’의 첨예한 대립과 조화의 - 언제나 평화로운 분쟁과 언제나 파괴적인 조화의 - 핵심 내용이다. 오늘날 세계의 정치구도가 생명정치이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의 해결책도 생명정치에 있다면, 우리가 영위하는 ‘생명/삶’의 거의 모든 측면이 고스란히 ‘정치’에 예속된다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포지토가 말하는 ‘생명정치’는 - 단순한 패러다임의 차원을 뛰어넘어 - 우리 시대의 숙명에 가깝다. 이 숙명 역시 - 생명정치처럼 - 이중적이다. 한편에는 이 숙명을 일종의 족쇄로 읽는 관점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를 생명/삶의 본질에 각인되어 있는 공통적인 운명의 형태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따라서 전자로 기울어지는 모든 장치와 의미론적 구도를 전복시켜 후자의 공통적인 운명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에스포지토는 생명정치의 양면성이 ‘정치’, ‘자연’, ‘역사’의 차원에서조차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한편에는 생명/삶을 내재적 기점으로 - 즉 영구적인 기원으로 - 이해하는 ‘생명의’ 생명정치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생명/삶을 사실상 대상으로만 다루는 ‘생명이 대상인’ 생명정치가 있다. 에스포지토는 전자를 우리의 목표로 설정한다. 생명정치의 해석, 체제, 의미의 방향을 전자에 기울어지도록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면역화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저자는 근현대 문명의 핵심 범주이자 오늘날의 생명정치를 구조적으로 지탱하는 ‘주권’, ‘소유권’, ‘자유’ 같은 개념들의 변화가 본질적으로는 면역화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개념들이 보호 전략의 소유자 또는 수혜자 개개인의 안위 문제로 축약된다는 사실은 어떤 일시적인 표류 현상이나 예견된 운명 정도로 볼 것이 아니라 근대가 주체의 형상을 생각하는 그 자체로 면역적인 방식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니체의 철학이다. 저자는 생물학적 면역과 사회문화-법정치적 면역을 -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방식으로나마 - 중첩시켜 전개하는 니체의 철학에서 상당히 체계화된 단계의 철학적 면역 이론을 발견한다. 니체의 철학이 중요한 것도 그가 시도하는 근현대 문명 비판의 결이 이러한 면역학적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의 면역 이론이 지닌 하나의 어두운 뿌리에서 - 그가 일종의 힘으로만 간주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생명에서 - 솟아오르는 모순은 피할 길 없이 나치즘과 연결된다. 저자가 나치즘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치즘이 본질적인 차원에서 생명정치였기 때문이다. 단지 나치가 생명정치를 죽음정치로 이끌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생명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명이 품고 있는 부정성마저 - 즉 생명체는 죽기 마련이라는 차원에서 생명이 씨앗의 형태로 품고 있는 죽음마저 -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정치로 - 어떤 식으로든 생명/삶의 형태를 억압하고 파괴하는 방향으로 -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생명정치적인 요소들’의 정체를 나치즘과 대조하며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생물학을 기반으로 생성된 나치즘이 ‘재활론’, ‘퇴화론’, ‘우생학’을 퇴폐적인 형태로 조합하며 시도한 ‘생명’과 ‘정치’의 절대적인 일치는 결국 종족학살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나치가 활용한 장치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즉 예방 차원의 출생 제재, 몸의 이중 봉쇄(몸을 지키기 위해 구축되는 생물학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차원의 울타리), 그리고 생명과 관련된 모든 생물의학적인 요소의 정치-법률적인 통제 정책이다. 저자는 나치의 ‘출생 제재’에 맞서 ‘탄생’의 철학을, ‘몸의 이중 봉쇄’에 맞서 몸들의 경계를 오히려 사라지게 만드는 ‘살’의 철학을, ‘생명/삶의 절대적인 - 외부적인 - 규율화’에 맞서 ‘생명/삶의 내재적인 규율’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것은, 죽음정치의 상흔을 도려낸 긍정적인 형태의 생명정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