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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독일 곳곳에 내재한 매혹들
빛이 된 종이 오래된 호텔 베를린의 미스 도시의 단서: 아티스트 최선아 바우하우스의 하룻밤 슈피너라이와 네오 램프를 찾아서 낭만적 공장 풍경 부퍼탈의 숲 회화라는 아득한 사유: 아티스트 샌 정 렘브루크라는 이름 시골 콜링 유토피아를 들춰내는 남자 예술이 점유한 천년의 성 하루짜리 함부르크 하릴없는 날의 소요 그로피우스의 방 수필이 되는 밤 쾰른을 걷다: 건축가 이은영 인젤 홈브로이히 알테 피나코테크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빌라 폰 슈투크 조각 속을 거닐다 피아니스트의 도시: 피아니스트 김선욱 보트로프의 요제프 알베르스 마케의 얼굴 코로나 시대의 여행법 십 년 전 하루의 다음 날 같은: 아티스트 천경우 DIREC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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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커다란 편견과 달리,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다채로운 미학이 독일 곳곳에 흩어져 있음을 오랫동안 독일을 여행하며 깨달았다. (…) 이 책은 수년간의 독일 여행을 정리하며 내게 사적인 울림을 주었던 공간과 사람, 예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누구에게든 독일에 덧씌워진 편견의 꺼풀을 걷어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p.6 복도 한쪽에 걸린 족자는 지어진 지 백 년이 넘은 알트바우에서 새로운 미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적인 요소가 곳곳에 은유적으로 배어 있어서인지 주방에 놓인 덴마크의 그릇장마저 조선 시대의 목가구로 보일 정도였다. --- p.11 한옆에는 선이 고불고불 감긴 유선 전화기가 놓여 있고, 천장에는 그윽한 샹들리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런 방에서는 잠이 올 리 없다. 오래된 것들에 둘러싸여서 느끼는 이 특별한 기분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뒤척인 밤은 그렇게 길었다. --- p.20 실제로 이 호젓한 거리가 품은 풍경은 모든 탁월한 것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무엇이든 해도 좋을 아침이라면, 무엇이든 안 해도 되는 즐거움이 더욱 커진다. --- p.21 늦은 밤, 작가의 아파트를 나와 홀로 걸었다. 거대한 거리에 비해 너무 작고 어두운 가로등 불빛, 옛 동독 건물들의 웅장한 실루엣, 조금 전까지 나누었던 은밀한 대화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그 순간이 완전무결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 p.35 집요하게 뜯어보면 볼수록, 게다가 모든 것들이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할수록 하나하나가 놀라운 ‘모던의 상징물’로 다가왔다. 오늘의 우리가 ‘디자인’이라 부르는 것의 집약된 원형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책 속의 한 문장 같은 생각이 스쳐갔다. --- p.42 슈피너라이를 걷다 보면 기이한 시각적,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간을 머금은 축축한 벽돌 건물들의 비현실적인 규모, 이름 모를 아티스트가 남긴 터프한 그라피티들, 어디론가 신호를 보내는 듯한 옛 파이프라인과 회로들…. 버려진 공장 풍경의 멜랑콜리가 온몸을 엄습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아름다움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을 호명하는 듯한 이런 산업적 풍경이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종류의 미감이다. --- p.52 결국, 운명처럼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그토록 찾던 램프를 갖게 됐다. 딜러인 마틴은 이렇게 좋은 컨디션의 ‘사르파티 566’ 모델을 갖게 된 건 행운이라고 말했다. 에어캡으로 몇 번이나 꼼꼼하게 감싸서 내 손에 들려 비행기에 오른 조명은 지금도 우리 집 작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밤을 밝혀주고 있다. --- p.59 시간은 재빨리 저물었다. 먼 길을 다시 떠나야 하지만 예술이 점유한 이 초월적인 영지는 계속해서 나를 매혹하며, 발길을 붙잡았다. 지나왔던 방을 다시 되돌아 나가는데,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창밖의 나무들과 허물어져 가는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내 안의 어디에선가 떠오르는 레비나스의 문장을 힘껏 끌어안았다. “여기에는 환대가 있고, 기대가 있고, 인간적인 영접이 있다.” --- p.111 그녀와 보낸 며칠은 예술의 도시 뮌헨이 아니라 그 이면의 일상적인 뮌헨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바깥을 기웃거리며 궁금해하기보다 자신에게서 발현되는 창조적인 욕구를 진솔하게 표현하는 그녀. 이웃과 소소한 유대를 이어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는 일상.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삶을 내 친구 소니아가 이곳 뮌헨에서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 p.185 슈투크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꿈틀대었을 모든 장식, 표현, 상상과 의지가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구현된 유일무이한 집. 여기서만큼은 ‘기계로서의 집’이라는 모더니즘의 거대한 강령도 무력해진다. 불가능은 없다는 듯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우주. 당대의 미감이 최대치로 응축된 빌라 폰 슈투크는 한 예술가의 집요한 욕망으로 완성된 서사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93 이상한 공백이 전시장을 메우고 있다. 더 밝은 초록색, 더 어두운 초록색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중첩되는 사이, 내 눈은 착시와 후퇴를 반복한다. 네 개의 사각형과 네 종류의 초록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다가 다시 멀어지며 무한한 감각의 소용돌이가 된다. 마침 창문으로 균일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캔버스는 신성한 제단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 p.213 그가 남긴 것과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 사이에서 많은 이야기가 솟아난다. 마음속에 복잡한 형상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가운데서도 눈앞에서 보는 그의 그림은 너무나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본능적이다. 마케의 자화상은 삶과 죽음의 완성, 꿈과 연민의 표상이 아닐까. 내게 새겨진 가장 완전무결한 예술가의 얼굴, 그가 자꾸만 떠오르는 이유다. --- p.220 오는 줄도 모르게 4월이 왔다. 겨울에 시작한 여정이 어느덧 여기까지 이어졌다. 여행자인 내게 시간 개념은 대개 하루 단위다. 어제는 돌아볼 겨를이 없고, 내일은 계획할 여력이 없다. 오로지 오늘의 일정에 최대치의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부어 24시간을 완수한다. --- p.224 언젠가부터 싹튼 독일에 대한 애정으로 빈번히 긴 독일 여행을 감행하는 나에게 독일에 대한 천경우의 단상은 알게 모르게 영감의 씨앗이 되곤 했다. 수개월, 길게는 몇 년 만에 그를 만날 때면 그간 진행한 작업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그사이 다녀온 서로의 독일 방문기가 안부처럼 오갔다. --- p.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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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여행하는 가장 예술적인 방법
한편 이 책은 유럽을 여행하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예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면 그녀의 여행법은 더욱 솔깃할 것이다. 저자는 빈티지한 가구나 조명에 애착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사 모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을 사로잡는 제품은 기필코 손에 넣고야 마는 집요함을 보일 때도 있다. 특히 램프가 그렇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노 사르파티의 No.566 램프를 쾰른에서 발견하고 가게 주인을 만나기 위해 하루 반나절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가게 주인 마틴과는 오리지널 램프를 찾아내는 여정에서 친구가 된다. 디자인 가구 갤러리를 운영하는 울리히 피들러와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의 디자인에 담겨 있는 유토피아적 의지를 사랑하며, 스스로 가구 탐정임을 자처하는 그와의 만남은 모던의 시대를 한껏 탐구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공간의 미학에 매료되는 저자에게 하룻밤 묵어가는 숙소는 더없이 중요하다. 193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여배우가 살던 집을 개조한 ‘펜션 풍크’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진면목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다. 데사우 바우하우스의 기숙사를 스테이로 개조한 공간에는 가구와 램프, 침대, 패브릭 등 그 옛날 바우하우스 학생들이 사용하던 제품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아련한 감흥을 전달한다. 편리성보다 미학에 방점을 둔 스테이 선택! 여행을 수필처럼 만드는 매력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한 장의 사진이 자극제가 되어 예전에는 몰랐던 생소한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에서 발견한 렘브루크라는 이름을 좇아 뒤스부르크의 뮤지엄을 찾아간 경우가 그렇다. 헤르만 로자 아틀리에를 발견하는 여정도 마찬가지다. 미술사 책에도 등장하지 않는 아티스트를 만나기 위해, 하나의 단서만 가지고 홀연히 떠나는 일은 순탄히 흘러가는 여행에서 때로 자극적인 ‘탐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언제부턴가 여행의 예측 불가능성을 끌어안게 되었다. (…) 꿋꿋했던 방문 계획은 모두 무산되었지만, 대신에 나는 바트 고데스베르크라는 라인 강변의 호젓한 동네와 안락한 도피처로 제격인 드레젠이라는 느긋한 호텔에서 며칠을 부유하지 않았나. 나를 주저앉히지 않았다면, 내 세계에 들어오지 못했을 이름과 공간과 시간들….” 이처럼 독일 곳곳에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원형과 충돌적인 현대예술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들의 감성에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미감이 잔잔히 깔려 있다. 여전히 괴테와 실러의 문학을 사랑하고 슈만과 브람스의 음악을 즐겨 듣는 이들. 아픈 역사를 간직한 만큼 예술에 수용적이고 진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 독일. 책을 읽고 나면 저자가 매번 독일로 여행하는 이유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