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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출애서 익대공신으로
01. 이시애의 난 02. 낭관 03. 유자환 04. 남이 장군 05. 남이의 역모 사건 06. 의령 남씨 부인 07. 정숙공 08. 익대공신 09. 수난 10. 귀양 11. 유배 Ⅱ. 좌천과 복권 12. 서용 13. 서출 14. 장악원 제조 15. 보령 최씨 부인 16. 대간 17. 무오사화 18. 박논 19. 갑자사화 20. 중종반정 21. 탄핵 22. 가계 23. 졸기 24. 장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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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왕조는 신분 제약이 엄격한 유교주의 시대로 서출은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과거조차 볼 수 없었다. 유자광은 29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갑사의 낮은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면서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이 되었다. 유자광은 세조에 의해 벼슬길이 열리게 된 다음 해, 세조의 온양행차 시에 치른 별시에서 문과에 장원 급제함으로 정3품인 병조 참지에 오르게 된다. 유자광은 일부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남이 장군을 모함하여 죽였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남이 장군의 할머니는 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이며, 남이의 아버지와 세조는 사촌 간이고, 남이는 예종과 6촌이었기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유자광의 모함만으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행 호군이 되어 종성에 주둔하며 온성, 경원, 경흥 등의 고을을 다스렸으며, 군공을 인정받아 적개공신 1등으로 포상되고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명의 요동군이 남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건주여진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오자 강순, 어유소와 함께 윤필상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해 음력 12월, 27세의 나이로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겸사복장의 지위를 겸하였다. 이시애 난을 평정한 다음 해 5월에 서현정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이준만을 편애한다고 실언해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다음날 풀려났으며 겸사복장의 지위에서 파직되었다. 3. 정창손(鄭昌孫)은 의논하기를,“유자광은 공이 매우 큽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산지(散地)에 오래 둘 수 없으며, 징계하기를 이미 오래 하였고, 그렇다고 종사에 관계되는 죄를 범한 것도 아니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명회는 의논하기를,“유자광은 비록 죄가 중하나 공신이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원의 죄는 신하로서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재량하소서.”하고, 윤필상은 의논하기를,“유자광은 사직(社稷)에 공이 있으므로, 끝까지 버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산지에 둔 지 이미 오래이므로 반드시 마음을 고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극배(李克培)는 의논하기를,“남이의 역모를 만약 유자광이 적발하지 아니하였으면 그 화(禍)가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가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그 공이 족히 죄를 덮을 수 있으니,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