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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침술
재야 조선 침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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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발간사] 절멸 위기 조선 침구사 구하기
[발 문] 침구사 가문을 자랑하며-박석무(다산학자. 우석대 석좌교수)

제1장 스승님의 마을

옛 스승 자취 찾아 순창으로
면장이 기억하는 침술 명인 20
마을 곳곳에 인술 베풀던 흔적들 24
사부님은 사문(士文) 최정현 선생 34
놀랍고 신통한 침술 목격담 36
전주 최씨 가문의 침구술 전승 내력 42
침술 동문 최광표 선생
조선시대 침구술을 전수 받아 52
목포 원정 왕진 중 여인을 만나 59
‘무면허’ 벌금에 대한 '항거'? 61
"유명해지면 이동해야 했어요" 65
급할 때마다 찾은 마을 침구사 78
인류 살릴 인술자의 부활을 기원하며 89
최갑식 군의 '진품명품' 침구학습노트
양씨 가문의 침 할아버지
침술과 접골에 능한 양용모 선생 105
침술로 맺은 손주 며느리는 밥상 차리고 109
옥천(순창) 조씨는 내의원 침의 가문
순창 조씨와 전주 최씨 선조들의 교류 113
전래 고서에서 찾아낸 필사 침구법 119

제2장 가업을 이어라!

전남 무안 그때 그 시절에
얼굴도 모르는 신랑에게 가마 타고 오신 어머니 127
혼란의 시대 너머 잡은 침
'좌-우 전쟁' 중 살아는 남았지만 ... 133
아버지의 가출 136
어머니 심부름 138
다른 어머니가 낳은 동생 옥자를 찾아서 139
양동시장 다마네기 아저씨의 침술 142
학문 교류하던 유학자 을구(乙龜) 145
가업이 된 아버지의 침술원
5대조 이어온 가문침술의 내력 149
할아버지들의 학술 교류 153
운명으로 하게된 침구 가업 154
아버지의 침법으로 하루 250명 156
"침구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라!"
허리 통증에 침 맞고 침술에 관심 164
4.19혁명 시기 서울로 침구 유학 167
최사문 사부님을 만나
조선 침술 배우고 익히기 182
끝없이 탐구하는 인술자 193
침구사의 길에 들어서
신부 치료하자 맞선 자리 소개 199
근골격계 증상 섬마을 사람들 200
염전마을 왕진 소금사업으로 집 마련 202
죽을 것 같던 동생 살린 아버지 침술 203

멀어져가는 침구사의 길
합동 단속에 아버지 대신 '수갑' 212
침구학원동창회 침구사 입법운동
이 땅에 하늘은 없는가? 218
진로 막힌 청춘의 삶
맛선 보고 13일만에 결혼 227
서울에서 가전제품 판매업 시도 232
광주에서 한약방-약국 경영으로 한 시절 234
너, 그럼 빌어먹어야!, 천주교 입교 237
단속 가운데서 이어온 가업
혈서 ‘법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240
60년대~70년대 침구사법 입법안 경과 245
아버지도 침술연합회 회원 247
침구사 면허증 위조사건 251
위조 면허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 아버지 255
계속되는 수난, 아버님은 나주 남평으로 257
80년대 침구사 '희망 고문'
보사부 유사의료업자 양성화 발표 260
무면허라는 이름의 감옥에서
한의사협회가 보낸 프락치 270
벌금 3백만 원에 보호관찰 3년 272
침구 유업 물려주고 떠나신 부모님
"침술 인정 받는 날 올 것이다!" 276
2002년 갑기 어매 정애진 여사 별세 282
침술인 집안의 며느리 287
부모님 떠나신 자리에서 288

계승 발전시켜온 가문의 유산
침술과 부항으로 근골격계 치료법 291
삔 발목 염좌와 후유증 치료 297
침으로 비염 치료하는 법 300
전립선 치료하는 침술 302

제3장 백발이 되어

대를 이은 침구사 제도화 운동
전통침술사 민간자격 시도 308
헌법재판소, 침구사 필요성 인정 310
늙은 침구사의 눈물 317
2014년 또 실종된 '김갑기 군의 꿈' 323
“침뜸은 평생교육 대상” 판결 이후 생긴 일 329
불멸의 침구사를 위하여
국사편찬위원회 기록으로 남아 336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아버지와 스승님 343
후학들을 위한 응원
조선침뜸의 큰 스승, 허임 선생께 349

[채록 후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역사 발굴

저자 소개3

1943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유학자 집안 출생. 1960년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침술 펼치던 부친이 “침구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라”고 권유하여 서울로 유학, 1961년 관인 대한침구학원을 수료했다. 1962년 광주에서 부친을 도와 침술치료를 시작하면서 순창의 침구의원 최사문, 종조부 김예형으로부터 전통 침술을 체계적으로 전수받고, 인근 지방을 순회하며 침술을 했다. 1968년에는 대한침구학원동창회 전남지부 총무부장을 맡아 침구인 조직화에 힘쓰며, 침구사 제도 시행 활동에 참여했다. 1968년 전남 고흥 출신의 이정엽 여사와 결혼했다. 1969년에는 침
1943년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 유학자 집안 출생. 1960년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침술 펼치던 부친이 “침구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라”고 권유하여 서울로 유학, 1961년 관인 대한침구학원을 수료했다.
1962년 광주에서 부친을 도와 침술치료를 시작하면서 순창의 침구의원 최사문, 종조부 김예형으로부터 전통 침술을 체계적으로 전수받고, 인근 지방을 순회하며 침술을 했다.
1968년에는 대한침구학원동창회 전남지부 총무부장을 맡아 침구인 조직화에 힘쓰며, 침구사 제도 시행 활동에 참여했다. 1968년 전남 고흥 출신의 이정엽 여사와 결혼했다.
1969년에는 침구사 제도 시행이 지체되자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침구학원동창회를 중심으로 하는 침구사 제도화 투쟁에 참여했다.
1972년부터 침구학원동창회(1973년 한국침술연합회로 개칭) 전남지회장을 맡아 침구사 제도화를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1973년부터 지인과 한약방 공동경영을 하기도 했고, 1975년부터 광주에서 약사인 사촌 형제와 동생과 함께 10여년 간 약국을 경영하며. 부친의 침술원 일을 도왔다.
깁갑기 본인과 부친과 모친는 1960년대 중반부터 ‘무면허 침술’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고발을 당했다. 1997년에는 벌금 300만원에 보호관찰 3년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침구사 제도화를 위한 활동을 하며, 선대로부터 이어온 조선 전통 침법의 맥을 잇는 일을 해나가려 하고 있다.

정리유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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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법률학과 졸업. 한국가톨릭 농민회,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등에서 책임자로 활동하며, 농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해왔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사)현대사기록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사회 각계 인물들의 생애와 활동을 채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손중양 허임기념사업회 이사장과 대학 동문인이라는 인연으로 2000년대초반부터 '침뜸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였고, 2007~2010년 허임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는 봉사활동단체인 모듬살이연대 대표를 맡고 있다.

정리손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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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생으로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던 중 81년 전두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옥고를 겪었다. 『월간 말』 편집차장을 지낸 바 있고, 1992년 경실련에서 시민단체 공동신문 [시민의신문]을 창간,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침구사 김남수 선생을 인터뷰 하여 [시민의신문]에 보도하면서 침뜸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뜸사랑 사무국장과 정통침뜸연구소 상임이사를 맡아서 '침뜸 살리기 활동'을 전개해 왔다. 2005년부터는 조선의 침의 허임의 생애에 관해 조사ㆍ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는 한
1958년 생으로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철학과를 다니던 중 81년 전두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옥고를 겪었다.
『월간 말』 편집차장을 지낸 바 있고, 1992년 경실련에서 시민단체 공동신문 [시민의신문]을 창간, 편집국장으로 활동했다. 1999년 침구사 김남수 선생을 인터뷰 하여 [시민의신문]에 보도하면서 침뜸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뜸사랑 사무국장과 정통침뜸연구소 상임이사를 맡아서 '침뜸 살리기 활동'을 전개해 왔다.
2005년부터는 조선의 침의 허임의 생애에 관해 조사ㆍ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는 한편,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를 설립해 현재 대표이사로 활동하며 생명건강문화의 창달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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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58쪽 | 654g | 150*225*30mm
ISBN13
9791187828099

출판사 리뷰

5대를 이어오며 150여 년을 침구술로 활인 공덕을 쌓아 온 의업 가문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그들은 가난한 환자는 무료로 치료하고 여유가 있는 환자들에게는 약간의 치료비를 받으며 인술을 베풀어 왔다. 그야말로 옛날 옛적부터 수많은 곡절과 기적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져 왔지만 이제는 모두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김갑기 선생과 그의 스승 사문 최정현 사부님 가문의 침술은 보통 한 곳, 많아야 두세 곳에 침을 놓아 병증을 치료한다. 이렇게 한두 개의 침만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비결은 정확한 혈을 찾아, 정성을 다하는 손기술로 확실하게 보사(補瀉)를 하기 때문이다. 즉 침 한대를 가지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주어 신체 장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특히 『가문의 침술』보사법은 음양의 이치를 철저히 고려하고, 엄지와 검지로 침대를 잡고 호흡에 따라 시계방향 또는 반대 방향으로 염전하며 기운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이는 허임 선생을 비롯한 조선의 침의(鍼醫)들이 수많은 병자를 치료한 바로 그 침법이다.

어렵게나마 음지에서 조선의 정통 침구술을 전승해온 침구사들은 재야에서 수난을 겪어오다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가문의 침술』은 이 조선 침구사 가문의 침구 비술 전승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재야 침구사의 한 많은 사연을 담았다.

김갑기 선생은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침구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관인대한침구학원을 수료, 침구사 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5.16 군사정부에 의해 시험을 볼 수 있는 길이 막히고, 그 후 6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무면허 침술'로 전과가 쌓이고 쌓여 보호관찰 대상까지 되었다. 그는 곧 될 듯 될듯한 침구사 시험을 고대하다 이제 백발이 되고 말았다.

침구사 면허제가 봉쇄된 상태에서 ‘무면허 침구술’의 단속 대상이 되어온 재야 침구사들. 침구술의 맥을 이으려는 침구인들의 수는 여전히 수만~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침구사 제도 시행을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다.

『가문의 침술』은 호남의 조선 침구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침구 비술과 재야 침구사 수난의 역정을 현장 취재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앞 부분에서 김갑기 선생의 스승인 사문 최정현 선생 집안 전주 최씨 가문에서 5대를 이어온 침구술 내용과 그 전승 과정을 먼저 밝혀냈다. 뿐만아니라 내의원 침의를 배출한 옥천(순창) 조씨 가문과 남원 양씨 가문의 침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추적했다. 그리고 2장에서 김갑기 선생 집안 나주 김씨 가문의 5대를 이어온 침구술과 그 전승 과정을 수록했다. 이 이야기는 호남의 재야 침구사 사연이지만 전국 각지 조선 침구사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 결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수렁에 빠지게 하는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김갑기 선생이 옛 스승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호남의 조선의 침구사들이 어떠한 침구술을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전수하여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스토리도 흥미롭다.

전승 침구술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의 자산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적 지적재산이 사멸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침구사제도를 양성화하여 초고령 사회 국민보건의료에도 활용하고, 해외 진출의 길도 열어주어야 한다. 동남아는 물론, 중남미, 아프리카, 아랍 등 수많은 나라에서 중국과 일본이 경쟁하며 침구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다. 한국도 하루빨리 침구사제도의 복원을 통해 K-POP, K-FOOD와 함께 K-TAM(Korea Traditional Acupuncture & Moxibustion)이 세계인들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침구사제도는 수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쪼록 『가문의 침술』을 보고 으뜸이었던 조선의 침구술과 침구사제도 부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일독을 추천한다.

[발간사]

절멸 위기 조선 침구사 구하기

자연요법은 태초에 민간에서 생겨나, 학과 술이 정립되면서 전통요법으로 전문화되고, 다시 또 널리 민간으로 퍼져 계승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전통요법은 이런한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자연치유 요법의 생태계를 이루어왔다.

동양에서는 마을이나 지역사회에서 아픈사람을 고쳐주는 의원 가운데 침구사가 있다. 이들 침구사들은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치는 전통요법의 전승자들이다.

이들의 침구술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온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술법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무형의 국가유산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들 침구사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길을 국가가 막아버렸다. 그래서 침구사는 재야(在野)에 남게 되었다. 제도권에 들어가는 길을 막아놓고는 재야에서 활동 한다고하여 무면허 돌팔이 범법자로 불도장을 찍어 처벌받게 하려고만 들었다.

침구사가 제도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요구는 묵살되어왔다. 힘센 이익집단의 무수한 ‘공작’으로 점차 아무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법률적 약자가 되어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아무리 훌륭한 역할을 해도 범법자로 몰려왔다.

수천년 수만년 전해 내려오면서 민족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온 전통요법의 생태계는 훼손되고, 여러가지 전승 술법이 하나 둘 사라졌다.

나라를 믿고 기다린 소년은 백발이 되고

대대로 침구의원을 해 오던 집안에서 자란 김갑기 군은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어라'는 집안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대학을 가지 않고 침구사가 되고자 관인침구학원을 다녔다.

당시는 4.19 직후. 연기를 거듭하던 의료유사업자의 부령이 공포되었다. 1960년 11월 비로소 침사나 구사 등의 자격시험은 보건사회부장관의 지시에 의하여 매년 1회씩 서울특별시장 또는 시도지사가 시행하도록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문교당국이 인가한 11개의 침구사 양성기관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5천여 명의 졸업생들이 있었다.

김갑기 군도 국가를 믿고 서울로 유학하여 관인침구학원에서 열심히 침구학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시험준비를 하며 침구사의 꿈을 키워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종조부로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온 침구술을 전수받는 한편, 인근 순창에서 온 스승으로부터 전승 침구요법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손에 익혔다.

그러나 침구사 자격시험은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다. 5·16 직후인 1962년 3월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민의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의료법을 만들면서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조항을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침구 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침구사가 되고자 했던 ‘소년’을 대한민국은 의료법을 위반하는 ‘범죄자’로 몰아갔다. 그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여러차례 사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고, 왕진을 못하게 거주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보호관찰 처분까지 받았다.

침구학술은 자연요법이라 자연 생태계처럼 그 전승되어오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술법으로 분화하여 발전하며 전승되어 왔다.

김갑기 선생은 어느듯 백발이 되었다. 그가 집안 어르신과 향토 스승에게서 배우고 익힌 침술 요법은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없다.

수만~수십만의 '김갑기'를 해방시키라

조선시대 허임 선생의 침술법과 맥이 닿아 있는 김갑기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선생과 함께 그의 스승이 살고 있었던 순창을 방문했다. 순창 적성면 임동마을은 대대로 침구술을 해온 전주 최씨, 남원 양씨, 순창(옥천) 조씨가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거기에서 여러 '김갑기'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4년도 제6대 국회의 전진한 의원을 소개의원으로 하여 관인침구학원동창회가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을 때 전국에 무면허 침구사의 수를 5천명으로 집계했다. 한국침술연합회 회원카드에 수록된 재야 침구사가 5천여명에 이른다.

1973년도 제 9대 국회 강기천 의원의 소개로 청원서를 제출 했을 때는 그 수가 3만5천명 정도로 집계되었다. 그 후에는 침구사 정책이 방치되어 재야 침구사의 수를 대략도 집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일반적으로 약 10만 명으로 예측됐다. 2000년대 이후 침구인의 수는 20∼3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보건복지부의 차별정책과 함께 이루어진 한의사협회의 고발 행위는 수천년 전해 내려오던 다종다양한 대한민국 전통요법의 맥을 끊고, 현대적인 계승 발전을 봉쇄하며 민족문화를 말살해 온 것이다.

이제 침구사 제도는 글로벌 환경의 눈높이에서 접근해야 한다. 침구에 관한 전통이 없었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침구사를 양성하여 널리 활동할 수 있도록 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직 한국에서만 침구사들이 재야에서 명맥을 잇고,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이나라 저나라를 떠돌고 있다.

국내외에서 생명과 건강에 침과 뜸으로 돌볼 수 있는 침구사 제도를 이제라도 하루 빨리 시행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2024년 8월 일
사단법인 허임기념사업회 이사장 손중양

추천평

절멸 위기 조선 침구사 구하기

자연요법은 태초에 민간에서 생겨나, 학과 술이 정립되면서 전통요법으로 전문화되고, 다시 또 널리 민간으로 퍼져 계승되며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전통요법은 이런한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다종다양한 자연치유 요법의 생태계를 이루어왔다.

동양에서는 마을이나 지역사회에서 아픈사람을 고쳐주는 의원 가운데 침구사가 있다. 이들 침구사들은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치는 전통요법의 전승자들이다. 이들의 침구술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전승되어온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술법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무형의 국가유산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이들 침구사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길을 국가가 막아버렸다. 그래서 침구사는 재야(在野)에 남게 되었다. 제도권에 들어가는 길을 막아놓고는 재야에서 활동 한다고하여 무면허 돌팔이 범법자로 불도장을 찍어 처벌받게 하려고만 들었다.

침구사가 제도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요구는 묵살되어왔다. 힘센 이익집단의 무수한 ‘공작’으로 점차 아무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이들은 법률적 약자가 되어 사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고, 아무리 훌륭한 역할을 해도 범법자로 몰려왔다.

수천년 수만년 전해 내려오면서 민족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온 전통요법의 생태계는 훼손되고, 여러가지 전승 술법이 하나 둘 사라졌다.

나라를 믿고 기다린 소년은 백발이 되고

대대로 침구의원을 해 오던 집안에서 자란 김갑기 군은 19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어라'는 집안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대학을 가지 않고 침구사가 되고자 관인침구학원을 다녔다.

당시는 4.19 직후. 연기를 거듭하던 의료유사업자의 부령이 공포되었다. 1960년 11월 비로소 침사나 구사 등의 자격시험은 보건사회부장관의 지시에 의하여 매년 1회씩 서울특별시장 또는 시도지사가 시행하도록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문교당국이 인가한 11개의 침구사 양성기관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5천여 명의 졸업생들이 있었다.

김갑기 군도 국가를 믿고 서울로 유학하여 관인침구학원에서 열심히 침구학술에 대한 공부를 하고, 시험준비를 하며 침구사의 꿈을 키워갔다. 그리고 아버지와 종조부로부터 집안 대대로 내려온 침구술을 전수받는 한편, 인근 순창에서 온 스승으로부터 전승 침구요법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손에 익혔다.

그러나 침구사 자격시험은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다. 5·16 직후인 1962년 3월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민의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의료법을 만들면서 의료유사업자에 관한 조항을 삭제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침구 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소외시켜버린 것이다.

침구사가 되고자 했던 ‘소년’을 대한민국은 의료법을 위반하는 ‘범죄자’로 몰아갔다. 그는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여러차례 사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고, 왕진을 못하게 거주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보호관찰 처분까지 받았다.

침구학술은 자연요법이라 자연 생태계처럼 그 전승되어오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술법으로 분화하여 발전하며 전승되어 왔다. 김갑기 선생은 어느듯 백발이 되었다. 그가 집안 어르신과 향토 스승에게서 배우고 익힌 침술 요법은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없다.

수만~수십만의 '김갑기'를 해방시키라

조선시대 허임 선생의 침술법과 맥이 닿아 있는 김갑기 선생의 이야기를 채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김선생과 함께 그의 스승이 살고 있었던 순창을 방문했다. 순창 적성면 임동마을은 대대로 침구술을 해온 전주 최씨, 남원 양씨, 순창(옥천) 조씨가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거기에서 여러 '김갑기'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64년도 제6대 국회의 전진한 의원을 소개의원으로 하여 관인침구학원동창회가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을 때 전국에 무면허 침구사의 수를 5천명으로 집계했다. 한국침술연합회 회원카드에 수록된 재야 침구사가 5천여명에 이른다.

1973년도 제 9대 국회 강기천 의원의 소개로 청원서를 제출 했을 때는 그 수가 3만5천명 정도로 집계되었다. 그 후에는 침구사 정책이 방치되어 재야 침구사의 수를 대략도 집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일반적으로 약 10만 명으로 예측됐다. 2000년대 이후 침구인의 수는 20∼3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보건복지부의 차별정책과 함께 이루어진 한의사협회의 고발 행위는 수천년 전해 내려오던 다종다양한 대한민국 전통요법의 맥을 끊고, 현대적인 계승 발전을 봉쇄하며 민족문화를 말살해 온 것이다.

이제 침구사 제도는 글로벌 환경의 눈높이에서 접근해야 한다. 침구에 관한 전통이 없었던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침구사를 양성하여 널리 활동할 수 있도록 해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직 한국에서만 침구사들이 재야에서 명맥을 잇고,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이나라 저나라를 떠돌고 있다.

국내외에서 생명과 건강에 침과 뜸으로 돌볼 수 있는 침구사 제도를 이제라도 하루 빨리 시행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 손중양
… [상략] … 5대의 의술이 합해져서 오늘 침구사 김갑기의 의술이 이어오게 되었다. ‘의불삼대 불복약(醫不三代 不服藥)’이라는 말이 있다. 의원으로 3대를 이어오지 않은 집안의 약은 먹지 말라는 뜻이니, 5대를 이어온 침구술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민족 고유의 자산이요 생명을 구하는 침구술. 왜 공인(公認)해서 비법이 오래 전승되도록 하지 않는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활용되록 해야할텐데, 왜 그렇게 반대만 하고 있는 것인가? 허준이나 정약용 같은 천재 의원들이 의사시험에 합격해서 그런 의술을 지닐 수 있었겠는가? 집안에 전해오는 침구술을 권장하고 확대해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기여하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침구술의 공인(公認)을 위해 생을 걸고 투쟁한 김갑기 침구사의 노고를 위로하며, 그런 노고에 답해주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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