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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회색 지대에서1. 나무 이야기나무 작업자의 아포리아 확신에 가득 찬 얼굴에서는 윤이 난다교복 입은 학생의 등굣길만 같아라그 많던 작품은 다 어디로 갔을까나 홀로 작업실에, 너 홀로 작업실에2. 작업실 일대기를 쓴다면달과 6펜스좋은 물건과 좋은 관계를 맺는 삶정신과 시간의 방사물을 빚고, 만드는 삶나오시마에서 너에게3. 봄을 준비하는 겨울나무매서운 현실봄을 준비하는 겨울나무처럼예고편 없는 드라마속초에서 온 소녀이화에 월백하고아날로그 손맛4. 좋아하는 일을 제법 잘하고 싶다산벚나무 시계함스승님의 작업실톱밥과의 전쟁아버지의 시선안전 목공 합시다엄마의 식탁5. 삶의 경이마지막 작품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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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자연계로 상징할 수 있다면 단연 나무이길 바랐다”삶과 작업의 일치를 꿈꾸다함혜주는 자신을 ‘목수’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한다. 나무를 좋아하고, 나무가 자신과 잘 맞는 재료라고 확신하지만 가구를 만들어 상품으로 파는 일을 생업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무의 속성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무라는 매개체에 담아 전하고 싶어 한다. 이에 ‘나무 작업자’ ‘목조각가’라는 이름을 더욱 편안하게 여긴다. 함혜주가 특히 매력을 느끼는 작업은 ‘아트퍼니처’로 일상에서 접하는 생활 가구와는 다른 자유로운 형태와 크기를 지닌, 디자인과 예술을 넘나드는 가구를 가리킨다. 그러나 아트퍼니처 작업에만 몰두하기에는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꿈꾸던 작업자의 삶을 시작한 후에도 대출금 상환과 생계유지라는 현실 앞에서 원하는 만큼 작업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함혜주는 정부의 창업기반지원자금을 받아 작업실을 꾸린 뒤 밤낮없이 일하며 대출금을 상환했다. 대출 이자가 낮아 바로 갚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함혜주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즉 그에게 직업이란 생계 수단을 넘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 삶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기반이다. 살아가는 방식이 작업 방식과 일치하니 조각은 나의 기질과 가장 잘 맞는 작업이었고, 재미난 고통이자 비명 같은 환호였다. 일이 있든 없든, 시간에 쫓기거나 누군가가 재촉하지 않는데도 계속 깎았다. 자발적으로 주도하는 것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일방적으로 작업에 의지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만큼 이 일은 나와 밀착되어 있었다. _112쪽나무를 다루는 일을 하며 겪는 어려움은 생계뿐만이 아니다. 목공은 여전히 남자들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크기에 당황스러운 일을 겪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목재를 배달하는 화물 택배 기사의 의아한 눈빛, 작업복 광고모델로 섭외되었지만 정작 여성 사이즈의 작업복은 판매하지 않아 살 수 없었던 일화, 여성으로서 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는지 매번 묻는 인터뷰 질문까지 함혜주는 자주 자신이 여자임을 실감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직 여성 목공 작업자가 낯선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이 변화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매 인터뷰마다 신중하게 답변을 쓰곤 했다. 자신의 일을 성실하게 함으로써, 여성의 직업에 관한 인식을 넓혀가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탐색할 때 자신이 알고 있는 비슷한 대상을 비교군으로 삼고 관찰하고 정의한다. 남자 화가에 기준을 두고 여자 목수를 정의할 수 없듯이 여자 목수의 비교 대상은 필연적으로 남자 목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껏 숱하게 받아온 질문들은 이전부터 분명히 존재해왔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그들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아직은 낯설어서,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몰라서, 궁금해서, 알기 위해서 비슷한 대상과 비교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_58쪽홀로 작업실에 있지만혼자 일하지는 않는다주로 홀로 작업실에서 일에 몰두하는 시간이 많기에, 함혜주에게 작업하는 동료의 존재는 각별하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나무’라는 공통점은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해준다. 함혜주는 스승과 동료들을 통해 작업하는 마음을 새롭게 다잡고, 더욱 성숙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다지곤 한다. 목공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은 고되지만, 곁에 동료가 있다면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 고독과 자부심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깨달음 덕분이다.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고될수록,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고 해낸 자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특히 목수의 자부심이 그렇다. 애석하게도 부단한 노력 끝에 체득한 기술은 목수의 기본 소양일 뿐 자랑거리는 아니다. 나무라는 재료를 가지고 일상의 사물을 만들기 위해 갖춰야 하는 능력이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_205~206쪽함혜주의 일상은 단조롭다. 번거로운 일을 벌이지 않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작업실에 오가는 루틴을 지킨다. 작업할 시간을 1분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아직 젊은 작업자이지만, 마음껏 작업을 하기에는 생이 짧다고 느낀다. 조급함 느껴질 때마다 함혜주는 종종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를 떠올리며 그들의 마지막 작품을 생각한다. 자신 역시 생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평생 그려왔던 ‘그 작품’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 다짐한다. 전 생애를 공들여 작품에 바치는 삶, 함혜주가 나무를 다루며 꿈꿔온 일과 삶일 것이다. 시간을 들여 깊어져갈 한 ‘장인’의 세계를, 이 책을 통해 미리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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