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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의 말
의심의 소녀 경희 탄실이와 주영이 나의 어머니 소금 현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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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괴로움이 지나면 낙이 있고 울음이 다하면 웃음이 오고 하는 것이 금수와 다른 사람이다. 금수가 능히 못 하는 생각을 하고 창조해내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번 쌀, 사람이 먹고 남은 밥찌꺼기를 바라고 있는 금수, 주면 좋다는 금수와 다른 사람은 제힘으로 찾고 제 실력으로 얻는다. 이것은 조금도 모순이 없는 사람과 금수와의 차별이다. 조금도 의심 없는 진리다.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이철원 김 부인의 딸보다 먼저 하나님의 딸이다. 여하튼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의 형상이다. 그 형상은 잠깐 들씌운 가죽뿐 아니라 내장의 구조도 확실히 금수가 아니라 사람이다. --- p.61 나는 남만 못한 처지에서 나서 기생의 딸이니 첩년의 딸이니 하고 많은 업심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생장하는 나라는 약하고 무식하므로 역사적으로 남을 이겨 본 때가 별로 없었고 늘 강한 나라의 업심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벗어나야 하겠다. 남의 나라 처녀가 다섯 자를 배우고 노는 동안에 나는 놀지 않고 열두 자를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이 겉으로 명예를 찾을 때 나는 속으로 실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 지금의 한마디 욕, 한 치의 미움이 장차 내 영광이 되도록 나는 내 모든 정력으로 배우고 생각해서 무엇보다도 듣기 싫은 첩이란 이름을 듣지 않을 성숙한 여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러려면 나는 다른 집 처녀가 가지고 있는 정숙한 부인의 딸이란 팔자가 아니니, 그 대신 공부만을 잘해서 그 결점을 감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 --- p.141 오늘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대문이 닫혔으면 어떻게 하나. 어머니가 아직 주무시지 않으실까?’ 하는 걱정과 함께 ‘지금 내게도 돈이 월급처럼 꼭꼭 나오는 데가 있었으면…….’ 하는 엉터리 없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가라앉지 않는 뒤숭숭한 가슴으로 조심히 대문을 밀었다. 의외로 대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옳다, 되었다.’ 나는 소리 없이 살며시 대문 안에 들어서서 도적놈처럼 안방 동정을 살폈다. 안방에는 등잔불이 흐릿하게 낮춰 있었다. ‘어머니가 벌써 주무시는구나…….’ --- p.165 그는 잠깐 귀를 기울여 밖을 주의한 후에 가만히 손을 넣어 소금 자루를 쓸어 만졌다. 이것을 팔면 얼만가…… 팔 원 하고 팔십 전! 그러면 밀린 집세나 마저 물고…… 한 달 살까? 이것을 밑천으로 무슨 장사라도 해야지. 무슨 장사……? 하며 그는 무심히 만져지는 소금 덩이를 입에 넣으니 어느덧 입 안에는 군물이 스르르 돌며 밥이라도 한술 먹었으면 싶게 입맛이 버쩍 당긴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침을 두어 번 삼킬 때 소금이란 맛을 나게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나 소금이 들지 않으면 맛이 없다. 그렇다! 했다. 그때 그는 문득 남편과 아들딸을 생각하며 그들이 있으면 이 소금으로 장을 담가서 반찬을 해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그러나 그들을 잃은 오늘에 와서 장을 담을 생각인들 할 수가 있으랴! 그저 죽지 못해 먹는 것이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 p.237 “네? 선생님 저는 고로(苦勞)하지 않아요. 엄벙하고 지내요. 그렇지 않으면 살길이 없지 않아요?” “응 그렇지.” “그러므로 저는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보다 태연해요……. 나라는 여자는 고마운 일이 아니면 울고 싶지 아니해요. 남이 야속하게 한다고 울지 않아요!” --- p.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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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그녀들을 불온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그녀들의 문장을 읽는다 그들은 변화하는 시대의 물결을 누구보다 먼저 인식하고 받아들였으며, 이를 통해 순응적 여성상에서 벗어나 현실의 파도와 싸웠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가부장제와 남성우월주의 시대에 그들의 외침과 저항은 용납되지 않는 여정이었고, 비난의 대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한된 현실과 제약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나섰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에서 밀려난 이들의 삶을 건져 올리고, 고루한 벽을 부수고자 했다. 그렇게 근대의 물결을 배경으로 세상을 계몽했고, 소외되고 억압된 여성들을 대변하고 일깨웠다. 글쓰기를 통해 주어진 삶을 거부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했다. 딸과 아내, 어머니라는 전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자 한 그들의 무기는 문학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의 수혜자로서 글쓰기는 오랜 세월 순응해온 여성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리고 가정성의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절박한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글로 엮은 변화의 목소리를 광장으로 이끌었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문단에서 등한시되던 때, 우리나라 첫 여성 작가가 탄생했다. 1917년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가 『청춘』 현상 작품 모집에서 입선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고, 특히 의식 있는 이들은 대중에 영합하는 대신 당대의 모순, 차별과 편견, 시대적 가난을 자신만의 시각과 문체로 그려냈다. 그것은 여성이기 이전에 주체적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다짐이었으며, 남성과 동등한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기 위한 사명이었다. 그들 중에는 김명순을 비롯해 강경애, 나혜석, 백신애가 있다. 그들은 억압적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침묵하라는 사회에 저항했다. 그것은 해방을 넘어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고 자유를 찾고자 한 몸부림이었다. 억압적인 사회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기어이 일어섰고, 경직된 시대에 자기 목소리를 냈으며,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으며, 남이 아닌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했다. 세상은 그들을 급진적이거나 사회와 융화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터부시했다. 때로는 자기 검열에 시달려야 했고, 사회적 낙인을 안고 살아야 했으며, 정신적 고통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지워졌지만, 그들이 남긴 글은 기어이 살아남아 우리 곁에 다가왔다. 첨예한 삶을 살며 시대에 던진 질문들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사회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자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자 했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길을 찾고 있을까?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