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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장 정조의 정치 읽기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다 ‘통’의 정신 수원화성과 위민 정신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 실용 정신에 입각한 수원화성 수원화성과 버드나무 달의 리더십 배움을 즐기다 파초와 같은 삶을 꿈꾸다 심안으로 세상을 보다 정조의 지식 경영법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다 온고지신의 정치 악습을 폐지하다 기록을 중시하다 정조의 인재 등용 방식 세손 시절에 그린 정치적 이상 군주의 조건 더 알아보기 ┃ 세종과 정조, 수성과 공성의 리더십 2장 『무예도보통지』를 만든 사람들 쉼 없이 변하는 국제 정세 간서치 이덕무 무예의 달인 백동수 지행합일의 정신을 추구하다 비움의 철학 140 의술과 무술 146 『무예도보통지』 언해본 3장 『무예도보통지』 속 무예 이야기 무예의 가치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무예 정신 예도와 조선세법 몸 문화의 결정체, 활쏘기 틈홍문세 쌍검의 항장기무세와 한고환패상세 휘날리는 깃발과 〈기휘가〉 기창 협도의 오룡 꼬리치기 달밤에 매미 베기 오관참장세 마상편곤 전쟁터의 명장 적청 무예의 문화사적 이해의 시작과 끝, 권법 더 알아보기 ┃ 『무예도보통지』 속 무예 24기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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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이 같은 개혁의 의지를 법제 정비 사업인 『대전통편大典通編』의 편찬을 통해 가시화했다. 법률 정비가 어째서 개혁의 일환인지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헌을 통해 정부의 형태와 권력구조가 재편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떠올려보면, 조선시대의 법제 정비 또한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개혁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1장「‘통’의 정신」중에서 부패한 권력은 더 많은 자본을 요구하고, 더 악독한 부패로 직결된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이 지게 된다. 따라서 권력을 분산하려면 ‘공간의 재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조는 한양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을 해체하기 위해 수원에 화성을 쌓아 새로운 상업도시를 표방하는 공간을 창조해냈다. 오늘날 수도권에 집중된 공공기관들을 세종이나 전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이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1장「실용 정신에 입각한 수원화성」」중에서 정조의 리더십은 조선시대 국왕들 중 가장 탁월했다. 그 핵심에는 경연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경연은 국왕과 함께 당대의 지식인들이 고전을 통해 학문을 논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현안을 다루었다. 경연은 조강, 주강, 석강, 이렇게 세 번 열렸는데 때로는 야대라고 해서 늦은 밤에 열리기도 했다. 정조는 경연을 통해 국가를 경영하는 제왕학을 터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성장했다. 당대의 사료를 읽어보면, 매 순간 정조의 날카로운 질문과 현실 정치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경연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장「정조의 지식 경영법」」중에서 서북공심돈은 외형적 모습과 기능도 매력적이지만, 나는 ‘공심空心’이라는 이름에 담긴 무예 철학적 가치를 말하고 싶다. 공심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텅 빈 마음이다. 아무런 욕심도 없고, 사량·계교·번뇌·망상도 없이 순수하고 청정한 본래의 마음의 말한다. 좀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공심은 선입관념이나 아집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을 이르는 단어다. 마음을 텅 비우려면 욕심과 번뇌를 버려야 한다. 즉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야 한다. ---「2장「비움의 철학」」중에서 만약 다른 모든 것은 뛰어난데, 용기만 없다면 아예 시도조차 못하고 끝날 것이다. 역시 다른 모든 것이 부족한데 용기만 있으면 그것은 ‘만용’이 된다. 무턱대고 돌진하면 처참하게 부서질 뿐이다. 반대로 용기, 힘, 정교함이 모두 부족한데 빠르기만 해서도 곤란하다. 이런 자는 전투에서 전우를 버리고 가장 먼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가능성이 높다. ---「2장「무예의 가치」」중에서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며 화살 한 개 한 개에 온 정성을 담아 수련하는 활쏘기는 그야말로 군자에게 어울리는 무예이기도 하다. 우리네 활쏘기는 기본적으로 이 땅을 지켜온 가장 중요한 군사 전술의 핵심이었다. 한반도는 높고 험준한 산지가 많아 군사들은 외세를 막을 때 깊은 산성에 웅거했다가 적이 몰려들면 쉼 없이 화살을 쏘아 접근조차 어렵게 만드는 전술을 펼쳤다. 또한 달리는 말 위에서 정교하게 활을 쏘는 기사騎射는 고대부터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몸 문화의 결정체였다. ---「3장「몸 문화의 결정체, 활쏘기」」중에서 장창을 쓰는 다양한 움직임 가운데 ‘틈홍문세闖鴻門勢’라는 자세가 있다. 이 자세는 내렸던 창두槍頭를 다시 세우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적을 겨냥하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홍문’은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가 만났던 지명을 가리킨다. 현재 중국 산시성 린퉁구 동쪽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자세 명칭이 ‘홍문’을 ‘틈闖’하는 움직임이다. 틈은 엿보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단어를 쪼개서 보면 ‘문門’ 자 사이에 ‘마馬’ 자가 끼어 있는 회의자다. 즉 빠르게 달리던 말이 대문에서부터 돌진해 나와 지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뜻은 ‘앞으로 돌진하다’지만 ‘용감하게 나아가다’, ‘거리낄 것이 없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3장「틈홍문세」」중에서 맨손 무예인 권법은 모든 무예를 익힐 때 기본이 되는 신체 훈련법이었다. 그 때문에 옛사람들은 권법을 ‘초학입예지문初學入藝之門’이라고 생각했다. 즉, 초심자가 무예를 익히기 위한 관문과 같은 몸 쓰기의 기본을 만드는 과정이 맨손 무예에 담긴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일단 자신의 몸을 알아야 칼을 잡든, 도끼를 잡든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3장「무예의 문화사적 이해의 시작과 끝, 권법」」중에서 비록 중국의 권법이 조선 군사들에게 보급되었지만, 자연스럽게 조선화하면서 또 다른 신체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무예의 문화적 변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무예를 ‘문화’의 일부로 살펴야 한다. 중국의 문화와 조선의 기층문화가 다르면, 똑같은 권법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토착화하기 마련이다. ---「3장「무예의 문화사적 이해의 시작과 끝, 권법」」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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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무를 병용하는 것이 국운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이다”
『무예도보통지』에 담긴 정조의 정치적 이상과 시대정신 여러 TV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정조는 죄인의 신분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가적 종법제에 따라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정조와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으면서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노론에게 이 같은 사실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이에 영조는 정조를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켜 종법 질서에 편입되게 함으로써 정조의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럼에도 정조의 생부가 사도세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며 이는 번번이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정조는 자신의 불안정한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군사제도 개혁을 통한 군권의 완전한 장악을 노렸다. 이에 따라 ‘문치주의’를 국시로 내세웠던 조선왕조는 정조 대에 들어서 ‘무武’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냈다. 물론 앞선 왕들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무너진 성리학적 질서를 바로잡고 미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조만큼 강력한 개혁 의지를 드러내지 못했다. 정조는 이른바 ‘문치규장文置奎章, 무설장용武設壯營’을 내세웠는데, 이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문文의 정치’를, 장용영을 중심으로 ‘무武의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17~18세기 유럽의 절대주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자국의 전성기를 이끈 루이 14세를 비롯한 왕들이 관료제와 상비군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갔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조는 개혁에 시동을 걸기 위해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 당대 비주류였던 서얼들을 등용하고, ‘군사君師’를 자처하며 초계문신제를 실시하고, 새로운 법전과 병서의 편찬을 주도했다. 또한 한양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수원에 조선 최초의 계획도시인 화성을 건설했으며, 성리학이 본래 추구하던 ‘민본주의’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백성들의 삶을 일일이 보살폈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던 온갖 ‘구습’을 타파했다. 정조가 행한 수많은 개혁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동안 훈련도감에서 작업했던 병서를 사실상 왕의 친위 부대였던 장용영에서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장용영 초관이었던 백동수와 그의 친구들에게 새로운 병서를 만들 것을 명하고 제목까지 지어 하사했는데, 그것이 바로 『무예도보통지』였다. 따라서 정조의 개혁 의지와 노선을 한눈에 부감하기 위해서는 『무예도보통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실용’과 ‘위민’의 정신을 읽어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국가적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을 때였다. 특히 병자호란의 패배로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 예를 행해야 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적국에 끌려갔다. 오랑캐라고 얕보고 무시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의 임금이 굴복한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 사회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조선 사회를 떠받들고 있었던 성리학적 질서가 무너진 것에 큰 충격을 받은 조정은 군사들이 좀더 효율적으로 무기와 전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흩어져 있던 무예들을 한데 모으고 진영마다 달랐던 무예를 표준화했다. 또한 적의 무기와 무예라 할지라도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일본의 무예와 무기가 조선화하는 문화변용이 일어났다. 그러한 노력이 하나둘씩 쌓여 마침내 정조 대 『무예도보통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무예도보통지』는 두 글자씩 끊어 읽어야 그 뜻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를 도보(그림과 해설)로 풀어 설명한 통지(종합 서적)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국가 안보의 붕괴는 곧 개인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에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중요시한 것은 무예를 전문으로 하는 군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위기 상황에 직면하면 곧바로 무예를 써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작은 무예 동작까지 일일이 그려놓아 누구나 그림만 보더라도 따라 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인지 각 자세의 낱개 움직임들을 이어 붙이면 책 속의 군사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게다가『무예도보통지』를 만들 때, 어려운 한자를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도 함께 제작했다. 이전에 무예서들이 전략과 전술 같은 이론에 충실했다면, 『무예도보통지』는 이론을 기반으로 한 실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들은 전과 다르게 신체 단련과 정신 수양의 도구로뿐만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실용적인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나라 무예의 전범, 무예 24기 『무예도보통지』에는 보병 무예 18기에 기병 무예 6기를 더해 24기의 무예가 수록되어 있는데 권1에 장창, 죽장창, 기창, 당파, 기창, 낭선이, 권2에 쌍수도, 예도, 왜검, 교전이, 권3에 제독검, 본국검, 쌍검, 마상쌍검, 월도, 마상월도, 협도, 등패가, 권4에 권법, 곤방, 편곤, 마상편곤, 격구, 마상재가 실려 있다. 이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영조 대 작업한 『무예신보』 속 무예 18기에 6기를 추가한 것인데, 정조가 자신의 역린이었던 정통성의 한계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아버지의 정치적 뜻을 이어나가겠다는 효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예 24기는 박물관에 박제된 옛 왕조의 유물이 아니다. 지금도 정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무예 24를 연마하는 이들이 있다. 2003년에 수원시를 본거지로 한 ‘무예24기보존회’가 설립되어 무예 24기의 체계적인 전승에 힘쓰고 있을 뿐 아니라 2015년부터 수원화성을 무대로 ‘무예24기시범단’이 무예를 선보이고 있는데, 그 중심에 이 책을 쓴 저자와 그와 함께 땀을 흘리는 동료들이 있다. 특히 이들은 국내를 넘어 2018년에는 프랑스 루앙시가 개최한 ‘제5회 한국문화 페스티벌’에서 무예 24기를 선보여 전통 무예의 세계화에도 노력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무예인으로서 살아오며 무예 24기의 보존과 전파에 힘쓰고 있는 저자는 대중이 좀더 쉽고 재미있게 우리의 전통 무예를 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무예로 조선을 꿈꾸다』에 무예 24기에 얽힌 다양한 역사와 옛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이는 ‘콘텍스트context’ 없이는 ‘텍스트text’인 무예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저자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월도를 쓰는 자세 중에 가장 폭발적인 위력을 보여주는 ‘오관참장세’라는 자세가 있다. 이 자세는 ‘오관참육장’이라는 고사와 관련 있는데, 그 이름처럼 관우가 오관(다섯 개 관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베는 자세다. 『삼국연의』에 의하면, 관우는 유비에게 가던 도중 험준한 요새와 같은 곳에 세워진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조조에게 관문을 통행할 수 있는 사령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불 그 문을 지키는 장수의 목을 벨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첫 번째 관문인 동령관에서 공수의 목을 베고, 두 번째 관문인 낙양관에서 장수 한복과 맹탄을 단칼에 베어 죽였으며, 세 번째 관문인 사수관을 지나면서 장수 변희와 자객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네 번째 관문인 형양관에서 그곳의 태수였던 장수 왕식을 베어 죽였다. 마지막으로 황허강으로 통하는 관문인 활주관에서 하후돈의 부하인 진기의 목을 벴다. 그러니 이 자세를 취할 때는 관우의 마음가짐으로 월도를 크게 휘두르며 단번에 적을 부수어야 한다. 이 밖에도 저자는 이 책에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는데, 그 이야기보따리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전래동화를 듣는 것 같은 재미는 물론이고 무예에 대한 동아시아 삼국의 생각과 함께 신체와 정신을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과 오늘날의 무예인들의 사유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위태로운 세상에서 몸과 마음의 근력을 키우는 방법 지금도 유효한 무예의 존재 가치 ‘무예’라고 하면 으레 무림의 고수들이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칼을 겨누는 장면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무예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한 단순한 칼싸움이 아니다. 무예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문화이자 생활의 일부분이다. 초기의 무예는 야생에서 살아남으려는 인류의 단순한 몸짓에 불과했지만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며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 마을,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체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의 수박과 신라 화랑들의 본국검이 탄생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무과 시험을 시행해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며 전통 무예를 계승해나갔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무예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또한 육체 활동을 정신 활동보다 천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무예에 대한 관심 또한 감소했다. 그런데도 저자가 무예에 천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무예도보통지』와 정조 시대를 다시금 우리 곁에 불러낸 데서 그치지 않고, 무예가 현대인들에게 유효한 까닭을 설명한다. 그는 온갖 자극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려면 몸과 마음을 수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예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옛사람들도 온갖 상념을 떨쳐내고 자기 수양을 위해서 무예에 힘썼다고 한다. 활쏘기를 할 때도 정념에 사로잡힌 채로는 궁시에 집중할 수도, 과녁을 맞힐 수도 없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갈고닦았다. 백발백중할 만큼 신궁의 실력을 가진 정조 역시 활쏘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고 심안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옛말이 있다. ‘건강한 신체’는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짜고짜 몸에 좋은 음식과 영양제를 챙겨 먹고 운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가장 먼저 내 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의사가 환자들의 증상에 따라 적절한 약 처방과 진료를 하는 것처럼, 내 몸 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그에 맞게 신체를 단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내 몸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예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도 무예의 정신을 실천하고 극기克己하며 항심恒心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한 저자의 마음가짐이 책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서인지 책을 덮더라도 그가 말하는 무예 정신은 금세 휘발되어버리지 않고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올곧게 붙잡아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