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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동쪽 바다 묵호!
2. 묵호성당으로 오기까지(간추린 생애)-Ⅰ 3. 묵호성당으로 오기까지(신학교 생활)-Ⅱ 4. 묵호항이 눈앞에 보이는 성당에서 5. 신자들과 함께 5. 1950년 6월 25일, 그리고 그 후 7. 만우리 골짜기로 향하다 8. 골방 생활-Ⅰ 9. 골방 생활-Ⅱ 10. 붙잡히다 11. 조리돌림을 당하다 12. 고난의 길, 그리고 순교 13. 가매장되다 14. 가묘를 쓰다 15. 성직자 묘역에 안치되다 16. 아하, 여기구나! |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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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마련한 최창환(요셉, 묵호 축항사무소 근무)과 신자들은 그에게 함께 부산으로 피난 갈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그러나 라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갈 수 없습니다.” 라고 그들의 제의를 뿌리쳤다. ---「1950년 6월 25일, 그리고 그 후」중에서 묵호에서 16km쯤 걸었을까, 밤재가 저만치 보였다. 라 파트리치오 신부는 그동안 골방 생활로 쇠진해 있었고 공산군들의 취조에 시달려 지친 상태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는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또 쓰러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공산군들은 라 신부가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그에게 심한 매질을 했다. 라 신부는 밧줄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손으로 성호를 그을 수만 있다면….’ 그는 가슴으로 성호를 그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그때였다. 공산군들은 라 신부와 다른 포로 둘을 일렬로 세웠다. 그러고 나서 총을 겨누었다. 그곳은 밤재굴 남쪽으로 약 200m쯤 떨어진 골짜기(순교터, 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47-3)였다. ‘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총알은 라 신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1950년 8월 29일(음력 7월 16일), 라 신부의 나이 35세 때였다. ---「고난의 길, 그리고 순교」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