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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Ⅰ. 떠남으로 위안 받는 삶 #1 빈자의 교회를 위한 빈자의 카메라 #2 노마드의 사치 #3 기다려야 하는 시간 #4 길 위에서 만난 인연 Ⅱ.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을 자유 #5 야심찬 수도자들 #6 길은 또 다른 길로 이끄는 이정표 #7 위대한 자연과 미천한 인간 #8 멀리서 바라보기 Ⅲ. 같은 시간을 함께한다는 것 #9 영원한 것은 없다는 영원한 진실 #10 옛이야기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11 하찮은 만남이란 없다 #12 죽은 자들의 도시 Ⅳ. 모든 순간은 유일하다 #13 사막에 내리는 눈 #14 만남 그리고 헤어짐 #15 변해간다는 것 #16 봄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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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는 매해 겨울이 마지막이기를 소망했지만 올해로 벌써 7년째 맞이하는 에르미타의 겨울이었다. 그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지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만을 골라 여행했고,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거렸다. --- p.22 “우리가 묵을 호텔은 별 하나짜리도, 별 다섯 개짜리 호텔도 아니야. 밤하늘이 가득 채워지는 밀리언 스타 호텔이야.” 바로 에르미타 익스프레스, 그의 노란 르노 승합차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 p.35 벌써 며칠째인지, 계속해서 파란 하늘이 사진사 세바스티안을 당혹스럽게 했다. 햇살 가득 쨍한 하늘이 그를 당분간 실업자로 놓아둘 생각인가보았다. 파란 하늘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풍경을 자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세바스티안은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내 사진 속에서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세계와 뚝 떨어져 살고자 했던 당시 에르미타 사람들의 감정이 푸른 하늘처럼 화려했을 거라고 생각해? 작고 초라한 에르미타 안에서 느꼈을 그들의 외로움은 밝고 파란 하늘에서는 묻어나지 않아.” --- p.65 “올해에는 꼭 성공을 해야 할 텐데 말이지…….” 잔뜩 상기된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마블링처럼 얽혀 있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빛이었고 붉은 흙과 풀이 돋은 땅도 눈에 덮여 있어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마을의 좁은 길을 지나 언덕을 돌자 멀리 에르미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에르미타의 모습이 50미터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찍을 수 있을까? --- p.40~41 날이 밝았다. 커튼을 열고 밖을 보니 산속은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의 밝은 날씨를 보상이라도 하듯 날은 온통 찌푸려 있었다. 세바스티안이 승합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쉿!” 세바스티안이 손을 들어 나를 막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 그만 우뚝 멈추었다. 문 앞에 늑대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늑대와 눈을 맞추었다. 늑대는 숲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몇 걸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내 늑대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 p.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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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찾을 수 있지만 아무나 닿을 수 없는 곳
“에르미타를 만나고 돌아왔으니 진정한 안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 이 모든 쓸쓸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 “에르미타(Ermita)”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의 이름이다. 비단 종교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을 등지고자 했던 사람들, 나그네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해 잠시 머물며 다음 여정을 마음에 새기던 곳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는 바로 이 에르미타에 매료되어 7년째 에르미타를 찍어온 벨기에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tyser)와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작가 지은경이 에르미타를 찾아 스페인 북부에서 보낸 4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 또한 긴 시간을 차로 달리고 눈 쌓인 숲을 헤쳐가며 찾아낸 에르미타, 피레네 산맥의 광활한 자연, 그 사이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 동물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모든 이야기다. 그 이름부터 생소한 에르미타가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되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대표되던 스페인 여행에 또 하나의 화두가 던져진 셈이다. 에르미타는 보통 종교적인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종교와는 관계가 먼 여행자들이나 세상에서 멀어지고자 했던 이들에 의해 세워진 에르미타도 있다. 그런 만큼 깊은 산속, 계곡이나 아찔한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찾아가는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한두 명이 들어가 겨우 생활할 정도로 아담하고 소박한 이 건축물을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을 차로 달리고 가뿐한 몸만으로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이다.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에르미타가 가진 근원적인 이미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핀홀 카메라만으로 에르미타를 촬영했다. 핀홀 카메라는 일명 바늘구멍 사진기로 불리는 가장 원시적인 카메라인데, 오랜 시간 노출해서 찍은 사진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에르미타의 외롭고 소박한 이미지를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지은경은 에르미타로 가는 여정, 사진작가의 작업 과정 등을 꼼꼼히 기록하는 한편 오랜 시간 묵묵히 자연 속에 몸을 내맡겨온 에르미타를 통해 삶의 한 단면을 전해주며, 여행 뒤 얻은 휴식과 진정한 안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에는 각 장의 앞머리에 핀홀 카메라로 촬영한 에르미타를 소개했고 이 에르미타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함께 첨부되어 있다. 인생의 어느 곳에서 단 한 번 스페인이 건네는 순결한 위로, 에르미타를 만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 특별한 여행은 노란 승합차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에 필요한 모든 짐을 싣고 혹독한 겨울의 피레네 산맥을 달리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낮에는 눈길을 달리고, 사진 장비를 챙겨 산을 올라 에르미타를 촬영한다. 올리브오일에 담근 구운 채소와 달걀 프라이, 있는 재료로 뚝딱 만든 스파게티로 끼니를 삼고, 밤이면 잠을 청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 차를 세우고 하늘의 별 아래에서 잠이 든다. 다음 날이면 새벽 첫 빛을 받으며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다시 떠난다. 이 모든 불편함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이 여행이 오직 에르미타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고백한다. 세바스티안 슈티제는 작은 보석을 찾아내듯 에르미타의 흔적을 따라 여행했다. 특히 그는 로마네스크와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이슬람 세력의 영향을 받은 모자라빅(Mozarabic) 양식의 에르미타만을 찾아 스페인 북부를 넘나들었고, 7년의 겨울 동안 총 575채의 에르미타를 핀홀 카메라로 촬영했다. 에르미타의 쓸쓸함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일부러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만을 골라 여행한 것은 물론이다. 험난한 여행에서의 선물 같은 순간은 바로 스페인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날 때다. 마을에 달랑 셋이 남아 오순도순 살아가는 노인들, 에르미타를 지키던 신부, 안개 사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말과 사슴, 노란 가슴을 한 새와 밤잠을 깨우던 멧돼지 그리고 어느 새벽 눈을 맞춘 늑대 한 마리와의 마주침. 거대한 자연 앞에서 서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한 모든 생명들과의 인연은 이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한다. 스페인 피레네 산맥의 광활한 자연 앞에서 저자는 삶에 대해 깊이 사색하며, 그 흔적이 여정을 따라 이어진다. 고된 여행이 끝난 뒤에 변해 있을 자신의 모습에 대해 기대하기도 하고, 세상을 관망하듯 깊은 산속에 홀로 선 에르미타를 바라보며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인생과 이 모든 고민을 안고 에르미타를 맞닥뜨린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기도 한다. 한눈에 모두 채울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과 그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지만 여행이 끝날 무렵 해답을 얻는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여행이 내게 많은 것들을 남겨주고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난한 사진가의 여행을 쫓아다니는 동안 스페인의 거대한 자연을 만났다. 그 속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아찔한 순간들을 만났다. 삶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과 동물들을 만났다. 모든 만남 뒤에 오는 영원한 헤어짐을 겼었다. 이제는 오랜 시간 속에 묻혀 있던 에르미타들을 들추며 진정한 안식을 얻고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다.” _ 프롤로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