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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少年
1908년 최남선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월간 잡지 전4권, 양장
최남선
한국학자료원 20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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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권 - 1908.11 ∼ 1909.04
제2권 - 1909.05 ∼ 1909.11
제3권 - 1910.01 ∼ 1909.05
제4권 - 1910.06 ∼ 1911.05

저자 소개 1

崔南善, 육당六堂, 공육公六,

1890년 4월 26일 서울 출생. 본관은 동주(東州 : 철원). 자(字)는 공육(公六), 호는 육당(六堂). 일제강점기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 『금강예찬』 등을 저술한 문인. 언론인이자 사학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유학 후 『소년』 등 잡지를 발행하고 저술을 통해 신문화운동을 벌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획했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에 참여했고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문화 뿌리가 같다는 ‘문화동원론’을 주장하며 일본 신도 보급, 학병지원 권유 등 친일활동에 적극 나섰다
1890년 4월 26일 서울 출생. 본관은 동주(東州 : 철원). 자(字)는 공육(公六), 호는 육당(六堂). 일제강점기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 『금강예찬』 등을 저술한 문인. 언론인이자 사학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일본 유학 후 『소년』 등 잡지를 발행하고 저술을 통해 신문화운동을 벌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획했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에 참여했고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문화 뿌리가 같다는 ‘문화동원론’을 주장하며 일본 신도 보급, 학병지원 권유 등 친일활동에 적극 나섰다. 한국 개화기 인문학의 선구자요, 신문화운동의 개척자로 출판사 ‘신문관(新文館)’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수많은 서양의 고전 명작들과 한국의 고전들을 번역 소개하는 등 출판문화로 ‘문장구국(文章救國)’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1908년 근대 종합잡지의 효시인 [소년]을 창간했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으며, 이후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 [청춘] [새별] 등 많은 잡지를 발간했다. 1919년 3.1운동에 주동으로 참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민족대표 47인 중의 1인으로 체포,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한국역사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43년 11월에는 일본 동경에서 학도병 지원 연설에 나오는 등 일제에 협력했다. 1949년 2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친일행위에 대한 해명과 속죄를 담은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했다. 1957년 10월 10일 [한국역사사전]을 집필하던 중 68세로 작고했다.
* [백팔번뇌(百八煩惱)](1926, 근대 이후 최초의 창작시조집), [단군론](1926),[시조유취(時調類聚)](1928), [심춘순례(尋春巡禮)](1925),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1925), [금강예찬(金剛禮讚)](1926), [풍악유기(楓嶽遊記)](1926), [백두산근참기](1926), [아시조선(兒時朝鮮)](1927), [삼국유사해제](1927),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1927, 북방 샤머니즘 해설서),[육당최남선 전집] 15권(1973), [고사통(故事通)](1943), [조선상식문답](1947), [국민조선역사](1945), [역사일감(歷史日鑑)](1947)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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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20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1680쪽 | 188*265*80mm
ISBN13
9791168872271

출판사 리뷰

최남선이 1906년 재차 일본에 유학,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지력과(地歷科)에 적을 두고 있었을 때에 학생 모의국회의 토의안건이 문제가 되어 조선학생 70여 명이 동맹퇴학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당시 19세의 최남선은 남은 학비로 인쇄기구를 구입, 귀국하여 이 잡지를 간행하였다.“우리 대한으로 하여금 소년의 나라로 하라. 그리하랴 하면 능히 이 책임을 감당하도록 그를 교도하여라.”(창간호)라는 발간취지를 내세우고 처음에는 혼자서 집필과 편집, 발창간호의 독자는 6명, 2호 14명, 8·9호까지 30명, 1년이 지나서 200명을 넘지 못하였다.

3권 2호부터 비로소 개인 잡지의 성격을 벗어나 이광수(李光洙)·홍명희(洪命熹)가 글로 가담하였고 8호에 이르러서 발매금지와 정간을 당하였다. 3개월 만에 해금(解禁)되어 1910년 12월 3권 9호로 속간되고, 1911년 1월에 4권 1호, 4개월 만인 1911년 5월에 4권 2호(통권 23호)로 다시 발행정지를 당하였다.「편집실 통기(通寄)」(창간호)에 “본지는 어디까지든지 우리 소년에게 강건(剛健)하고, 견실하고 궁통(窮通)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고로 결코 연약(軟弱)·나태·의지(依持)·허위의 마음을 자극할 듯한 문자는 조금도 내지 아니할 터이오. 그러나 미적 사상과 심신훈도(心神薰陶)에 유조(有助)할 것이면 경뢰(輕賴)한 것이라도 조금조금 게재하겠소.”라고 편집 방침과 그 성격을 밝히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소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계몽에 중점을 두고 엮어졌다.

특히 최초의 신체시(新體詩)인 「海에게서 少年에게」(창간호)를 게재하는 등 신문학 초창기에 남긴 문학사적 공헌도 지대한 바 있다 할 것이니, 『청춘(靑春)』과 더불어 『창조(創造)』·『폐허(廢墟)』·『백조(白潮)』 등 순문예동인지가 나오기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의 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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