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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정월. 풀패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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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이일상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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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에세이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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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각적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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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_ 화가로 어머니로

어머니로서

모(母) 된 감상기

부인으로서

이혼 고백장
이혼 고백서(속)

화가로서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나를 잊지 않는 행복
모델

독신자로서

신생활에 들면서

에필로그_ 잡감

저자 소개1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나혜석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4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164쪽 | 516g | 172*185*16mm
ISBN13
9791198596154

책 속으로

나는 다만 여러 부인들께 이러한 말을 자주 들어 왔을 뿐이었다. “여자가 공부는 해서 무엇 하겠소.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낳으면 볼일 다 보았지!” 하는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언제든지 코웃음으로 대답할 뿐이오, 들을 만한 말도 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럴 리 만무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것은 공상이 아니라 구미 각국 부인들의 활동을 보아도 그렇고 또 제일 가까운 일본에도 요사노 아키코(?謝野晶子)는 10여 인의 어머니로서 달마다 논문과 시가 창작으로부터 그의 독서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아니하려니까 그렇지? 다 같은 사람, 다 같은 여자로, 하필 그 사람에게만 이런 능력이 있으랴’ 싶은 마음이 있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잘 생각한 것 같았다.
--- pp.23~24

아이들아, 너희들은 일찍부터 역경을 겪어라. 너희는 무엇보다 사람 자체가 될 것이다. 사는 것은 학문이나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야 사는 것이다.
--- p.85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하게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혀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 pp.101~102

이와 같이 누가 시키는 일이나 하는 것같이 퉁명스럽게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두리라 하고 단념을 해 보기도 하고 ‘이 이상 진보치 못 할까? 아니, 못하리라’ 하고 무재무능을 긍정하여 절망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무슨 실낱같은 인연 줄이 끄는데 당기면 깜짝 놀라 ‘내가 그림 없이 어찌 살라고’ 하는 생각이 난다. 과연 내 생활 중에서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다. 사랑에 목마를 때 정을 느낄 수도 있고, 친구가 그리울 때 말벗도 되고, 귀찮을 때 즐거움도 되고, 괴로울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이 그림이다.
--- p.114

여자는 시집가서 자식 낳고 아침저녁 반찬 걱정하다가 일생을 보내는 범위를 떠나면 불행이라 한다. 그러나 그 범위 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 행복이고, 한번 그 범위를 벗어나서 그 범위 내에 있는 자를 보라. 도리어 그들이 불행하고 자기가 행복된 것을 느끼나니. 날마다 같은 생활을 되풀이하는 그 침체한 생활에 비교하여 시시각각으로 변천하는 감각의 생활을 하는 자기를 보라. 얼마나 날마다 그 인생관이 자라 가고 생의 가치를 느껴 가는지. 사람은 그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이 사는 시간이 아니요,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 사는 것이다. 세상에는 사회에 얽매이고, 친구 가족에게 얽매이고, 생활에 얽매여 그 몸을 옴치고 뛰지 못하는 자 얼마나 많은가. 실로 불행한 자로다. 한번 독신의 몸이 되어 보라. 그 몸이 하늘에도 날 것 같고, 땅에도 구를 것 같으며, 전후좌우가 탁 트여 거칠 것이 없이 그 몸과 마음이 자유롭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들이 못 하는 일, 그들이 못 하는 생각을 해 놓나니 역대의 위인 걸사 명작가들의 그 예가 많다.
--- pp.148~149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로 오거든 네 어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 다오.

--- p.156

출판사 리뷰

“내 앞에는 장차 더한 고통, 더한 희망, 더한 낙담이 있기를 바라며”
여성, 화가, 지식인 나혜석의 가장 입체적인 자화상

나혜석은 가장 혼란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며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여성이다. “남보다 더 한 가지 맛을 봄을 행복으로 안다”고 말하는 그는, 그림을 비롯하여 소설·산문·비평 등의 글로, 교육자로서 가르침으로, 독립운동으로… 자신의 한계와 틀을 만들지 않고 매순간 치열하게 살아갔다.

『경성에서, 정월.』은 정월 나혜석이 조선의 여성으로서 생생한 목소리를 내고, 지식인으로서 인생에 대해 통찰하고, 화가로서 분투한 작업기를 그리며 자신은 어떤 인간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 모습들을 솔직하게 담은 산문들을 엮은 산문집이다. “인생은 가정만도 인생이 아니오, 예술만도 인생이 아니다. 이것저것 합한 것이 인생이외다”라는 정월의 말처럼, 나혜석의 한 가지 면모에 집중하지 않고, 그의 ‘이것저것’을 조명해 나혜석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했다.

책은 크게 나혜석의 4개 정체성을 담았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그의 일상과 생각을 담아낸 산문을 선별했다. 어머니로서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 가는 악마”라며 모성에 의문을 던져 당시 조선 사회에 파장을 일으키고, “나는 좀 더 사회인으로 주부로 사람답게 잘 살고 싶었습니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그림보다도 그것을 그리는 동안에 형형색색으로 당한 사실이 나중에 생각하니 내가 승리자가 된 것 같아 참을 수 없이 유쾌하였다”라며 화가로서 궁리하고 발버둥 치다 마침내 성취감을 맛보고, “독신자처럼 불행하고도 행복스러운 자는 없다”라며 독신자로서 인생과 미래, 그리고 무엇보다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한다.

또한 생일을 맞으면 절에 간다거나, 절이 식사와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었다는 등 나혜석이 직접 말하는 그의 일상을 통해 100년 전 일제강점기 신여성·직업인으로서의 소소한 삶을 엿보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동기는 사람답게 잘 살자는 건방진 이상이
뿌리가 빠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정월 나혜석의 내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많은 고민과도 닿게 된다. 여성으로서의 삶, 자아, 인생, 인간관계, 사회, 행복, 성취, 업(業)… 100여 년 전의 그가 치열하게 숙고했던 주제는 여전히 우리도 싸우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도 작가는 사회나 성별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런 운명들은 순응하면 자신을 더 옭아매고, 힘껏 부딪치면 능히 깰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으로 그는 매순간 한계에 맞서고 ‘최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이렇게 자신답게, 사람답게 잘 살고자 했던 나혜석이기에, 또 그런 분투의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글로 표현했기에, 나혜석은 지금의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공감과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다 운명이다. 우리에게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순히 응종하면 할수록 점점 증장하여 닥쳐오는 것이다. 강하게 대하면 의외에 힘없이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_본문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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