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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펴내며 002
제1부 만남과 삶의 변화 만남과 삶의 변화 009 회의와 확신의 오솔길 013 자기모순과 절망과의 싸움 016 삶은 은총이요, 선택이요, 소명이다 019 예술과 신앙 022 예술가의 보람과 소명 025 거룩함과 아름다움 028 제2부 유동식, 조향록, 모차르트, 바르트, 키르케고르 신앙과 학문과 예술의 眞如人, 素琴 유동식 선생을 기리며 035 蘭谷 조향록 목사, 그 지극한 삶을 기억하며 040 바르트와 모차르트 046 키르케고르와 바르트 051 키르케고르를 생각한다 056 제3부 신학 노트 기독교 인간학의 근원과 출발 065 몰트만 신학의 초점 095 참여신학의 선구자, 長空 김재준의 신학 119 선교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의 선교구조 1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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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읽은 한 칼럼이다. 2차 세계대전 시 폴란드 전선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된 폴란드 장교들이 처형과 노역(奴役)에 죽어 가는 처지에서도 일과 후에 모여 서로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다는 전기(傳記)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이야기는 나의 기억 속에 꽂혀 있다. 영하 45도의 혹한 속에서 온종일 이어지는 노동으로 몸이 녹초가 된 사람들이 저녁이면 모여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그들이 처한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신세계’와 ‘예술세계’를 공부했다. 그것은 그들이 밥만 먹고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정신을 지닌 사람이며 영적인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이야기는 노년을 사는 나에게 여전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흔히 우리는 공부해서 어디에 쓸 것인가를 반문하며 유용성과 실용성을 따진다. 그러나 공부는 써먹을 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일 것이다. 인생의 긴 순례길에서 삶의 의미와 무게를 거듭거듭 반추하며,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순례의 여정은 계속돼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필자가 정년퇴임 후 발행한 계간 『성서와 문화』에 실은 글과, 재직 시에 쓴 글 중 몇 편을 『순례길 노트』라는 제목으로 묶은 것이다. 엮어진 글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대화의 씨앗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p.2 성서는 인간의 삶을 여러 모양으로 특징지어 말한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은총이요, 선택이요, 소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언제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갖게 한다. --- p.21 바르트는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많은 신학적 암시를 받았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듣게 하듯 바르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근원적인 객관성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자 했으며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사고(思考)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가 성서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주관과 객관을 통합하는 하느님의 계시(啓示) 즉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모든 신학적 논의를 하고자 했다. --- p.49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정통주의적 근본주의 신학의 비판적 극복을 통해 장공은 교회(교단)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나아가 교회의 본질에 입각한 교회의 갱신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신학적 투쟁 자체가 이러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별히 1950년대의 장공에게 있어서 주된 관심사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려는 것과 교회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장공은 그의 미국 유학 생활을 통해 그의 인격과 신앙에 영향을 주고 자극을 받았을 뿐 아니라 신학적 무장을 하게 한 것은 주로 예언자 연구였다. 그것은 그의 학위논문의 주제나 귀국 후 3년에 걸쳐 발표한 주요 논문이 예레미야, 아모스, 이사야 등의 예언자 연구에 관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 p.1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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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와 확신의 오솔길’, ‘긍정과 부정의 샛길’을 간다는 것은 얼핏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러한 양자의 길이란 우리네 삶의 굽이굽이마다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인생길에서도 때로는 아주 큰 파장으로, 때로는 작은 파장으로 다가오는 것이 ‘회의와 확신의 오솔길’이다.
거룩함이 종교적 개념이라면 아름다움은 예술적 개념이다. 학자들은 종교와 문화예술은 한 뿌리에서 난 두 문화현상이라 한다. 즉 문화예술의 뿌리는 종교요, 종교의 꽃과 열매는 문화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둘이면서도 하나이며, 하나이면서도 둘의 관계이다. 즉 거룩함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아름다움 속에 거룩함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에서 이 양자를 동시에 경험하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종교와 문화예술이 별개의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기에, 오늘에 이르러서는 동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양자가 새로운 관계에서 만나야 한다. 이 양자의 만남과 화해만이 오늘의 인간 영혼을 총체적으로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