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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간행하는 말씀 _ 재단법인 고하송진우선생기념사업회
간행사 _ 동아일보 사장 김병관(金炳琯) 《古下 宋鎭禹 傳記》를 내면서 _ 동아일보 사장 고재욱(高在旭) 서문 _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준연(金俊淵) 서문 _ 동아일보 사장 고재욱(高在旭) 책머리에 _ 묘비명을 통해 본 일대기 1. 古下先生 宋君之碑(고하선생 송군지비): 정인보 글 짓고 쓰다 2. 고하(古下) 선생 송 군(宋君)의 비(碑): 정인보 한자 원문을 이희승 번역하다 3. 고하 동상 병풍석에 새겨진 일대기 제1장 _ 사상의 형성 1. ‘금가지’ 소년 2. 스승 기삼연(奇參衍) 의병대장의 가르침 3. 신학문의 배움터로 4.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와의 친교 5. 도쿄유학(東京留學)의 큰 뜻 6. 이국(異國)의 학창(學窓) 7. 망국의 한 8.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와 잡지 ‘학지광(學之光)’ 제2장 _ 3·1운동과 중앙학교 1.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중흥 2. 피 끓는 청년 교육자 3. 내일을 위한 기초 학생조직 4. 3·1운동 거사의 총본부(總本部), 중앙학교 5. 도쿄 ‘2·8선언’ 전후 6. 천도교와 기독교 등의 합류 7. 아! 기미년 3월 1일 제3장 _ 옥중에서 1. 조서(調書)를 중심으로 2. 예심결정서(豫審決定書)를 중심으로 3.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4. 판결문을 중심으로 제4장 _ 동아일보를 짊어지고(상) 1. 옥중에서 들은 동아일보 창간 2. 동아일보 사장 취임 3.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 전후 4. ‘육혈포(六穴砲)’ 권총 협박 사건과 언론 탄압 저항의 민중운동 5. 조그만 시련 6. 범태평양회의 참석 7. 명논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 8. 동아일보 2차 정간과 옥고 9. 신간회(新幹會)와 고하 제5장 _ 동아일보를 짊어지고(하) 1. 동아일보 제6대 사장으로서의 저항과 후원 2. 타고르의 시(詩) 3. 광주학생항일운동 4. 동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사업과 무기정간 5. 애국가 대신 ‘조선의 노래’ 제정 6. 이충무공 유적보존운동 7. 브나로드운동 8. 만보산(萬寶山)사건과 만주사변 9. 동아일보 사장 고하와 젊은 기자들 10. 잡지 ‘신동아(新東亞)’와 ‘신가정(新家庭)’ 11. 새 한글맞춤법의 보급과 실행 12. 신사참배 거부 문제 13. 일장기 말소사건 제6장 _ 일제의 최후발악 1. 중일전쟁 2. 동아일보의 강제 폐간 3. 봄을 기다리며 4. 일축한 정권이양교섭(政權移讓交涉) 제7장 _ 해방된 조국 1. 아아, 8월 15일 2. 고하와 몽양(夢陽) 3. 국민대회준비회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결성 4. 미군정과 동아일보 복간 5. 고하와 우남(雩南) 6. 고하와 임정(臨政) 7. 운명(殞命), 최초의 정치암살 고하 송진우 선생 연보(年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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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1897) 10월 이래 쓰여 온 대한(大韓)의 국호는 13년 만에 다시 조선(朝鮮)으로 고쳐졌다. 통감부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된 것이다.
… 이때의 나이 스물하나. 남달리 강한 정열가요, 유달리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청년 고하가 미리 짐작 못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놀라운 사실을 알았을 때 그 통분함을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이 무렵 고하는 걸핏하면 “호생오사(好生惡死: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중국 여순(旅順)의 일본 관동법원(關東法院)에서 형의 선고를 받고 형 집행에 앞서 재판장 ‘마자키’(眞崎)에게 한 말이다. 마자키가 안 의사의 참회를 권하자 안 의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호생오사는 사람의 상정이나, 구차히 내가 살아남을 생각이 있다면 어찌 내가 이런 일을 하겠소. 그런 말은 두 번도 하지 마시오.”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도 태연히 기도를 드리고 식사를 할 뿐 아니라,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지내다가 이 세상을 하직했던 것이다. 고하는 안 의사의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p.104-105 “제군! 우리는 새집을 짓는다. 누구의 집인가? 여러분들의 집이다. 주추를 놓는다. 누구 집의 주추인가? 여러분이 배울 집의 주추다. 여러분이 배우고 나가면 여러분의 후배들이 배우러 들어올 것이다. 이 후배란 바로 먼저 사회에 나간 여러분의 뒷받침을 해 줄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나고, 지혜가 있고, 용감하다 해도 여러분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여러분만으로는 여러분의 이상을 살릴 수도 없다. 장차 여러분은 이 민족을 이끌어갈 사람들이다. 2천만이라는 크나큰 가솔을 이끌어갈 여러분을 도와줄 사람들이 다시 들어 올 배움의 집이다.” --- p.133 고하는 학생들에게 혼례는 단군(檀君)과 세종대왕(世宗大王), 그리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을 모신 앞에서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고하의 주장은 단군과 민족 문화의 상징인 세종대왕과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한 자리에 모셔 놓음으로써 우리가 단군의 자손임을 깨닫고 세종대왕의 높으신 업적을 이어받으며, 이순신의 충(忠)과 의로움, 그리고 용기와 지혜를 받들자는 취지에서였다. --- p.143 “아, 우리 문지기가 오시는군, 오늘도 파수(把守)를 잘 좀 부탁하오.” 코를 찡긋하고 웃으며 반갑게 기당을 맞이하였다. 고하의 이러한 인사말에 “그게 무슨 소리요, 이래도 내가 3·1운동 주모자의 한사람인데…” 기당은 당당하게 응답하였다. 3·1운동 계획을 모의할 당시 계동 중앙학교 숙직실을 집합 장소로 삼아 국내외의 주요 인물들의 출입이 잦았었다. 일본 경찰을 조심하기 위해서 동지 중 한 사람이 학교 정문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 노목(老木-지금도 있음.) 뒤에 은신하고 밤에 사람의 왕래를 살피곤 하였다. 이 파수꾼 역할을 주로 기당이 전담하다시피 한 데서 연유한 고하와 기당 두 사람만의 유머였다. 이를 보면 고하는 동지에게도 이와 같은 유머로 대할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 p.168 이 사건의 불씨는 광주학생들의 의거에서 이루어졌으나, 이 의거가 전국으로 확대된 이면에는 고하의 역할이 아주 컸다. 1976년 10월 15일자 전남매일신문에 게재된 인물개화(人物開化)에서 최인식(崔仁植)의 술회를 일부 정리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 “당신들도 참 속이 없구려. 내게 무슨 돈이 있다고 이렇게들 찾아다니오? 남에게 돈 잘 주는 내 친구 호남 갑부 현준호도 이렇듯 쓸데없는 돈은 안 줄거요.” 고하의 고함소리에 아랫방에 있던 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화를 벌컥 내고 있는 고하를 말렸다. 최인식 등은 기분이 상했다. 평소 들어왔던 고하와는 태도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화가 난 이들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이들이 밖으로 나설 때 최인식의 등을 두들긴 고하가 호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 주었다. “저녁도 못 먹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구만.” 불만을 간직한 채 밖으로 나온 최인식은 고하가 조금 전 손을 넣은 호주머니 속을 살피니 3천 원이란 돈이 나왔다. 이들은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고하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인식 등이 요구한 3천 원은 현상윤, 최창학 등 사회 유지가 보는 앞에서 저녁밥 값이란 명목으로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 3천 원이면 서울서 5칸 기와집을 살만한 큰돈이었다. 장석천과 최인식 등은 이 돈을 1930년 1월 4일 일어난 전국 학생 사건 자금으로 사용했다. --- p.450-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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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하(古下) 송진우 선생의 일대기를 읽으며 고하야말로 오늘과 같은 난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제강점기에 해외보다 더 어려웠을 국내를 지키며 민족진영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했고, 해방정국의 혼란기에도 균형을 잃지 않고 국론통합을 위해 애쓰다 타계한 분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주동자요, 언론인, 교육가, 정치가로 국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여 대한민국의 터전을 닦은 위대한 지도자의 일생을 감명깊게 읽었다. - 조태열 (전) 주유엔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