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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사람이외다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의 고백
드레북스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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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에세이 49위 여성 에세이 top100 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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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는 글

1장_우리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이상적 부인
혼인론, 여권론
K언니에게 여(與)함

2장_더 단단히 살아갈 길

모(母) 된 감상기
백결 선생에게 답함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3장_나를 잊고 어찌 살 수 있으랴

우애결혼, 시험 결혼
나를 잊지 않는 행복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4장_여자도 다 같은 사람이외다

이혼 고백서

5장_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신생활에 들면서
구미 여성을 보고 반도 여성에게
독신 여성의 정조론
영미 부인 참정권 운동자 회견기

저자 소개2

Na Hye-seok ,晶月 羅蕙錫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 1896∼1948)은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부 나기정과 모 최시의 사이에서 5남매 중 넷째, 딸로는 둘째로 태어난다. 부 나기정은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 관료였다. 나혜석의 초명은 아지(兒只)였고, 진명여학교 입학 시 명순(明順)으로 불렸으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때는 혜석으로 개명한다. 1913년 3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시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 선과 보통과 1학년에 입학한다.

1914년 12월 도쿄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제3호에 최초의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고,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와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15년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11월 복학하면서 고등사법과 1학년으로 전입했으나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12월 아버지가 사망하고, 애인 최승구는 결핵에 걸려 귀국하여 요양을 한다.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뒤 오빠 경석의 강력한 권유로 김우영과 교제를 시작한다. 1918년 3월 [여자계] 제2호에 나혜석의 대표작이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하고, 'H.S.'라는 필명으로 시 「광(光)」을 발표한다.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건강이 안 좋아 그만두고, 집에서 그림 공부를 한다. 9월 [여자계] 제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한다.

1919년 3월 박인덕 한신준려 한황애 시덕한 김마리아 등과 3한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의논하고, 개성과 평양으로 가서 자금 모금과 만세 운동 확산을 위해 이정자 한박충애와 만나 의논한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풀려난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하고 그와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온다. 1921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개인전람회를 연다. 4월 첫딸을 낳고, 7월 [신가정] 창간호에 「규원」을 발표한다.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로 이주하고, 1922년 3월 여자 야학 설립을 주도한다. 6월 조선총독부 주최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유채수채화 분야에 출품한 「봄」, 「농가」가 입선한다.

1923년 1월 첫딸을 임신하여 낳고 돌이 될 때까지의 심리적·육체적 변화를 솔직히 기록한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한다. 6월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봉황성의 남문」이 4등, 「봉황산」이 입선한다. 이후 해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를 출품하여 입선하며,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천후궁(天后宮)」이 특선, 「지나정(支那町)」이 입선한다. 1926년 4월 [조선문단]에 『원한』을 발표한다.

1927년 만주 안동현 살림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동래 시집에서 지내다가, 6월 남편과 함께 구미 여행길에 오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다. 스위스한벨기에한네덜란드 등을 여행하고, 법률 공부를 위해 남편이 베를린으로 간 사이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인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면서 그림 공부를 한다. 10월 천도교 도령(道令)으로 파리에 온 최린을 만나 예술을 논하고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연애 관계를 맺는다. 1929년 귀국하여 9월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연다. 1930년 김우영이 서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나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이혼한다.

이후 나혜석은 실의를 딛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여 계속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32년 금강산 해금강에서 제13회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다가 불의의 화재로 10여 점밖에 건지지 못해 충격을 크게 받는다. 1933년 생계와 그림 활동을 위해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열고 운영한다. 1934년 김우영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기까지의 개인적인 생활과 심경을 솔직하게 서술한 『이혼 고백장』([삼천리], 1934. 8∼9)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언론인으로 파격적인 작품과 사회 비판적 주장을 통해 봉건적 제도와 인습이라는 금기에 도전했다.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남기며 가부장제 타파와 여성 의식화에 주춧돌을 놓았다.

나혜석의 다른 상품

경복고등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에 몸담았다. 이다북스에서 출판 기획자로 활동하며 에세이집 《마흔의 봄》을 썼고, 《나혜석의 고백》 《방정환의 어린이 찬미》 《나운규의 말》 《한용운의 나의 님》 《잎이 푸르러 가시던 님이》 등을 엮었다. 현재 드레북스 대표로 일하고 있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에 몸담았으며, 현재 이다북스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다. 에세이집 『마흔의 봄』을 썼으며, 『나혜석의 고백』 『나운규의 말』 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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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7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123*188*20mm
ISBN13
9791193946053

책 속으로

시간이 촉박한데 어떻게 나를 기다려 달라 하겠고, 무슨 심사로 남 가는 것을 시기하겠소? 너 잘 가는 것이 내게도 영광이요, 나는 못 가더라도 너만 무사히 도착되어도 좋다. 허나 너무 달음질 말고 이따금 뒤 좀 돌아보아주오. 올라가지 못할 곳에는 손목도 좀 끌어주어야겠소. 다리가 아파 주저앉을 때 가야만 할 이유를 설명해주어야겠소. 믿건대 먼저 밟으시는 언니들이여! 푹푹 디디어 뚜렷이 발자취를 내어주시오. 좀체름하게 또 눈이 오더라도 그 발자국의 윤곽이나 남아 있도록. 깔려 있는 백설 위로도 만곡 요철이 보이건만 그 속에 묻혀 있는 탄탄대로는 보이지 않는구려.
--- p.25

남들의 욕과 칭찬은 이러하외다. 학문이 없다, 견식이 좁다, 용기가 없다, 기술이 부족하다……. 이런 욕을 먹습니다. 활발 영리하다, 웅변가다, 문장가다, 과학적 사상이 있고 철학과 이성을 가졌다……. 이런 칭찬을 듣는구려. 우리는 무의식중에 얌전을 부리나 남들은 의식으로 얌전을 부리고, 우리는 남의 흉내로 공손을 차리나 남들은 자각을 가지고 공손하는 것이외다. 우리는 남자를 원수같이 알고 남녀 양성 간은 육체로만 결합되는 줄 아는데 남들은 남자를 이해해 남성의 특징을 내가 취하기도 하고 여성의 장점을 그에게 자랑도 해 남녀 양성 간에 육(肉) 외에 영(靈)의 결합까지 있는 줄을 압니다.
--- p.31

“남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여자도 능히 이해할 수 있다. 이로 추리해볼진대 여자의 본성적 이론, 즉 심리적 작용에는 조금도 남자와 다름이 없다. 일용의 직분에 이르러서는 혹 차별이 생길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아! 껍데기만 살지 말고 영혼이 있을지어다.” 절규함이 20세기 여자의 무대요. 언니! 우리 조선 여자도 이 무대상에 참석할 욕심을 가져야 할 줄 알아요. 루소의 말이“ 나는 학자와 장군을 만드는 것보다 먼저 사람을 만들겠다.” 했다 하오.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소. 내가 조선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아야겠소.
--- p.35

나는 할일이 많았다. 아니 꼭 해야만 할 일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내 눈이 겨우 좀 뜨이려고 하는 때였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
--- p.47

나도 신여성으로 자처한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신인이라고 해주는 것을 별로 영광으로 알지 않는다 함이외다. 나는 사상가도 아니요, 교육가도 아니요, 예술가도 아니요, 종교가도 아니외다. 다만 사람의 탈을 썼고, 여성으로 태어났으며, 사랑으로 살아갈 도리만 찾을 뿐이외다. 혹 다른 때 인연을 맺게 되더라도 명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씨여, 사상적 방황이란 그다지 못된 일이오니까? 방황해야만 할 때 방황하지 말라는 것은 못된 일이 아니오니까? 그다지 조바심을 내어 걱정할 것이야 무엇 있으리까? 방황도 아니 하고 고정부터 하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화석의 그림자나 아닐까요?

--- p.81

출판사 리뷰

왜 여성의 희생은 당연해야 하는가
나혜석의 《여자도 사람이외다》

1922년 〈모(母) 된 감상기〉에서 나혜석은 어머니가 되는 과정과 심정을 말하며 여성 고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이 글은 모성의 가치를 언급하고 옹호하면서도 출산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고,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글을 지면에 실린 후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실린 〈이혼 고백서〉는 〈모(母) 된 감상기〉에 대한 비난 수위를 훨씬 뛰어넘었다. 결혼에서 이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 이 글에서 이혼 과정에서 남성들의 편협함을 읽고,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정조 관념을 강요하는 사회와 부딪쳤으며, 여성들이 현모양처라는 경직된 틀에 구속당하는 시대에 저항했다. 〈이혼 고백서〉는 그가 경직된 사회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으며, 그 때문에 얼마나 저항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그것은 그만의 일이 아니었다.

새롭게 되살려낸 나혜석의 삶과 꿈
남성 중심 사회에 맞선 불꽃 인생!

우리나라 여성 중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신여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웠고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재능은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18년에 조혼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을 비판한 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작가로도 남다른 재능을 키웠다.

그는 화가와 작가이기 전에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이자 여성의 권리를 찾고자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따가운 시선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사회와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은 인형이 아닌, 여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히 살고자 한 바람이자 실천이었다.

그렇게 시대를 뛰어넘었고, 지금 우리 앞에 살아 돌아왔다. 사회는 그를 고립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저항과 도전은 시대를 앞서가는 용기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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