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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_ 수필은 삶의 끝날까지 가장 소중한 벗
1부. 엄마의 손수레 음치의 노래 / 어머님의 임종 / 나목 / 아버지 / 엄마의 손수레 / 엄마의 여덟 번째 기일 / 미안해요 고마워요 / 운전 연습 / 그랬구나 / 하루 여행 / 불〔火〕 / 꽃 마중 / 매리드 업married up / 낙조落照 2부. 노숙자와 와인 누름돌 / 일요일의 단상 / 5분의 기적 / 노숙자와 와인 / 아니, 사장님이! / 순간순간瞬間瞬間 / 소리길에서 듣는다 / 기적 / 가을 노을 속에서 / 내일이 없는 것처럼 / 하나가 된 세상 / 끈 / 오일장에서 / 비 오는 3일의 퀵맨 3부. 맨발로 맨발로 / 일상에서 / 삶 속의 옥시토신 / 새벽 / 고비苦悲와 성장成長 / 숨 고르기 / 맨발 1002번의 힘 / 통곡과 은총 사이 / 신발 한 짝 / 벚꽃 엔딩 / 대파 새싹 / 무청 시래기 / 고장 난 시계 4부. 우레시노의 달빛 매물도에서 / 삼청산과 황산 서해대협곡 / 우레시노의 달빛 / 무섬마을의 태극다리 / 미국 방문기 / 롤러코스터 / ‘사랑도’가 아니라‘사량도’이다 / 칠보산에 올라 / 빼래기 능선 / 남덕유산 1,507m / 보스톤에서 / 사문진을 걷다 / 단산지丹山池에서 발문 _ 임우희 수필집 『맨발로』에 부쳐/ 박기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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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라는 늪에 빠진 지 10년을 훌쩍 넘겼다. 처음에는 일기처럼 살아가는 이야기를 늘 적었다. 그러다가 대가족이 살면서 가족회의를 하고 또 적어놓았다. 등산을 갔다가 후기를 써서 카페에 올리면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고 기억해 주니 행복해서 매달 산행 때마다 후기를 썼다. 살아오면서 시부모님, 부모님, 형제자매 등 가족들의 일상이 수필의 재료가 되었다. 결국 삶의 순간순간 감정의 기록이 인생의 자양분이 된 셈이다. 즐거운 일도 죽도록 고통스러울 때도 그 감정을 낱낱이 적어 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재미로 변환되었다. 수필이란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면서도 행복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늘 현재를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간과 순간의 조화, 자정도 되고 승화도 되는 수필은 삶의 끝날까지 가장 소중한 벗이다.
---「머리말」중에서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오늘 같은 날은 잊을 수 없는 추억 하나가 슬며시 다가온다. 두 바퀴를 딛고 서 있는 엄마의 손수레다. 객지에서 건설업을 하셨던 아버지를 도우려고 생각해 낸 첫 차다. 아버지는 일 년의 반 이상을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셨다. 어린 4남매를 두고 떠나실 때마다 엄마는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 철없는 내가 아버지의 목에 매달려 떼를 쓰면 아버지 역시 묵묵히 고개를 돌리셨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느 날 엄마는 초등학생인 나와 남동생 둘을 앉혀놓고 손수레를 보여 주었다. 손수레의 두 바퀴는 아버지와 우리를 의미한다. 바퀴는 서로 돕지 않으면 굴러갈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힘들게 일하는 아버지를 돕도록 하자. 우리는 연탄 가게를 열기로 했다. 시골집 대문 기둥에 간판을 붙이고 나니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 하나가 마당까지 들어왔다. 연탄 한 차가 어찌나 많게 느껴졌던지 어린 나에게는 높은 산 같았다. 우리는 아저씨를 도와 함께 연탄을 창고로 날랐다. 온 얼굴이 금세 새까맣게 변했다. 엄마의 바지는 검정이라 표가 덜 났지만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깜둥이가 되었다. 차가 가고 난 뒤 엄마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우물가에서 우리를 씻겼다. 옷을 갈아입은 후 엄마는 부랴부랴 더운밥을 지었다. 우리는 커다란 양푼을 꺼내 마늘밭 사이를 덮은 짚 위에서 자란 시금치와 삼동 초나물과 된장, 고추장을 넣고 비벼서 먹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손수레 끄는 연습을 했다. 짚과 나무들을 싣고 엄마는 앞에서 끌고 아이들은 뒤에서 미는 연습이었다. 오르막길에서는 밀고 내리막길에서는 당겨야 했다. 우리는 시간 날 때마다 연습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엉거주춤 서툴렀지만, 횟수를 거듭하니 자신감이 붙는 것 같았다. 드디어 며칠 뒤 과수원을 하는 부잣집에서 연탄 주문 100장이 들어왔다. 우리는 50장씩 두 번 배달하기로 하고 자신만만하게 출발했다. 연습한 효과가 있는 것일까. 생각보다 순조롭게 잘 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내리막길이었다. 뒤에서 죽을힘을 다해 당겼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손수레 앞이 버쩍 들리면서 앞에서 끌던 엄마가 높이 매달렸다. 어-, 어-, 하는 사이 연탄 실은 손수레는 사정없이 길 아래 모내기한 논에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엄마도 손수레와 함께 논에 빠져 우리가 모두 달려갔는데 논이 깊어 넷이 다 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는 연탄을 뒤집어쓴 채 오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논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마침 그때 소달구지를 끌고 지나가던 이웃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저녁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논 주인집을 찾아갔다. 정성껏 모내기해 둔 논을 연탄을 실은 손수레가 망쳐 놓은 것이었다. 우리는 꿇어앉아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는 손해 난 것을 배상해 드리겠다며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섭게 생긴 그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웃음 가득한 얼굴로 다가오셨다. 온 가족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대견하다고 칭찬하면서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는 것이 아닌가. 그날 논 주인 집에서 얻어먹은 칼국수 맛은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1부 엄마의 손수레」중에서 당시 나는 세 번째 척추 수술을 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늘 서서 있거나 가벼운 운동을 해야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남편은 여자 혼자서 매장을 운영하는 일이라 걱정이 많았다. 화장실 갈 땐 문을 꼭 잠그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잠그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날도 화장실에서 돌아오니 매장 안에 오십 대로 보이는 한 노숙자가 들어와 있었다. 군용 야전잠바에 수염은 언제부터 길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배낭이 큼지막한 것으로 보아 노숙을 한 지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빗물이 발자국을 따라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줏값 2,000원만 주시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나는 왠지 두렵지 않았다. 지갑에서 3,000원을 꺼내 주었다. “소주 말고 라면이라도 사서 드세요.” 그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매장을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내가 불러 세웠다. “3,000원어치만 놀다 가세요.” 그제야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로 바라보았다. 선량한 눈빛이었다. “이런 꼴로 깨끗한 곳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저는 청소가 특기라서 아무리 지저분해도 후딱이랍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우선 따뜻한 홍삼차 한 잔을 내놓았다. “저랑 나이도 비슷하지 싶은데, 오늘 친구처럼 옛이야기 한번 해봅시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고객도 없답니다.” 냉장고에 있는 적포도주를 한 병 꺼냈다. 견과류 남은 것 몇 가지를 안주 삼아 투명 플라스틱 작은 잔으로 몇 잔을 나누어 마셨다. 내가 먼저 지난날 서럽고도 힘들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밖에서는 장맛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겨우 몇 잔의 적포도주가 그에게 과거를 털어놓게 한 것이었다.(중략) 2주쯤 지났을까? 여느 때와 같이 문을 잠그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탁자 위에 구겨진 과자 속 은박지가 있었다. 버리려고 하다가 무심코 펼쳐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장님, 꼭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토록 못난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을 해서든지 바른 사람이 되어서 찾아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3년 만에 매장을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 추석 무렵에 맞추어서 오픈을 했다. 손님들이 밀려왔다. 남편까지 동원되어 물건을 포장하고 고객을 맞는 와중에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신사가 익숙한 듯 인사를 먼저 한다. 매장에서 가장 비싼 천삼 10지(판매 단위)를 3개씩이나 주문했다. 그 물건은 지금 없고 한 단계 아래 상품인 천삼 15지뿐이라고 했더니 그럼 그걸로 달라고 했다. 고가의 고급상품이라 고객 등록을 요청했다. 그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기억 안 나십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으므로 미안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성함을 기억 못 하겠습니다.”라며 얼버무렸다. 뜻밖에도 3년 전 그 노숙자라는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우해줘서 결심하고 여러 친구를 만났다고 했다. (중략) 그 친구는 자네는 할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권했고, 지금은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홀로 계신 어머니와 딸도 만났다고 했다. 천삼은 친구와 사장님, 그리고 어머니께 드릴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2부 노숙자와 와인」중에서 지난달 산악회에서 앞산 자락길을 올랐을 때의 일이다. 봄에 때아닌 눈이 내려서 산중턱 위에는 눈이 쌓여 발이 빠질 정도였다. 한 회원이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발이 시리지 않으냐고 염려하면서 올라갔다. 그런데 그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려오는 길에 골짜기 물에 발까지 씻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후부터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시도해 왔다. 하지만 맨발 걷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쩐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자락길 이후 새벽에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맨발 걷기를 살짝 해봤다. 힘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발이 조금 따끔거리긴 하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2, 3일이 지난 뒤 발바닥을 보니 작은 물집이 굵은 발가락 밑에 소복이 생겨있었다. 부작용이 생길까 걱정은 되었지만 시작한 김에 조금 더 실행해 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발바닥을 살펴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물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어서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산에 맨발로 1시간 넘게 걸어보았다. 거뜬하게 걸을 수 있었다. 이젠 확신이 섰다. 기분도 좋고 잠도 훨씬 가볍게 잠들 수 있었다. 아스라한 추억 하나가 떠오른다. 유년 시절에 나는 몸이 허약해서 늘 보약을 달고 살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리를 절룩거려서 부모님 애를 태운 기억도 있다. 침을 잘 놓는다는 한의원에서 어른들이 내 몸을 꼭 붙잡고 대침을 놓은 적도 있었다. 무릎 사이에서 노란 물이 나오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아버지와 마을 뒷산에서 맨발로 매일 걸었다. 아버지는 다리에 근육이 붙으면 괜찮아진다고 말씀하셨다. 언젠가부터 바르게 걸을 수 있었다. ---「3부 맨발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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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적이다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하루를 또 받았다 “세 번째로 신장암 수술 때 내 몸을 잘못 옮기다가 건강한 척추뼈 4, 5번이 부러져서 ‘척추 전방 전위증’이란 병으로 발전되었다. 수술 후 앉아있기도 힘든 상황이어서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부러웠다. 오픈한 가게도 전망이 불투명했다. 날씨가 나쁘거나 운이 안 좋은 날에는 공치기 일쑤였다. 그가 처음 매장을 찾았을 때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실패가 어찌 그만의 전용물이겠는가? 누구나 밟을 수 있는, 지뢰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도 그때처럼 비가 내린다. 그도 나도 상처투성이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 인생의 고비 고비를 생각하며 적포도주 한 잔 따른다. 부디 이제 더 이상의 고통과 슬픔이 없기를 기원하며 행여 그가 오려나 바깥을 내다본다.”(p. 82~83, ‘노숙자와 와인’ 중에서) 비 오는 날 홍삼 매장은 유독 한가하다. 한 노숙자가 매장 안으로 들어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줏값 이천 원만 달라 말한다. 왠지 그 노숙자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던 저자는 매장을 나가려는 이를 불러 세워 적포도주 한 병 꺼낸다. 주고받는 술잔에 지난날 서럽고도 힘든 이야기도 같이 담겼다.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친 사람과 손대는 일마다 꼬이기만 해 노숙자 신세가 된 사람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아픔을 늘어놓았다. 못난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 줘서 고맙다며 바른 사람이 되어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노숙자는 3년 뒤 깔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되어 매장에서 가장 비싼 상품을 잔뜩 사갔다. 전망이 불투명하던 매장은 어느새 확장 이전하게 되었다. 임우희 수필가가 상처투성이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인생의 고비를 돌아보며 깨달은 것은, 실패가 누군가의 전용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객지에서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우려 엄마와 삼 남매가 손수레로 연탄 배달을 하다 논바닥에도 빠져 봤다. 팔 남매 맏며느리로 들어간 뒤에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유행성 출혈열로 심하게 앓아 집안이 뒤집히는가 하면, 시동생이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백혈병으로 갈 수도 있는 재생 불량성 빈혈에 걸려 분유 깡통에 코피를 흥건하게 흘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불이 난 날은 결혼 때 엄마가 만들어주신 솜이불에 물을 적셔 겨우 껐다. 이불도 몰골도 형편없이 망가졌지만 그 와중에도 모두 웃고 있었다. 결혼 13년째에 다섯째, 여섯째 시동생 결혼식을 25일 간격으로 치르게 되면서 무리한 탓인지 자궁내막증으로 대수술을 받았다. 퇴원 전 종합검사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신장암 말기였다. 여러 차례 수술을 받다 척추뼈에 금이 가는 사고도 당하고, 갑상샘 악성 종양으로 인한 수술로 통곡하기도 한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후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시도해 왔지만 맨발 걷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힘들면 그만둘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축복처럼 삶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저자는 오늘을 기적으로 여기며 맨발로 걷고 끝없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일을 배워 나갔다. 수필이라는 쉽지 않은 길도 저자에게는 행복이었다. 즐거운 일도 죽도록 고통스러운 날도 그 감정을 낱낱이 적어 나가며 삶에서 재미를 찾아간 것이다. 시부모님, 부모님, 형제자매, 남편과 아이들 등 가족과 함께한 일상도 수필의 재료가 되었다. 그렇게 써내려 간 50여 편의 글을 ‘엄마의 손수레’, ‘노숙자와 와인’, ‘맨발로’, ‘우레시노의 달빛’ 4부로 정리해 첫 수필집으로 엮었다. 오랜 투병 생활을 거치며 오히려 희망과 손을 잡고 삶의 자산으로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는 모두에게 그 희망을 전하는 일이 되어 방송까지 여러 번 나가게 되었다. 박기옥 수필가는 “같은 주제라도 나의 이야기로 적으면 일기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로 쓰면 수필이 된다”고 말한다. 나 자신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수필은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