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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4
1부 봄은 왔지만 9 2부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37 3부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121 부록 제주4·3항쟁 연표 174 제주 4·3 희생자 마을별 분포지도 183 참고문헌 184 노무현 대통령 사과문 186 추천사 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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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사건 9일 후인 3월 10일부터 3월 22일까지 제주도민들은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인다.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제주도 전체직장 95%가 연계한 대규모 총파업이었다. 미군정 통역관도 참여했고, 제주 경찰 50여 명은 사표까지 내면서 파업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고, 시장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다. 밭일도 바다 일도 모두 멈추고 생계를 포기하면서까지 3·1사건에서 벌어진 경찰의 발포와 강경진압에 항의했다. 파업은 평화적이었다. 가족들은 감자를 쪄서 나눠먹으며 평화로운 밥상을 나눴다. 사람들은 노동을 멈추고 마침내 세상을 멈추었다. 멈춘 세상에 구호가 쩌렁거렸다. “발포책임자 처벌하라!” “경찰의 무장 해제 및 고문 폐지하라!” “희생자에 대해 보상하라!” 민심이 들끓고 있었지만 경찰도, 미군정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주도민들을 더욱 강하게 옭아맬 명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을 연행하기 시작해 이듬해 4·3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여 명을 잡아들였다. 불만은 점점 더 임계점을 향해 끓어올랐다.
---「3·10 총파업」중에서 당시 제주사람들은 4·3을 경찰과 제주사람 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젊은 사람만 보이면 개 패듯 폭력을 휘둘렀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그 폭력을 피해 산에 올랐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은 무장대를 폭도라 부르는 대신 ‘산사람’이라고 불렀다. 먹을 것도 가져다주고, 산 아래 사정을 알려주기도 했다. 4·3은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열망의 표출이었고, 반으로 쪼개지지 않고 온전한 통일국가에서 살고 싶은 제주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횃불을 들다」중에서 언제부턴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말이 떠돌았다. “매에는 장사가 어서(없어). 고문을 당허민 아무 이름이라도 불수밖에 어서(없어)….” 토벌대의 총부리만큼 무서운 게 손가락 총이었다.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만 하면 살 수 있었다. 빨갱이 누명을 쓰는 이들이 늘어갔다. 누군가의 손가락 끝에서 생(生)과 사(死)가 갈렸다. 사람들은 거짓인 줄 알았지만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귀를 닫아야 했고, 눈을 감아야 했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이름 빼앗기지 마라」중에서 이승만 정권이 여수·순천과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한 건 1948년 10월과 11월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계엄법은 그보다 1년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 공포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법도 없는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가며 국민들을 대량 살상한 것이다. 반헌법행위였고 엄연한 반역행위였다. 여순항쟁 이후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정책을 실시했다.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생들에게도 반공교육과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계엄령은 초토화작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토벌대는 ‘삼진작전(三盡作 戰)’이란 말을 앞세우고 대대적인 무력 진압에 들어갔다. ‘삼광작전(三光 作戰)’이라고도 불리는 삼진작전은 태워서 없애고, 굶겨서 없애고, 보이는 대로 죽여 없앤다는 것으로 일본이 중국전선에서 행했던 악명 높은 작전이었다. 수법이 너무 잔인하여 국제법으로 금한 군사작전이었다. 하지만 토벌대는 제주도 ‘빨갱이’들의 은거지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초토화작전’을 금지한 국제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반인도적인 삼진작전을 광범위하게 실행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유죄!」중에서 경찰과 군인으로 구성된 토벌대의 만행은 끝이 없었다.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표선마을로 소개되어 간 주민들은 ‘당케’ 부근 백사장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진압군은 총살을 하면서 주민들은 물론 죽어가는 이의 가족까지 세워놓고 ‘만세!’를 외치고 박수를 치게 했다. 4·3 이전까지 3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가시리에서 무려 5백여 명의 양민이 희생됐다. 어느 집 하나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가는 이렇게 제주섬을 학살했다. 희생의 87%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졌다. ---「표선면 가시리」중에서 오늘 날 제주를 찾는 여행객들에게는 꼭 들러야 할 관광 1번지지만 성산포 사람들에게 터진목은 끔찍한 한이 맺힌 슬픔의 장소다. 4·3 당시 성산읍에서 467명의 주민이 희생됐는데 터진목에서만 200여 명이 희생됐다. 성산면 온평마을에 살던 정씨 부인이 토벌대에 잡혀왔다. 일본으로 도망간 남편을 둔 죄였다. 그녀는 곧 출산을 앞둔 만삭의 몸이었고, 이미 진통도 시작된 참이었다. 토벌대는 그런 정씨 부인을 성폭행했다. 빨갱이의 자식을 가졌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랐다. 만삭의 배에서 쏟아져 나온 태아와 엄마는 다른 처형자들과 함께 성산포 터진목에 버려졌다. 그때까지도 정씨 부인은 숨이 붙어 있었다. 토벌대는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무더운 여름철 모래벌에 버려진 시신들 사이로 보라색 ‘순비기 꽃’이 피어나 죽음의 냄새를 감쌌다. 성산읍 4·3희생자유족회는 2010년 터진목 초입에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467위의 이름을 마을별로 새겨놓았다. ---「성산포 터진목」중에서 4·3 당시 정방폭포가 있던 서귀리는 한라산 이남 지방의 중심지였다. 2연대 1대대가 주둔했고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의 사무실도 있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정방폭포에서만 248명이 즉결 처형됐다. 지독히도 잔인한 죽음이었다. 사람들의 손과 손을 굴비 엮듯 묶어 총을 쏘아 죽이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인 후 아득한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 당시 그 모습을 지켜봤던 증언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희생자 중 100여 구의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파도에 쓸려 가버려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근에서 물질하던 잠녀들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폭포 앞 해초 사이로 사람의 뼈 같은 게 발견됐다며 울음 섞인 증언을 했다.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중에서 합수사(합동수사본부) 지하실에서 나는 한 마리의 똥개나 다름없었다. 온몸을 잉크빛으로 검푸르게 멍들게 한 그 가혹한 매질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놀란 새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만약 그 모진 매질의 고문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곧 경쾌하게 4·3 소재를 떠나 순수문학의 지경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온몸의 근육 세포들이 아직도 소름 끼치게 기억하고 있는 그 무서운 고통, 그 잉크빛 피멍은 보름 만에 사라졌지만, 정신적 상처는 지금도 생생히 살아있어 나를 계속 피해의식의 늪 속에 가두어놓으려고 한다. ---「‘순이삼촌’ 현기영의 고백」중에서 예부터 제주를 도둑과 거지, 대문이 없어 삼무라 했다. 도둑이 없다는 것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의미요, 거지가 없다는 것은 부지런하고 자립적인 생활양식을 뜻하며, 대문이 없다는 것은 이웃을 신뢰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였다. 7년 7개월이나 계속된 4·3이 끝나고 폐허가 된 제주섬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다시 재건할 수 있었던 것도 제주사람이면 누구나 함께라는궨 당 공동체정신의 힘이 아니었을까…. ---「제주이야기 4: 제주의 힘, 제주공동체」중에서 누군가는 이념을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누군가는 이승만 타도를 외쳤고, 누군가는 조국통일을 외쳤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싸웠다. 나라가 반토막 나는 것을 반대하고 통일을 외친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할 수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무엇을 위해 싸웠나」중에서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4·3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 최초의 사과였다. 3년 후인 2006년 4월 3일, 역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4·3 위령제에 참석했다. 얼어붙은 제주도민들의 마음에 한자락 봄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사과」중에서 이수진의 보리아트 작품은 그렇게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마을의 존재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작품의 소재가 ‘잃어버린 마을’의 집터에서 자란 보리줄기(보릿대 혹은 보리짚)들이라는 것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사라진 인간들의 혼이 그 보리줄기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작가는 그 작품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보리는 사라진 그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식량이었다. 그 사람들은 4·3 이전에는 강제 보리공출에 시달렸고, 4·3 당시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를 뒤로 하고 산에 올라가야 했다. 이삭을 털어낸 보리줄기는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였고, 그걸로 패랭이를 엮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치를 키우는 케이지를 엮고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그러나 그때 그 인간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케이지를 엮고 보리피리를 만들던 아이들도 사라지고 없다. 그러므로 이수진의 4·3 보리아트는 지금은 사라진 그 사람들, 그 아이들을 오늘에 불러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추천의 말, 현기영(소설가)」중에서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척박한 여건 속에서 끈질기게 일궈낸 4·3의 진실규명 작업을 바탕으로, 4·3을 다뤘던 이전의 어떤 책보다도 더 생생하고 일목요연하게, 대중적인 화법으로 4·3의 원인과 전개, 참혹한 결말과 그 이후 진실규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빼어난 글과 그림으로 전달한다. 나는 이 책이 4·3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널리,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먼저, 제주 올레길을 걷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이 책을 읽은 후 이제 눈앞의 모든 풍경이 달리 보일 것이다. 광치기해안의 터진목과 소낭머리와 섯알오름과 너븐숭이가 그저 아름다운 숲과 오름, 정겨운 마을길로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작가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리라. 또 나는 이 책이 우리나라 초·중·고·대학생들에게 반드시 읽히는 필독서가 되기를 바란다.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청년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제주 출신 동급생 친구에게 ‘빨갱이’라고 놀리는 일은 없을 테다. 설령 그랬더라도 뒤늦게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추천의 말, 서명숙(제주올레 이사장)」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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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진의 4·3 보리미술은 지금은 사라진 4·3 희생자들을 오늘에 불러내 진실을 세우려는 작업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제 제주의 모든 풍경이 달리 보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모든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그래픽 다큐멘터리로 살피는 4·3 2023년은 ‘제주 4·3’이 75주년이 되는 해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4·3 당시에 자행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48년 4월 3일 첫 봉기의 순간으로부터 75년의 세월이 흐르고, 또 국가원수가 명백한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20년이 지났어도 4·3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4·3은 아직 제대로 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하다. 누구는 사건이라 하고 누구는 항쟁이라 한다. 4·3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의 성격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그 희생과 피해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지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4·3의 진실을 전하고,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들을 살피는 책이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그래픽 노블’처럼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보리줄기를 사용해 만든 그림에 4·3의 결정적인 순간들과 비극적 운명의 사람들을 소개하는 ‘그래픽 다큐멘터리’다. 이수진 작가가 보리미술로 탄생시킨 그림들은 4·3 당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마을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불러내 진실의 목소리로 위로한다. 이수진 작가가 소재로 사용하는 보리줄기는 4·3 때 폐허가 돼 끝내 재건되지 않은 마을들의 옛 터에서 자란 것들이다. 작가는 사라진 사람들의 혼이 그 보리줄기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가 품고 있는, 반세기 이상 국가가 숨기고 억눌러온 폭력과 야만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 제주는 오래도록 변방의 섬으로 역사의 주 무대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해방 후 이념 전쟁에 휘말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주 4·3’으로 적게 잡아도 당시 제주도 전체인구 10분의 1을 넘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9만 명에 이르는 제주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그 와중에 살아남은 이들과 그 가족들은 수십 년 세월 동안 ‘빨갱이’ ‘폭도’ ‘반역자’라는 낙인과 연좌제 등 불명예와 부당함을 참고 견뎌야만 했다. 제주에는 ‘속솜허라’라는 말이 있다. 뭍의 표준어로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라는 말이다. 수십 년 세월 동안 4·3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여 4·3과 같은 국가폭력이 또다시 자행될까 두려워 ‘속솜허라’ ‘속솜허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 동안 국가가 강요하는 침묵 속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결국 누군가들은 끊임없이 진실을 찾아 발굴하고 그 이야기들을 다시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주려 했다. 많은 제주사람들이 ‘속솜허라’에 갇히지 않고 세상에 4·3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 역시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다. ‘틀낭’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 많이 자라는 산딸나무를 부르는 제주 말이다. 제주 곳곳에 산딸나무가 많다. 제주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산딸나무 열매를 많이 먹으며 큰다. 4·3 당시 산으로 피신 간 사람들도 허기를 덜기 위해 산딸나무 열매를 먹었다. 산딸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십자가를 만든 나무이고, 또 꽃받침이 지고 남은 열매는 꼭 심장 같기도 하다. 그런 여러 가지 뜻을 살려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라고 제목을 지었다. ‘산딸나무에 진실꽃이 피었습니다’로 곧 4·3의 진실이 마침내 피게 되었다는 기원을 담았다. 봄은 왔지만… 『틀낭에 진실꽃 피엄수다』는 제주사람들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웃들과 이룬 공동체적 관계인 ‘궨당’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이는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사람을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파괴하고, 마침내 궨당 공동체를 파괴하는 과정이었음을 예고한다. 1부 ‘봄은 왔지만’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이 세계 각지를 식민지로 삼고, 열강들끼리 때로 경쟁하고 때로 협력하며 세계를 게임판으로 만들던 과정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을 앞세워 이야기한다. 이는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맞이한 해방 때도 마찬가지여서, 한반도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38도선을 경계로 소련과 미국이 각각 분할 통치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제주에서 미군정은 해방자가 아니었다.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집회에서 미군정은 집회를 불허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강경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면서(도망가는 사람들을 조준 사격했다는 말이다) 제주사람들은 3월 10일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일손을 멈추고 감자를 쪄서 나눠먹는 평화로운 파업이었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여전히 강경하게 대응했다.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누명을 썼고, ‘반공 투사’라 자처하는 서북청년단까지 육지에서 건너와 갈등을 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하고 몇몇이 죽음에 이르렀다. 제주사람들의 억울함과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1948년 4월 3일, 섬 곳곳에서 싹터 자라던 민중의 분노가 마침내 제주도 전역에서 붉은 횃불로 타올랐다.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독립!” 4월 3일 봉기에서 외친 구호들은 4·3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한편으로 4·3은 미군정과 경찰이 자행하던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열망이었다. 또 한편 4·3은 곧 예정된 남한만의 5·10 단독 총선거를 앞두고 이에 항의하는, 반으로 쪼개진 나라 대신 온전한 통일국가에서 살고 싶은 제주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4·3이 일어나자 국가는 무자비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국제연합(UN)이 금지시킨 초토화작전이 광범위하게 실행되었다. 마을이 불타고, 무장대가 아닌 사람들―특히 어린아이들과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됐다. 여자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학살되거나 끌려가거나 했다. 자세히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태연하게 벌어졌다. 토벌대는 사람들을 파괴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파괴했다. 나 대신 죽을 사람을 지목하게 하는 ‘손가락 총’은 제주도를 갈가리 찢어 분열시켰다. 137개의 마을이 폐허가 됐고, 그중 많은 마을은 아직까지 폐허로 남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희생자의 수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적게는 3만, 많이는 9만 명이라 한다. 희생자의 90%가 토벌대, 국가가 자행한 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아이라고 봐주지 않았고, 종교인이라고 넘어가지 않았다. 열여섯 명의 스님이 희생됐고, 서른다섯 곳의 절이 불태워졌다. 오래도록 제주사람들의 믿음의 장소이자 제주 불교의 상징이었던 관음사 역시 불태워지고 말았다. 가해자들은 뻔뻔하고 당당했다. 미군정의 진압 책임자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4·3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라고 공언했고, 토벌대 지휘관이었던 박진경 대령도 “제주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다 희생시켜도 괜찮다.”라고 말하였다. 하수인뿐만 아니라 단독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도 가차 없었다. 그는 국무회의에서 “지방 토색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라고 지시했다. 국가폭력은 잔인하고 끈질겼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또 다시 학살이 자행됐다.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미리 찾아내 조치를 취한 것인데, 사실상 빨갱이가 될 가능성이 조금만 있어도 미리 찾아내 가두고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 학살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평생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다.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대표적 여행지인 정방폭포나 성산포 터진목 등 제주도 곳곳에 학살과 희생의 기억이 남았다. 정방폭포의 학살을 목격한 생존자는 사람들의 손과 손을 묶은 뒤 총을 쏘아 죽이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인 후 아득한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고 했다. 증언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아프게 기억한다. “사람들이 팔랑팔랑 떨어지는 것이 꼭 꽃 이파리가 지는 것처럼 보입디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제주 말에 ‘가메기 모르는 식게’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 라는 말이다. 언제 죽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심지어 뼈들이 뒤엉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죽음이 너무 많았다. 맘 놓고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다. 비밀리에 기도를 올리고 비밀리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슬픔을 가슴에 묻고 지내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연좌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들, 혹은 감옥에 갇혔다 돌아온 사람들의 가족들에게는 성공할 수 있는 사다리가 치워져버렸다. ‘속솜허라’, 입 다물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라는 말만 남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며 4·3이 우리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권력이 여전히 침묵을 강요하는데도 희생자들의 죽음의 흔적을 수습하고, 발굴된 진실들을 세상에 더 큰 목소리로 돌려줬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던 2001년 1월, 4·3 이후 최초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됐다. 그리고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들에게 4·3에 대해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로서 최초의 사과였다. 2021년 ‘4·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4·3 전개 과정에서 빚어진 인명 피해 등에 대해 국가 차원의 피해보상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최초로 마련되었다. 또 영문도 모른 채 군경에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4·3 수형인들의 명예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제주섬은 이제 4·3을 통해 배운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4·3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