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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퀴어 정체성 그리고 사랑의 좌절
왕자 없는 세계에서 공주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제 어른이 된 작가는 퀴어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예술적 모티프로 적극 활용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다. 사랑하는 이웃집 소년에게서 받는 적대적인 눈빛과 거칠고 단단한 남성성을 칭송하는 아버지는 게이 소년 루루가 결코 진입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 루루는 축구와 캠핑, 총, 전쟁놀이 같은 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세계는 루루에게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요요도 돌아가고 난 뒤, 절망에 빠진 루루는 누나 방으로 간다. 그리고 게이가 뭐냐고 묻는 남동생에게 누나가 말한다. “게이는 남자아이가 다른 남자아이랑 사랑에 빠지는 거야. 그리고 쉬운 일은 아니지.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흠이 되는 세계라니, 미처 내뱉지 못하는 복잡한 말들을 뒤로 하고 누나는 동생을 꽉 껴안아준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모든 게 변하겠지만 꼭 서로 껴안고 있으면 다 잘될 거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에는 엄마와 누나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 인사가 담겨 있다. “조용히 싸우면서도 종종 남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누나들과 어머니”는 다름 아닌 현실 속 공주들이다. 이 공주들은 용을 물리치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용을 견뎌온 영웅이었으며 왕자의 구원을 기다리는 대신 다른 공주들과 손을 잡는다.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속 엄마와 누나는 모두 사랑의 좌절을 겪는 인물들이다. 엄마는 완벽한 가정을 꿈꾸었지만 아빠는 밖으로 나돌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고, 누나가 진짜 사랑이라고 믿었던 상대는 연인의 고통이나 조심스러움을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남자다. 여름 햇볕에 잔뜩 달구어져 상처 입은 누나의 피부는 공주 판타지가 갖는 연약함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뜨겁게 열을 내뿜는 피부도 시간이 지나면 진정되고 마침내 회복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듯이, 여전히 삶은 계속될 테니까. 엄마는 자신이 입었던 웨딩드레스를 자르고 꿰매어 루루에게 새 드레스를 선물한다. 사실 옛이야기에는 공주 말고 바느질하는 여성 인물도 곧잘 등장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구원한다. 엄마가 루루에게 하는 일도 그와 같다. 공주가 되고 싶은 아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세간의 지나친 관심과 몰이해, 악의였다. 루루가 죽은 공주도 예쁜 드레스를 많이 입었느냐고 묻자 엄마는 다이애나가 바지 정장도 많이 입었으며 누구나 입고 싶은 옷을 입어도 된다고 말한다. 바지를 입은 공주와 드레스를 입은 소년. 누군가 손가락질하더라도 입고 싶은 옷을 마다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이제 세 가족은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한다. 아버지의 부재는 결핍이 될 수도 있지만 모두가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행복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옛이야기의 해피엔딩을 바라는 대신 누더기 차림의 공주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왕자는 공주에게 진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아니, 세상의 모든 공주에게 왕자가 반드시 필요할까? 그리고 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잘 짜인 서사와 겹겹이 자리잡은 상징과 은유,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림 등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는 우리가 그래픽노블에 바라는 종합예술의 매력을 잔뜩 품고 있는 책이다. 여성과 퀴어, 가족, 어린이의 세계와 사랑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