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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꿈이 있는 사람은 길에서 멈추지 않지요 * 02 서당에서 있었던 일 * 07 노자 꿈을 타고 태어난 아이 * 15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 25 팽이치기 * 35 글공부는 어려워 * 47 한양에서 * 57 아버지의 유언 * 67 과거에 급제하다 *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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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득신도 천자문을 뗐어요. 어느새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었지요.
떠듬떠듬 외웠는데도 훈장님은 칭찬까지 해 주었어요. 책씻이를 할 때에도 썩 개운하지는 않았어요. 제대로 외우지 못했는데도 훈장님이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지요. "옛다. 몽담이 네 것이다. 그동안 글공부하느라 애 많이 썼다." 훈장님이 단자수신을 건네주었어요. 글자 하나를 쓴 종이를 봉투에 담아 주신 성적표 비슷한 것이었어요. 그 글자들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어요.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제 고집만 부리는 학동에게는 '어질 인' 자를, 성격이 급한 학동에게는 '참을 인' 자를 주었어요. 늘 서둘러 일을 그르치는 학동에게는 '소 우' 자를,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는 학동에게는 '닭 계' 자를 주었지요. 효성이 부족한 학동에게는 "까마귀 오' 자를, 똑똑함이 지나쳐서 항상 예민하게 굴면 '어리석을 우' 자를 주었어요. 열심히 노력했지만 학업을 잘 따라오지 못한 학동에게는 '부지런할 근' 자를 주었지요. '아, 다행이다.' 봉투를 열어 본 득신은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없을 무' 대신 '근' 자가 들어 있었거든요. '무'는 지금으로 치면 낙제인 셈이지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훈장님이 손등으로 수염을 밀어 올리면서 말했어요. "몽담아,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을 했기에 '근' 자를 주었다.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아야 하느니라."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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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과 지금을 통틀어
으뜸가는 독서가, 김득신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은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정말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책을 썼지요. 그런데 정약용도 감탄해 마지않는 인물이 있습니다. “문자와 책이 존재한 이후 종횡으로 수천 년과 삼만 리를 뒤져 보아도 부지런히 독서한 사람으로 김득신을 으뜸으로 삼을 만하다.” 정약용이 《여유당전서》에 남긴 말입니다. 도대체 김득신은 얼마만큼 독서를 했길래 이런 평가를 받은 걸까요? 그리고 김득신이 이토록 책읽기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믿음과 사랑의 힘으로 하지만 천연두를 호되게 앓은 탓인지 이 아이는 총명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무수히 읽어도 터득하지 못하는 천자문을 귀동냥으로 들은 머슴이 먼저 외웠을 정도니까요. 그런 탓에 주변에서 항상 수군거림이 그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양자를 들여 과거를 보게 하라는 친지들의 성화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저리 미욱하면서도 공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나는 오히려 대견스럽소.” 이것이 아버지의 답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믿음과 사랑이야말로 김득신을 위대한 독서가로 만든 힘이었지요. 조선시대 최고의 독서왕 김득신의 독서에 대한 열의와 집중력을 말해 주는 일화들은 참 많습니다. 김득신은 신혼 첫날도 신부를 제쳐놓고 책 대신 구한 일력을 읽으면서 밤을 샜고, 아버지를 여읜 다음 움집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날마다 읽은 글의 제목과 횟수를 꼬박꼬박 기록한 독수기(讀數記)의 내용입니다. 김득신이 독수기에 기록한 서른여섯 편의 글은 모두 1만 번 이상 읽은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백이전》은 자그마치 11만 3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지요. 참된 공부의 길 김득신은 서른아홉 살에 겨우 소과에 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스무 해가 지나 쉰아홉 살의 나이로 대과에 급제했습니다. 예순 살까지는 과거를 보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킨 것이지요. 그러나 늦은 나이로 기어이 과거에 붙었다는 사실이 대단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소중한 것은 진정한 공부란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도리를 얻는 데 있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김득신은 1684년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전에 김득신은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미리 남겼습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