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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도약, 그리고 비통 백미러에 비친 이창裏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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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최종학력이 국졸이라고 했지?”
하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렇습니다.” 우진은 의아한 눈으로 사장을 쳐다봤다. “자네 학벌이 부럽잖나?” “부럽습니다.” “갖고 싶지 않나?” “무얼 말씀입니까?” “대학 졸업장 말이야.” “예?” “왜 그렇게 놀라나?” “부럽긴 해도 갖고 싶진 않습니다.” “왜?” “그까짓 가짜 있으면 뭘 합니까?” “자넨 가짜라도 진짜로 써먹을 수 있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력이 있거든 자넨.” “그렇다고 가짜가 진짜 됩니까?” “누가 가짠 줄 아나?” “양심이 알잖습니까?” “양심?” “그렇습니다.” “그게 누구의 양심이지?” “모르셔서 물으십니까?”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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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표제작 〈촌놈〉은 1976년 9월부터 3년여에 걸쳐 충청일보에 연재한 졸작 장편이다. 이 소설의 원제는 〈이단(異端)의 성(城)〉이었는데 연재를 하면서 제목을 〈촌놈〉으로 바꿨다. 주인공 석우진은 우직하고 강직한 시골고라리일 뿐 아니라 기개 있고 신념 있는 경개(耿介)한 청년이어서 정당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다. 주인공 석우진은 유명한 천등산(天登山) 송강(松江)의 행정(杏亭)마을 산지등이에서 태어나 주경야독으로 곤이지지(困而知之)한 촌놈이다. 이런 석우진이 어느 날 읍내 장에 땔나무를 져다 팔고 돌아오다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어느 신문에 난 국회출입기자 모집 광고를 보고 가슴이 뛴다. 광고는 천우신조로 응시 자격이 학력 위주가 아닌 실력 위주로 뽑는다 했기 때문이다. 자격 기준이 모두 4년제 대학 졸업이 아니면 졸업 예정자로 돼 있는데 이 언론사는 학력 아닌 실력 위주로 사람을 뽑는다 했으니 어찌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석우진은 뛰는 가슴을 붙안고 집으로 뛰어와 출제 빈도가 많을 듯한 문제들을 골라 10여 일 동안 복습한 끝에 상경, 응시를 했고 결과는 몇 백 명의 대졸자들을 물리치고 여봐란 듯 합격, 수습을 마치고 국회출입기자가 된다. 그러나 세상은 석우진이 생각한 것과는 딴판 달라 심한 갈등을 느낀다. 여기에 무대가 서울이고 시대가 1950년대 중, 후반에서 1960년대의 자유당 말기인데다 3.15 부정 선거(정·부통령)로 전국이 부정 선거 규탄과 민주 항쟁 데모로 성난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여서 나라의 존망마저 바람 앞의 등불 같아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렀음에도 석우진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어떤 감언이설과 공갈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불의 부정은 물론 이권(利權)과도 타협하지 않은 채 도저한 자세를 취했다. 이 바람에 프락치들에게 여러 번 린치를 당하고 테러를 당하면서도 끝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런 석우진을 높이 산 어느 거물 정치인이 석우진의 당당한 모습에 반하고 또 안타까워 대학졸업장과 함께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겠다 해도 석우진은 일언지하에 거절, 되레 그 거물 정치인에게 호통을 친다. 한 나라의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헌법기관의 국회의원이 스스로 법을 어기면 도대체 이 나라는 어찌 되겠느냐 분기탱천하면서……. 이에 그 거물 정객은 흠칫 놀라 “저 놈은 참 멋진 가난한 부자 놈이다.”를 외쳤고 “내 고희에 가깝도록 살았어도 저놈처럼 멋진 놈은 처음 봤다. 하지만 네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산다면 지조 지키며 깨끗하게 살지는 몰라도 평생 고생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외치며 안타까워한다. 그렇다면 석우진은 대체 어떤 가계(家系), 누구의 후손인지 잠깐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시조 석린(石隣)은 고려 의종, 명종 때에 무인이다. 그는 고려 의종 때의 경인난(庚寅亂)에 이의방(李義方)에 의해 서경낭장(西京朗將)으로 발탁되었고, 1176년(고려 명종 6)에는 두경승(杜慶升)을 따라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가 인정되어 상장군(上將軍), 동서북면병마사(東西北面兵馬使)에 올랐다. 그 뒤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조선조 선조 때 충주읍리(忠州邑吏)를 지낸바 있는 석감(石鑑)은 도사 석광필(都事 石光弼)의 손자(孫子)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가 한밤중에 돌아와보니 왜병(倭兵)이 향교(鄕校)에 불을 질러 향교가 활활 타고 있었다. 석감(石鑑)과 그의 조카 석천수는 함께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성현(聖賢)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심항산(心項山) 고사(古寺)에 존안(尊安) 하였다가 난(亂)이 평정된 후 다시 대성전(大成殿)을 세워 봉안(奉安)했다. 후일 숙종 임금은 그들의 공로를 높이 치사, 석천수는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증직(贈職)되고 석감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이에 지방 유림에서는 향교 앞에 호성사(護聖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이 두 분의 위패를 봉안(奉安), 매년 석전제(釋奠祭) 봉행 후 제향(祭享)하고 있다. 그런데 석우진이 바로 이분들의 직계 후손이다. 석우진이 지금은 비록 곤고(困苦)하고 궁핍(窮乏)하게 살아도 그의 몸엔 이런 장한 조상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다. 돌배 밭에 돌배 나고 왕대밭에 왕대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다. 그 핏줄 그 정신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다면 대저 석우진은 어떤 청년인가. 그를 알려면 먼저 그의 사훈(私訓)이자 좌우명인 〈깨끗한 이름 청명(淸名)〉과 인생훈(人生訓)인 〈하늘 무서운 줄 알자〉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신념이자 지론인 지조, 개결, 청렴, 경개(耿介)도 알아야 한다. 이 몇 가지만으로도 석우진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사세가 이쯤 되면 자신의 지론과 신념과 철학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세상과 타협이라도 해야 하는데 석우진은 굶어죽어도 옳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젊은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소설 〈촌놈〉에서 시골고라리 석우진으로 하여금 신념과 지조와 개결과 경개의 철학 있는 젊은 인간형(人間型)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석우진 같은 젊은이가 이 나라 대한민국에 천 명 만 명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석우진 형! 그대는 부디 그대의 신념대로 살아 당웅비대천하(當雄飛大天下)로 도남(圖南)의 뜻을 펴기 바라오. 우리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학수고대 하겠소. 오, 석우진 형 보고싶소! 2019년 11월 꿈을 먹고 사는 방 몽함실(夢含室)에서 강 준 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