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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제1장 제2장 |
Felix Vallo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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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한 줄기 연기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투명한 망령에 매달려 발버둥 치고, 헛된 기대를 품는다. 그리고 거기에 삶의 죽음이 있다. - 펠릭스 발로통
자크 베르디에. 28세. 나는 개인적인 동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부모도, 아이도, 친구도 없다. 누구에게 진 빚도 없고 내게 빚진 사람도 없다. 내 책상 서랍에 금화 천 오백 프랑과 지폐 오천 프랑, 그리고 유가증권과 채권을 남겨둔다. 나는 이것을 공공 구호 기관에 전달한다. 나는 공동묘지에 묻히길 희망하며 존경하는 경찰서장께서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확인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오직 경찰서장만 볼 수 있도록 내 책상 위에 봉인된 봉투가 놓여있다. 그 안에 든 내용물은 그가 원하는 방식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 p.12 “네가 날 밀었어! 그래, 네가 날 밀었어…! 일부러!” 나는 화가 났다.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어. 나는 네 손을 느꼈어!” 아무리 반박하고 애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소문이 퍼졌다. 나는 사랑스러운 벵상을 강으로 밀어버린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으로 남았다. --- p.24 나는 이 사건에서 내가 한 일을 잘 알고 있었고, 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달랬다.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아! 내가 고의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 p.29 “자, 얘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라뇨?” “네가 친구에게 독약을 건넸다던데?” “아니요!” “녹색 가루를 상자에 담아 주지 않았다고?” “녹색 가루라뇨…! 아, 그거요? 네, 맞아요, 새장을 새로 칠한다고 해서 조금 주었는데…. 무슨 일이죠?” --- p.36 가엾은 소녀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반쯤 열린 블라우스에서 우스꽝스럽고 도톰한 작은 쿠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내 쪽으로 굴러왔다. 나는 마치 역겨운 동물을 쫓아내듯 그것을 밀어냈고 혐오로 가득 찬 내 눈빛을 느꼈다. 어안이 벙벙해진 잔느는 처음엔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팽창하더니 이내 사색이 되었다. --- p.82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며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요.” “왜 안 되는 거죠?” “안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왜 안 되는지, 말해주세요.” “당연히.” “네?” “그뿐이에요.” “절대로?” “절대.” --- p.117 나는 집으로 다시 들어와 그녀가 없는 차가운 공간 속에 홀로 남아 책상 앞에 앉았고 〈12세기 프랑스 조각의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 위에서 마치 아이처럼 울었다. --- p.150 그러한 유산의 짐을 최초로 짊어진 조상이 누구인지 찾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수탁자이자 재앙의 전파자인 나는 불가해한 법칙에 귀속된 형태로 자신을 달구고 있었다. 이후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 질 것이고 나의 성을 딴 사람들은 영속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백한가! --- p.179 분명, 나는 누구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이제 삶을 마감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을 허비했다는 사실을 논할 필요는 없다. 스물여덟 살에 죽음을 받아들인다. 불운한 나날들에 미련은 없다. 어쨌든 오직 나 자신의 결정에 따라, 지급 기한이 돌아온 듯 어느 아름다운 저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내게 고결한 행위이자 모든 과오를 벌충할만한 행위로 보였다. 누가 알겠는가, 이토록 사악한 나의 이름이 영예로운 빛으로 둘러싸일지. 그때 발에 밟히는 모래 소리에 생각이 뒤엉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내 책임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까짓것,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 p.248 이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다. 그녀와 같은 물질인 나는 마침내 무해하고, 무력한 상태에서 중력과 화학의 법칙에 따라, 공평하게 육체를 다스리고, 뒤섞고, 중화시키며, 응고시키거나 분배하는 확고부동하고도 태연한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 p.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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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자크 베르디에는 친구 벵상의 뒤를 따라 강둑의 난간 위를 걷는다. 저무는 햇살에, 베르디에의 그림자가 불시에 친구 벵상을 덮친다. 놀란 벵상은 뒤돌아보려다 발을 헛딛고 난간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의식을 되찾은 벵상은 베르디에가 자신을 떼밀었다고 주장한다. 그 순간부터 베르디에는 친구를 아무 이유 없이 난간 아래로 떼민 아이가 된다. 벵상은 며칠 후 사고의 후유증으로 결국 죽는다. 베르디에는 자신의 그림자에 책임을 져야 할까? 우리는 그림자의 사소한 위반에 대한 책임마저 져야 하는 것일까? 이렇듯 베르디에의 삶은 기이한 사고들로 채워진다.
어린 베르디에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라 날카로운 끌로 자기 손톱 밑을 찌른 이웃집 보석 세공사, 베르디에가 건넨 염료를 먹고 죽은 또 다른 친구, 베르디에의 손을 잡다가 벌겋게 달궈진 난로에 곤두박질친 나이 어린 미모의 화실 모델, 급기야 청년 베르디에의 영혼을 지배한 아름다운 여인까지, 베르디에의 불운한 그림자가 기이한 사고들을 뒤덮는다. 그는 자신이 존재만으로도 타인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유해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갈등과 방황 끝에 죽음의 고리를 끊어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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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통이 그려내는 세계 속 인물들은 언제나 그림자의 음모 속에 놀아난다. 그림자가 비밀스레 속삭이고, 우리를 얽맨다. 의지와 다짐, 생각과 계획은 그림자의 속삭임 앞에 속수무책이다. 침묵해야 할 때 말하게 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을 강요한다. 사랑이 폭력이 되고 폭력은 체념을 낳고 체념은 다시 갈망을 불러일으켜 눈먼 사랑이 되는 종잡을 수 없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베르디에는 길을 잃는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매번 타인을 속이기도 하고, 결국 진실이 언제나 진실이 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베르디에와 우리를 슬픔과 절망, 그리고 분노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모순적이고 안달하고, 쉽게 상처받고 어렵게 화해하며, 금방 잊거나 아주 오래 간직한다.
우리의 의지만큼 우리의 불의가 우리 삶을 주관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삶을 지속하는 것이 끊임없이 타인을 침해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그런 삶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건들에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절망과 슬픔으로 이끈다. 베르디에가 무해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자신을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자신을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밖으로 나갈 수 없듯, 어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극복한다는 환상만을 갖는 셈이다. 환상을 유지할 때 우리는 낙관하고, 환상이 깨질 때 슬픔을 느낀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삶에서 낙관도 비관도 없이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찾는 수밖에 없다. 현재에 우리 자신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삶이고, 그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면, 슬픔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슬픔의 도리란 달리 없다. 자크 베르디에 씨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