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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I. 고유화 1. 고유의 권리 2. 폭력을 향한 폭력 3. 이중의 피 4. 법적 면역화 II. 카테콘 1. 사케르와 산투스 2. 제동 3. 정치신학 4. 신정론 III. 콤펜사티오 1. 면역의 인류학 2. 부정적인 것의 생산성 3. 공동체의 위험 4. 허무의 위력 IV. 생명정치 1. 일체화 2. 파르마콘 3. 세포 국가 4. 생명의 통치 V. 장치 1. 면역의 생명철학 2. 전쟁놀이 3. 붕괴 4. 공동 면역 에스포지토의 책 역자 해제 | 코무니타스/임무니타스 |
Roberto Espos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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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이 발생한 전염병과의 전쟁이나 반인권 범죄로 고소당한 외국 국가원수의 구인 요청에 대한 반발, 불법 이민을 차단하기 위한 장벽의 강화나 컴퓨터 바이러스를 무력화하기 위한 전략 같은 현상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이 소식들을 계속해서 의학, 법률, 사회정책, 기술정보라는 해당 분야의 개별적인 관점으로 분리된 영역 안에서만 읽는다면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특수한 언어들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관찰하며 동일한 의미의 지평으로 환원할 수 있는 해석적 범주 안에서 고찰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책 제목에 명시되어 있듯이 나는 이 범주를 ‘면역화’라는 영역에서 발견했다.
--- p.7 오늘날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단순히 ‘불가피한’것에 지나지 않았던 전염 자체가 아니라 제어나 제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모든 생산 구조를 파고드는 전염의 ‘확산’이다. 어떤 불확실한 위험 상황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상황을 식별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순간 이 범주는 고유의 함의를 드러낸다. 곧장 명백해지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각각의 현상에서 이 면역화의 범주가 경계 이탈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전염병이 개인의 몸을 위협하든, 폭력적 침략이 정치공동체를 위협하든, 바이러스가 전자기기를 위협하든 간에 불변하는 요인으로 드러나는 것은 위협의 위치다. 위협은 항상 내부와 외부, 고유한 것과 생소한 것,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경계’에 머문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몸에 침투한 뒤 그것을 변질시키고 변이와 부패를 조장할 때 이 분해의 역동성을 가장 잘 표상하는 용어는 ‘전염’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물학, 법률, 정치, 소통의 언어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활용되는 용어가 바로 ‘전염’이다. 줄곧 건강을 유지하며 확실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던 것은 이제 그것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전염’에 노출된다. 물론 이러한 유형의 위협은 모든 형태의 개인적인 삶을 비롯해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에 고유한 구축적인 요소다. 하지만 면역화의 요구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면역화를 심지어 사회체계의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회전축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부턴가 전염성의 표류 현상이 띠기 시작한 가속화와 보편화의 성격이다. --- p.9 ‘몸’의 의미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역동적인 면역 메커니즘이 개인적이거나 사회공동체적인 몸의 점진적인 소외 혹은 탕진의 과정과 직결된다고 보는 아주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생명정치의 양태는 새로이 조명되는 ‘몸’의 핵심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몸’이야말로 정치와 생명/삶의 관계가 가장 즉각적으로 성립되는 영역이다. ‘몸’이 전제되어야만 생명을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뛰어넘으려는 생명체의 본질적인 성향으로부터 생명 자체를 보호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때 삶은 마치?생존을 위해? 몸이라는 울타리 안에 틀어박혀야 할 것처럼, 그런 식으로만 보존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의하자? 이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몸이 퇴보와 붕괴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병/악의 침투를 오히려 가장 직접적으로 실험하는 것이 ‘몸’이다. 울타리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오히려 다름 아닌 외부의 위험이 몸의 보호에 필요한 경보와 방어의 메커니즘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 p.28 사실상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권리는 더 이상 권리라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실’로만 인지될 것이다. 다시 말해, 권리가 없는 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권리를 지닌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나 권리의 다름 아닌 면역적인 의미, 즉 특권 또는 사적인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본질적으로 사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특권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공유할 수 있는가? 베유는 이렇게 토로한다. “지적으로 어두워진 이 시대에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의 입장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권리, 본질적으로 특권적인 것들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이는 일종의 부조리하고 저속한 청구다. 부조리한 이유는 특권이 원래 불평등한 것이기 때문이고, 저속한 이유는 그것을 바랄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p.48 법적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여하튼 폭력이 아니라 권리의 ‘바깥’이다. 즉 ‘법적 권리의 바깥’ 같은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 법적 권리가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으며 권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협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이 ‘법 바깥’에 있다는 통상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폭력은 고유의 정당성을 폭력의 내용이 아니라 위치에서 취한다. 폭력은 법 바깥에 ‘머무는 이유가 있어서’ 법적 권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법 바깥에 ‘머무는 한’ 충돌한다. --- p.57 건강한 부위와 병든 부위의 기능 교환을 통해 전개되는 유기체의 자기조절 과정을 언급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차원에서 시도되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단순한 저울질이 아니라, 부정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관건은 더 이상 ‘측정’이나 ‘판가름’이 아니라 힘의 강세와 약세가 뒤섞이거나 중첩되는 현상이다. 강세의 약화가 약세를 강화하는 데 쓰이고 약세의 강화가 강세를 약화하는 데 쓰인다. 이때 부정성은 긍정성과 균등해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무력화를 위해 생산적으로 변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사실상 아도르노나 하이데거가 정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20세기의 인류학은 결코 휴머니즘의 계승 또는 고갈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의 전복이다. 20세기 인류학이 본연의 핵심 문제로 주목했던 것은 스스로를 극복하는 인간의 인간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을 자신과는 다른 타자 혹은 스스로의 ‘부재하는 중심’과 관계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주름 또는 상처다. --- p.159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학은 정치학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 인류학의 원천적으로 정치적인 어조가 여기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보완의 공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면역장치의 기능적인 역할을 취득하거나 드러낸다. 관건이 다름 아닌 면역 기능이라는 점은,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적인 위협 앞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가 수행하는 것이 보호-보증의 역할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위협에 명백하게 공동체적인 성격이 부여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통성의 과다야말로 정치가 인간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봉쇄해야 할 위험이다. --- p.183 생명과 정치의 상호소속성은 생명정치에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생명을 제외하는 식으로 포용하는 주권 권력의 상흔 속에서는 발견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답변을 오히려 주권의 범주 자체가 면역화의 범주와 시대적으로 맞물리며 면역화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적어도 함께 뒤섞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과 정치의 조합이 실행되는 과정의 일반적인 범주는 다름 아닌 ‘면역화’다. --- p.261 질병도 건강처럼 고유의 규율을 지닌다. 단지 이 규율은 변화할 줄을 모른다. 새로운 규율을 생산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질병의 규율은 규율지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벌거벗은 생명’은 규율의 대상 또는 결과가 아니라, 규율의 무변동성이 실현되는 장소다. 그것은 무법 지대나 비정상정인 것이 아니라 - ‘법’이나 ‘정상’의 반대가 아니라 - 엔트로피적인 비-규율지향성의 지대다. --- p.269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몸과 전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신체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인간과 한 몸을 형성하며 유기적으로, 신체적으로 기능한다. 사회는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과 무관한 어떤 고차원적인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성향을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면서 사회 자체의 생존이라는 형태로 최대한 활성화하는 몸에 가깝다. 사회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도 사회를 닮았다. ‘개인만큼 고유의 차이점에 의해서만 통합되는 수많은 파편으로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존재도 없다. 개인 자체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주체라기보다 오히려 무한히 복수적인 하나의 공동체에 가깝다.’ --- p.346 |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우려해야 했던 것은 전체주의의 회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비상사태이지 예외상태가 아니니까요. 예외상태는 특정 영역을 지배하려는 주권적 의지에서 비롯되지만 비상사태는 자연적인 필요에서 비롯됩니다. 면역은 생물학적일 뿐 아니라 법률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면역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도 직결되는 일종의 보호 체계입니다. 사회가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외부의 침입에만 대비할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고유의 면역 체계가 기능하는 방식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면역 체계는 외부의 침략을 막는 장벽이라기보다는 우리 몸의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필터에 가깝습니다. 면역관용에 의해 유지되는 수많은 현상은 바로 면역 체계의 이러한 변증적인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와 사회는 생물학적 체계에서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 개인의 몸은 물론 사회공동체의 몸도 면역 체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면역 체계를 지니지 않았던 사회는 없습니다. 법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면역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이 없었다면 분쟁은 전염병처럼 창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면역화 사이에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과도하게 적용될 경우 원래 보호하려고 했던 집단의 생명을 파괴할 수도 있는 것이 면역이니까요. 이른바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질병이 이와 흡사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철학자들은 팬데믹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한 채 두 종류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치닫는 듯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음모론적인 해석입니다. 팬데믹을 권력층에서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보는 거죠. 팬데믹이 시민들의 복종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물론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처사입니다. 아울러 권력의 무게가 입법부에서 행정부로 기울어질 수 있다는 것도 지극히 타당한 우려고요. 이는 비상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어떤 수위를 넘어서는 순간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한 비상사태의 활성화는 정부의 의도적인 선택에서만 기인하지 않고 그 누구도 예기치 못한 팬데믹의 폭발이 갑작스레 가져온 필요성에서도 기인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상상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본질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 그러니까 공통성과 면역성의 관계는 언제나 균형과 한계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팬데믹이 사회에 새로운 균형을 가져올 뿐 아니라 평등성의 구도를 재정립하게 되리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 역시 뚜렷하게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 누군가의 주장대로 - 팬데믹이 자유주의와 글로벌화의 종말은 물론 새로운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견해와 직결되기 때문이죠. 최근 몇 년 사이에 평등성의 구도가 변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러스의 접촉으로 인해 누구든 죽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차원의 평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리바이어던 국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홉스가 제시했던 원리, 즉 모두는 평등하지만 그건 모두가 죽음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는 원리는 사실 긍정적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생명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생명정치와 죽음을 특정인들의 생존 조건으로 간주하는 생명정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팬데믹 관련 인터뷰에서) 에스포지토는 공동체(코무니타스)가 타자를 위한 배려와 선사의 의무를 공유하는 공간인 반면 이 공간을 전제로만 주어지는 면역성(임무니타스)은 개인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이율배반적일 수밖에 없는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상관관계 혹은 메커니즘이 개인의 신체뿐만 아니라 우선적으로는 사회공동체의 몸에 적용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회의 몸과 인간의 몸이 지극히 유사할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 혹은 사회의 메커니즘이 인간의 신체적인 한계를 사실상 넘어설 수 없거나 이 한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암묵적인 전제로 제시한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 고유화의 법적 과정과 정치신학, 인류학, 생명정치, 생물학을 중심으로 - 면역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분석하며 근현대 사회의 가장 심층적인 패러다임이 면역임을 증명해낸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심층적인 패러다임은 임무니타스, 즉 면역화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저자는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에 면역의 메커니즘이 근원적이거나 구조적인 기능으로 실재할 뿐 아니라 핵심 동력으로 기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 사회가 - 따라서 인간의 정신, 이념, 가치가 - 인간의 몸과 다를 바 없는 신체를 지녔고 그것의 근본 구조는 면역학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면역성(임무니타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공동체(코무니타스)의 개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자의 해석적 틀인 동시에 열쇠가 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구성원들 간에 공통점이 조금도 없을 때에만 성립되는 것이 공동체다. 정확하게는 모든 구성원의 동일한 차이점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것이 공동체다. 동일한 의무사항, 동일한 한계, 동일한 모순, 동일한 병을 -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이에 대한 ‘면역화’를 꾀하면서 -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이 공동체다. 이는 사회가 지닌 터무니없이 신체적인 한계, 즉 면역화를 끊임없이 시도해야만 살아남는 ‘몸’의 변증적 모순이 거꾸로 투영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순들이 사실상 포화상태에 이르는 과정은 푸코가 말하는 ‘생명정치’가 완성되어가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이는 에스포지토의 주장대로 ‘생명’과 ‘정치’의 조합이 실행되는 일반적인 범주가 다름 아닌 ‘면역화’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포지토는 푸코의 기획을 어떤 식으로든 완성 단계로 이끈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
“몇 년 전부터 생명정치의 철학자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면역화가 강력한 마취 효과를 지닌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안도감을 주는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다. 하지만 이들은 공동체의 발전을 논하면서도,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고리나 공동체의 분리를 조장하는 장벽에 대해서는 - 접촉공포증이나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는 -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다. 로베르토 에스포지토가 증명해보인 것처럼, 면역화는 공동체의 정반대다. 면역화가 장악하는 곳에서 공통적인 활동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임무니타스와 코무니타스라는 두 성향 사이에서 균형을 모색하며 박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도나텔라 디 체사레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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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과 면역 시대의 철학자로 기억되어야 하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은 에스포지토는 자신이 옳았다는 이야기가 전혀 기쁘지 않을 뿐더러 그저 모든 상황이 갑작스레 전개되는 것을 목도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의 ??임무니타스??는 팬데믹이 일어나자 불과 몇 주 만에 재출간되었고, 이는 그가 이론화한 관점과 개념적 도구들이 팬데믹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사회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무니타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공동체가 타자를 위한 배려와 선사의 의무를 공유하는 공간인 반면 면역화가 개인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인만큼 개인의 몸과 사회의 몸이 모두 면역 체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에스포지토는 면역화라는 용어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면역화는 일련의 결정, 선택, 때로는 실패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실패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사회의 면역화가 자유를 속박하는 일련의 조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마주한 것이 절대적으로 일시적인 필요 상태의 요구에 불과하며 이에 순응하는 정책은 한정된 시공간 내부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생물학적인 면역과 법적인 면역의 조합을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주목했던 것이 팬데믹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중요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오히려 생물학적 면역에서 배워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기 때문이다. 면역의 필요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면역적인 차원에서도 과도한 면역은 질병과 생명의 붕괴 메커니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제네로조 피코네 |
“면역화 패러다임은 현대사회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의 열쇠다. 면역은 우리의 실존적 삶 자체가 회전하는 일종의 축으로 기능한다.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든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든, 우리의 삶에 관한 질문에 일종의 명령어처럼 들려오는 것은 ‘전염을 예방하라’이다.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다.” - 레푸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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