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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
1. 두려움 2. 죄 3. 법 4. 무아지경 5. 경험 부록 허무주의와 공동체 에스포지토의 책 역자 해제 | 코무니타스/임무니타스 |
Roberto Espos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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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철학만큼 오늘날의 현실적인 과제로 다가오는 것도 드물다. 역사적으로 모든 공동체주의의 실패가 곧장 새로운 개인주의의 병폐로 이어졌다는 점을 필연으로 간주하며, 고유의 관점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주장하며 표명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철학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철학만큼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드물다. 공동체의 사상만큼 먼 곳으로 밀려나 거세된 상태로 남아 있거나, 저 멀리서 도래하는 미래 혹은 해독이 불가능할 만큼 까마득한 지평으로 밀려나 있는 것도 드물다.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철학이 부재했거나 부재하기 때문은 아니다.
공동체의 철학은 오히려 국제 토론의 무대를 지배하는 테마들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철학은 앞서 언급한 비가시성과 사유 불가능성의 고랑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징후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현대 정치철학이 때에 따라 수용하는 공동체적, 공통적, 소통적 차원을 뛰어넘어─ 공동체 자체의 양태와 직결되는 한 가지 특징, 즉 공동체는 20세기의 인류가 지독히도 비극적인 방식으로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종류의 극단적인 왜곡과 심지어 타락을 대가로 치르지 않고서는 정치적-철학적 담론으로 번역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p.7 코무니타스는 고유의 특성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어떤 의무 사항이나 빚을 공통의 요소로 지녔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 무언가가 ‘더’ 있어서가 아니라 ‘덜’ 있어서, 혹은 어떤 결핍이 계기가 되어 모인 것이다. 다시 말해 코무니타스는 무언가가 결핍된 상황에서 벗어났거나 ‘면제된’ 사람들이 아니라 결핍에 ‘시달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책무나 심지어는 결함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종의 한계를 공통분모로 지닌 사람들의 집단이다. [...] 코무니타스의 주체들이 지닌 ‘의무’는 무언가를 ‘당신이 나에게 해야’ 하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해야’ 하는 차원의 의무다. --- p.16 공동체는 신체나 단체로 간주될 수 없고, 다수의 개인이 뭉쳐 형성하는 단수의 더 큰 개인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공동체는 이들이 원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서로에게 거울 역할을 하는 상호주체적인 상호인식의 장으로도 사유될 수 없고, 원래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개개인을 어느 시점에 이르러 통합하는 집단적인 결속의 장으로도 사유될 수 없다. 공동체는 개별적인 주체가 존재하는 방식이 아닐뿐더러 무언가를 ‘하는’ 방식은 더더욱 아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확장이나 증식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노출에 가깝다. 그는 그의 폐쇄를 중단하고 외부로 끄집어내는 것에 노출된다. 공동체는 주체라는 존재의 연속선상에 일어나는 일종의 현기증, 실신, 경련이다. --- p.19 국민들의 희생 메커니즘을 발동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주권자의 우월성이나 초월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체성이다. 이는 애초에 희생 메커니즘을 저지할 목적으로 도입된 정체성의 ‘인가 행위’가 희생 메커니즘을 오히려 최대한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고유의 상실을 인가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고유의 이질화를 내면화하는 것보다,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 관점은 원칙적으로 주권자의 모든 활동에 적용될 수 있지만, 주권자가 그에게 복종하는 주체를 ‘적대적으로’ 대할 때 이 관점의 특별한 중요성이 부각된다. 복종하는 ‘주체’는 이 경우에도 주권자의 행위에 맞서 항의하지 못한다. --- p.66 정치의 역할은 바로 이러한 잠재적인 파괴력이 적정선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정치의 역할은 이 파괴력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어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정치 자체가 이 파괴력의 흔적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이 파괴력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기원을 밝히려는 모든 시도는 ─ 즉 권력이 권리로 변하고 결정이 규범으로, 힘이 논리로 변하는 그 맹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모든 시도는 ─ 애초에 무력화하고자 했던 허무의 포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 p.142 사람들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중심으로, 즉 ‘불가능’이라는 공통의 책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인간들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일종의 표적처럼 자신들을 관통하며 뛰어넘는 어떤 ‘부정성’에 의해 하나가 된다. 이 표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형태로 전개되는 실현 시도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실현 대상과도 같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모두가 공유하는 고유의 허무’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공동체적 법의 대상이다. 이 조금도-공통적이지-않은 허무는 결코 파괴될 수 없고 홉스가 원했던 것처럼 단순한 허무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파괴를 선행하는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 --- p.154 무누스munus라는 라틴어 용어가 도눔donum의 경우처럼 받은 선물이 아니라 오로지 준 선물만을 가리켰다는 것은 곧 이 용어에 원칙적으로 ‘보상’의 가치가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무누스가 결정짓는 주체적 실체의 결함이 결국에는 채워지거나 회복되거나 봉합될 수 없고 주체의 열린 상처 역시 더 이상은 ─ 실제로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면 ─ 어떤 보상으로도 닫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함께 나누기condivisione’에서 ‘함께con’ 하는 것이 사실은 ‘나누기divisione’이기 때문이다. --- p.280 실체와 주체에만 주목하는 공동체 개념에는 ‘함께’라는 요소가 빠져 있다. 그런 식으로 ‘함께’는 본연의 의미를 잃은 상태에서 항상 어떤 정체나 특성으로만 이해된다. 『코무니타스」의 의미심장한 서문 제목 ‘공통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공동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의 상실이다. 이 말은 우리가 공동체의 공통점으로 간주하는 요소들이 사실은 공통점이 아니라 오히려 허무에 - 명분, 이상, 추상적 가치나 목표에 -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 p.312 |
에스포지토가 ‘커뮤니티’ 개념을 탈-구축하며 제시하는 전제는 문자 그대로 파격적이다. 우리가 흔히 공동체의 특징으로 간주하는 요소들, 예를 들어 ‘민족’ 공동체, ‘문화’ 공동체 같은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요소들은 공통점이라기보다는 공동체 ‘고유의’, ‘유일한’, ‘특이한’ 특징들이다. 저자에 따르면 공동체는 오히려 이러한 공통점이 조금도 없을 때에만 성립된다. 정확하게는 모든 구성원의 동일한 차이점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것이 공동체다. 동일한 의무사항, 동일한 한계, 동일한 모순, 동일한 병을 -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는 이에 대한 면역을 꾀하면서 - 구심점으로 모이는 것이 공동체다.
『코무니타스』는 『임무니타스』와 『비오스』를 포함하는 삼부작의 첫 번째 저서다. 공동체에 관한 기존의 해석적 관점들을 남김없이 해체하고 공동체의 근원적인 의미를 복원한 정치철학자 에스포지토의 혁신적인 탈구축 작업에서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공동체가 ‘나’와 ‘우리’의 고국도, 어떤 유형의 소유물도, 무언가로 꽉 채워졌거나 채워야 할 공간도, 지켜야 할 영토나 자산도 아니며 오히려 허무에, 선사의 의무에, ‘타자들’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에스포지토는 홉스, 루소, 칸트, 하이데거, 바타유의 공동체 개념을 해부하고 공동체를 설명하는 정치철학적인 어휘의 허점들을 도려내며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한 뒤 어떤 수식어로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 순수한 역학적 원리로서의 ‘함께’라는 인간 공동체의 심장을 근원적인 형태로 소생시킨다. 이 고귀한 심장은 순수한 관계의 차원을 뛰어넘어 개개인의 참여를 조건으로, 동시에 개개인의 생존 조건으로 박동한다. 참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고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역동성을 에스포지토는 공동체의 어원적 의미에서 발견한다. 공동체를 뜻하는 라틴어 코무니타스는 ‘함께’를 뜻하는 ‘쿰cum’과 ‘선사의 의무’를 뜻하는 ‘무누스munus’의 합성어다. 이는 곧 공동체가 본질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근원적인 의무 혹은 갚아야 할 빚을 공유하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은 근원적일 뿐 왜곡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왜냐하면 의무에서 벗어나는 면역화, 고유화, 체화라는 형태로 전개되는 임무니타스의 원리가 코무니타스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왜 공동체가 공존과 상호 의존이라는 형태로만 발전하지 않고 오히려 의무를 권리와 특혜로 바꾸면서 결국에는 누군가의 희생을 수반하는 형태로 발전해왔는지 설명해준다. 이러한 성향은 공동체 내부의 일화로 그치지 않고 - 근대를 기점으로 - 공동체 자체의 본질적인 구조로 확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에스포지토가 분석의 기점으로 삼는 홉스의 관점, 즉 모두의 희생을 전제로 구축되는 홉스의 국가 체계다. 홉스가 이처럼 전적으로 부정적인 차원의 전제를 내세울 때, 개개인은 이러한 전제가 배가되거나 증폭된 형태의 리바이어던과 절대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할 뿐 또 다른 공동체 구성원과의 모든 관계를, 궁극적으로는 ‘함께’를 상실한다. 하지만 홉스에 반대했던 루소도 이러한 측면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전복시키기 때문에 결을 달리할 뿐 여전히 문제적인 공동체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루소는 개인의 위상을 강조하지만 공동체 일원으로서 고유의 특성이 모두 사라진 개인을 꿈꾸기 때문에 ‘나’와 ‘타자’의 구분조차 불가능해지는, 결과적으로는 ‘함께’의 관계성 자체가 일체화 속에서 사라지는 공동체 개념을 구축한다. 이처럼 홉스와 루소의 비교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이율배반적인 관계에 주목한 에스포지토는 낭시의 순수한 관계로서의 ‘함께’에 동의하면서도 관계의 추상적인 차원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함께’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함께’의 내용은 허무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사실상 어떤 공통점도 지니지 않지만 이 사실만큼은 공유한다. 왜냐하면 ‘함께’는 ‘나’를 구축하는 원천이자 ‘나’의 생존에 필요한 터전인 동시에 개인이 면역화, 고유화, 사유화를 시도하며 결과적으로 ‘함께’ 자체의 파괴를 시도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사실상 더 큰 개인으로 간주해야 할 특수 공동체와 외부세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에스포지토가 추적하는 이러한 역학 관계는 코무니타스와 임무니타스의 변증관계로 귀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