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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부 이론 1. 우리 주변의 이데올로기 2. 이데올로기의 생리 3. 변화하는 이데올로기 4. 현대 이데올로기와 국가 5. 이데올로기의 장치들 6. 사회 계층과 정체성 7. 문화 유전자 밈 제2부 코드 1. 코드 2. 집단 3. 문화 계층 4. 몸 5. 에토스와 파토스 6. 언어 부록.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 7. 사대주의라는 문화코드 제3부 과거의 잔재 1. 미 2. 성 3. 종교 4. 학교 제4부 현재 1. 소비 2. 여성성 3. 대중음악 4. TV, 무엇을 노리는가? 제5부 쟁점 1. 좌파 이데올로기와 탈이데올로기 시대 2.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 에필로그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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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면서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바뀐다. 노예 제도, 연금술, 보쌈 등은 모두 사라졌지만 앞서 나열한 단어들도 세월이 지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모른다. 왜 그럴까? 인간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도 바뀌었다. 자연을 바라보는 눈도 변했다. 이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으며, 어딘가에는 블랙홀이 있다. 그러나 모든 건 또 바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자체는 변한 게 전혀 없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데올로기가 바뀐 것이다. ---pp.16-17, 「제1부 이론」
이데올로기는 집단의 것이자 익명의 사고다. 한 개인의 생각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생각과 시너지를 발휘해야만 이데올로기로 간주될 수 있다. 집단, 공동체,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존재 조건이 되는 셈이다. 한 개인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를 어떤 집단이 채택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생각이 《이미 생각된 것》 속에 스스로 자리 잡으면서 생겨난다〉. ---p.20「제1부 이론」 노예 제도가 존재하던 시대에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조차 노예들을 상품으로 간주했고, 그들이 이런 세계관을 가졌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주어진 시대와 문화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 얼마나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게 하는지를 보여 주며, 이런 사례들이 인간의 역사를 장식해 왔다. ---p.23「제1부 이론」 어린아이에게 〈벤츠〉나 〈노숙자〉는 각각 〈자동차〉와 〈길거리에서 잠자는 자〉 그 이상이 아니다. 즉 단어들을 지시적 의미로만 받아들일 뿐, 그것들이 내포하는 문화적(또는 상징적) 의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기본적인 문장 구성력을 갖추었을지라도 아이의 언어 활동은 기초적인 지적 욕구 만족을 포함하여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그치고, 어휘 사용법 역시 가치 중립적인 영역에 머문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아이는 더욱 다양한 어휘를 알게 되고, 아이의 언어는 서서히 이데올로기의 색채로 물들여진다. 이 점이 사회생활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변화다. ---p.77, 「제1부 이론」 지금까지 정리한 바에 따르면 〈탈이데올로기〉는 냉전과 좌파의 정치 혁명적 투쟁의 종식을 의미할 뿐, 문화 이데올로기로서 좌파가 남긴 유산과 관계가 없는 개념이다. 이런 유산이 전혀 없는 이른바 〈완벽하게 탈이데올로기화된 사회〉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돈벌이 경쟁만을 일삼고 심지어 인간까지도 상품적 가치로 평가되는 사회일 것이다. 모든 것이 개발을 위해 움직이는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도 오로지 돈을 기준으로 등급화될 것이다. ---p.443, 「제5부 쟁점」 결국 사회가 진화한다면 〈그 방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틀에 박힌 주장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나의 몸이자 머리이고, 가족이자 친구이며, 행복이자 일상이며, 무지이며 지식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한계이자 정체인 셈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인류가 만들어 낸 가장 창의적인 역설이자, 인간의 위선이며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pp.460-461, 「제5부 쟁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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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해방’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 이 책 『이데올로기』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인간 ‘해방’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들이 아니다. 이 책은 혁명과 변혁을 주장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미와 성, 종교, 학교, 소비, 여성성, 대중음악, TV 등으로, 우리가 살면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구성 요소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단편들 하나하나가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언어학과 기호학을 전공한 저자에 따르면, 심지어 언어조차 이데올로기다. 영어에 대한 광신적 태도가 그렇다. 이데올로기는 해방의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해방’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이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식하고 변덕스러운 것인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것이다. 그런 공감이 형성되면 우리가 죽자 살자 매달리는 가치관도 별게 아니라는 사실도 조금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듯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우리 몸에 각인되었는지를 반드시 지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믿는 게 있다면 바로 이런 방법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자유를 위한 나의 작은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앎’을 전제로 비로소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전언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흔히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통해 사회학자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와 다르다. 저명한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선언하는 동명의 책에서 사회 계급의 양극화로서 현실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가 설득력을 잃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화이트칼라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해 마르크스의 분석이 그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김광현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대니얼 벨이 “사상을 사회적인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전환시킨 가치와 신념의 체계”로 정의하는 이데올로기와 다르다. 저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범주는 이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데올로기를 “우리의 행태를 결정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 혹은 “틀에 박힌 사고방식”으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 사고방식, 관념이라면 모두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본연에 놓여 있는 의심의 해석학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개인을 세공하는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공통된 속성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이데올로기는 집단의 것이자 익명의 사고다. 집단, 공동체, 사회가 이데올로기의 존재 조건인 셈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다른 이름들, 이를테면 과학, 양식, 자명성, 도덕, 사실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특히 국가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국가라는 관념은 현대인의 삶에 너무나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그 자체가 매우 복합적인 역사적, 사회적 인과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그러나 국가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근현대사의 핵심을 구성한다. 김광현은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과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이 국민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는 국가와 같은 거시 이데올로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알튀세르의 이론에 동감을 표하면서도, 알튀세르의 설명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다양한 장치들이 대중을 국민으로 훈육하는 데 동원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개인의 정체성이 단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들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과정과 사회 계층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개인이 위치하는 문화 공간의 상징 질서는 가정 및 교육 체계를 통하여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사고, 판단, 취향의 체계인 아비튀스를 형성한다. 사회 재생산에 가장 효과적인 기구는 학교다. 가정에 이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은 한 개인의 사회 계급에 일치하는 사고와 행동 및 성향의 체계, 즉 아비튀스를 재생산하며 계층 간의 불평등한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학교는 등급과 서열을 학생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 서열에 따른 사회 계층으로의 편입을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기게 한다. 개인들이 사회적 하위 계층으로 편입되어도 별 불만을 못 느끼고 그에 걸맞은 문화 소비에 만족하며 살 수 있는 것도 학교에서 학습을 통해 형성한 아비튀스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하지만 개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인식이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세공한 결과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별의별 사람, 별의별 나라, 별의별 시대가 있었고, 모든 문화나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당연시했지만, 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당연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변화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테면 ‘미’에 관한 이데올로기를 다루는 장에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20세기까지 미의 기준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추적한다. 이를 통해 미의 기준 또한 시대적 산물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시대가 바뀌고 권력의 역학 관계가 바뀌면 미의 기준도 바뀌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풍만한 여성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오늘날 여성의 풍만함은 신체적 콤플렉스로 탈바꿈했다. 미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또한 이를 증명한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성에 대해 관대하고 자유분방했다. 동성애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교회의 교리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던 중세에 성욕은 죄악이었다. 고대의 쾌락주의를 중세의 금욕주의가 대체한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지속할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관념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다시 바뀐다. 인간의 육체를 재발견한 이 시대에 성욕은 다시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성적 이데올로기는 중세의 금욕주의에 대한 강렬한 반동이었다. 모든 이데올로기에는 생존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따라서 생존의 조건이 변하면 이데올로기도 따라 변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가 변화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간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이데올로기가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몸에도 침투한다. 사람들은 국가와 매스미디어, 학교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특정 국가의 국민이 되고, 특정 방식으로 소비하고, 이런저런 계층에 편입된다.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념들을 자연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데올로기는 감옥이자 정체성이며, 차별이자 위선인 동시에 강력한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을 자주 언급한다. 과거의 이데올로기들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은 지금의 이데올로기들도 세월이 지나면 역시 이상하게 보일 수 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영원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아차릴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