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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축사 1부 출생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1. 중국 심양에서 출생, 장춘에서 성장 2. 해방과 귀국, 소학교 생활 3. 진명여중 입학, 6.25전쟁 그리고 피난 4. 환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입학 5. 서울대 사학과 학창시절 6. 사학과 졸업 논문 통과 2부 첫 직장부터 대학교수가 되기까지 1. 한국교과서주식회사 입사 2. 4.19혁명과 고려대 사학과 대학원 입학 3. 「병자란피로인속환고」로 석사학위 취득 4. 국사편찬위원회 입사와 연구 생활 5.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로 부임 6. 고려대학교 사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3부 한국여성사 연구의 새 장을 열다 교수시절 1.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 시기 2.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시기 3. 버클리대학 교환교수 시기 분야별 연구 및 저술 1. 국채보상운동 연구 : 여성에 주목한 첫 번째 글, 여성사 연구의 태동 2. 여성사 연구의 계기 : 여성의 역할에 주목한 역사연구 잇달아 발표 3. 유교적 여성관의 재조명 4. 조선시대 여성학자에 대한 연구 5. 한국사 여성 기사의 사론 분석 6. 여성사학자와 여성학자가 함께 쓴 정년기념 논총 출판 7. 조선 시대 여성의 주체성을 살린 『이조 여성사』 출판 8. 여성단체 연구 9. 『부녀행정40년사』 저술 10. 여성단체활동 참여, 역사 속 여성인물 발굴 및 기고 11. ‘여권통문’, 여학교 설립 운동 12. 김만덕 발굴 13. 주체적인 여성의 활동, 새마을운동까지 이어져 14. 박사학위 논문,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 15. 여성항일운동사,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 저술 16. 김마리아 연구 17. 제주해녀 항일운동 연구 18. 부녀새마을운동 연구 19. 학술상 수상 4부 결혼과 출산, 나의 가족, 그리고 노년 1. 결혼 2.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3. 손자 손녀들 4. 나의 외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 5. 남편, 차경수 교수 6. 노년생활 부록 1. 박용옥 연구의 개관 2. 박용옥 연보 3. 구술생애사 질문지 - 구술장면 - 구술생애사 질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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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저는 아주 평범했어요. (만주 심양에서) 나는 조선인 학교에 다닐 때가 참 재밌었어요. 우리 집이 기독교 집안이고, 어머니가 굉장히 엄격했어요. 그래서 늘 절도 있게 생활해야 했어요. 조선인 학교 이름이 영락(광개토대왕의 연호, 永樂) 소학교였어요. ‘영락’, 그 학교는 상당히 자유 분위기였어요. 복도를 다닐 때도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그랬죠. 어머니께서 와서 보시더니, “아, 여기는 너무 교육환경이 산만하다.” 이렇게 아버지께 말씀드렸나 봐요. 그리고 교과과정도 아무래도 일본인들 학교에서 진행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느슨하게 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께서 아마 “일본인 학교로 옮기자. 그래야 나중에 중학교를 들어가지. 여기서 중학교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셨나 봐요. 그래서 저를 옮겼어요. 저는 영락 소학교를 떠나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어요.
--- p.16~17 … 내가 목표한 바가 있으니까,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지원했어요. 사학과를 택한 이유는 당시 내가 공부할 때 여자들의 공부 환경은 참 나빴어요, 시집가면 취업했던 사람도 그만두어야 했거든요. 그리고 주부가 되어 집에 있으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 내가 “아, 내가 결혼한 뒤에도 끝까지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학문은 뭐가 있을까?”하고 생각했는데, 역사를 공부하면 그렇게 될 것 같았어요. 사료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집에서 얼마든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내가 사학과를 택한 거예요. --- p.37 박용옥의 여성사연구, 석사논문에서 출발 『이조 여성사』연구 박용옥의 여성사 연구는 석사 논문 「병자호란 피로인속환고」(1964)에서 출발하였다.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로 임용된 후 1976년 간행된 『이조 여성사』(1976)는 조선시대 여성 일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기 보다는 ‘유교와 여성’이라는 주제에 주목한 책이다.즉 유교적인 여성관이 어떻게 확립되었으며, 그 내용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17세기 이후 어떻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19세기 이후 어떻게 변화했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여성관은 조선이 처음부터 여성에게만 집중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교를 기반으로 하여 가부장적인 사회를 확립해 나가는 중에 자연스럽게 요구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교에 대해 여성은 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주류사상로의 유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여성이 유교에 의해 통제받았다는 것만 강조하는 기존의 일반론과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탁월한 연구로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다. --- p.92 … 고려 시대 때 제도가 조선에도 남아 있었어요, 조선 중기까지 그랬어요. 중기까지 부인을 포함하여 가족들이 앉아서 다 같이 의논해서 결정은 가족회의에서 남성들 중심으로 한다하더라도 내면적으로 여성들의 합의가 되어야 했어요. 글쎄, 여성이 합의한다기 보다는 똑같은 형제로서 그런 것을 발의하고 방향을 정하고 이런 것은 율곡이 한 거 같아요. 내 생각엔 이러한 일은 하나의 제도라고 봐요. 제사 관습을 봐도 요즘 제사 관습은 엉터리에요. 옛날을 보면, 제사를 지내면 남자들도 다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촛불 향을 해놓아요. 요즘 제사 지내면 식구들 오면 “왔냐?”고 인사하고는 상 차려주고 먹고 떠들고 이러거든요. 그땐 그런 게 없어요. 아주 부모를 생각했어요.똑같은 제도를 다르게 해석했어요. 여자들한테도 (남편과) 같은 관직작위를 준다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아 긍정적인 해석을 내렸어요. 굉장히 인간 평등적 사상이 강했어요. 이런 사상의 바탕에서 조선인들이 생활했어요. 그 하나의 예로 김만덕(金萬德)을 발굴했죠. 『이조 여성사』를 지금의 시각에서 볼 때 기본적으로는 같아요. 내가 실학 시대에 들어오면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굉장히 활발했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병자호란(丙子胡亂) 시대는 마치 6.25전쟁 때와 같이 가족을 먹여 살린 것은 다 부인들이 했어요. 남자들은 전부 숨어 있고. 그래서 내가 그런 논문도 하나 썼어요. ‘6.25전쟁 때 가족 제도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어요.부녀들이 활동을 안 하면 식구들이 먹고살 수가 없는 거예요. 부녀들이 그런 경제활동을 하면 남자보다 더 치밀하게 잘해요. 강릉에서 무슨 물건이 많이 있다. 값이 싸잖아요? 그럼 거기에서 사다가 이 물건이 귀한 곳에 가져다 팔아요. 그런 것을 가서 사 오는 것은 자기 집의 노비를 시켜요. 다 노비가 하는 거예요. 노비한테 “이렇게 이렇게 해라.” 그래요. 여성들이 경제활동을 너무 잘하는 거예요. 실학 시대에 들어오면, 부녀를 중심으로 하는 방직업이라든지, 직조업 등이 그룹을 이뤄 집단생산을 하는 제도도 있어요. 신라시대 가배(嘉俳)와 같은 것인데, 집단 직조 전통으로 볼 수 있어요. 조선시대 관리의 부인들에게 품계를 주는 것도 신라 시대의 전통이었어요. 신라 시대에는 부부가 정말 똑같아요. 신라 시대에는 씨족사회로부터 발전된 체제가 그대로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성들의 지위, 권한 이런 게 아주 강하죠. 변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그 속담에 보면 ‘홀아비는 이가 서 말, 과부는 은이 서 말’ 이랬어요. 너무나 그게 맞아요. 대표적인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딱 들으면 나는 아,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 p.134~136 대한제국기 ‘여권통문’, 여학교 설립운동 19세기 말 여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났어요. 기독교계의 학교들이 여럿 있었죠. 서울에는 대표적인 학교가 이화학당이었고, 지방에도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여성을 위한 교육이었어요. 이렇게 하긴 했어도 일반적으로는 기독교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지, 한국 여성을 위한 교육이라고는 생각을 안 했어요. 우리의 지도층, 양반사회 사람들이 결국은 지도층이거든요. 그래서 북촌의 부녀들, 그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지도층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들이 이미 개항 이후로 서구 문명도 많이 접했고,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당시 평양이 서울보다 훨씬 더 앞서서 발전했어요. 그래서 찬양회(贊襄會) 운동을 할 때, 여권 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에 참여했던 김양현당(金養賢堂)이 평양 여자거든요. 김양현당이 평양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몰라요. 자식 없이 과부가 돼서 서울로 내려왔어요. 평양쪽 사람들이 서울로 굉장히 많이 왔어요. 그때 북촌 지역이 중심지였고, 출세할 수 있는 곳이었죠. 이미 북쪽은 러시아나 청나라를 통해서 새로운 문물이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즉, 북쪽이 남쪽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어요. 이제 서울로 온 그 부인이 들어간 지역이 북촌이에요.… 처음으로 ‘여권통문(女權通文)’(여학교설시통문, 女學校設施通文)을 연구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여권통문을 그 발표했던 자린가에 표지석을 세웠잖아요.…‘여권통문’ 소식을 신문사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황성신문』에서 실어줬고, 그 다음 날, 그때는 신문 매일 나오지 않고, 하루걸러 나왔어요. 그래서 그 다음 날이 『독립신문』이 발행하는 날이에요. 그래서 두 번째가 된거죠. 그때가 『황성신문』은 출간한 지 불과 한 일주일인가 됐을 때예요. 개신 유학자들이 생각이 굉장히 개방돼 있었고, 선구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 p.155~156 박용옥의 국채보상운동 연구 : 여성에 주목한 첫 번째 연구 여성사 연구의 태동 1968년도 ‘국채보상운동의 발달 배경과 여성 참여’를 주제로 하는 논문을 썼어요. 여성에 주목한 첫 번째 글이라고 생각이 되거든요. 이거는 정말 아무도 하지 않았던 분야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어요. 내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고종 시대사를 맡아서 이를 편찬해 나가느라고 개화기 신문을 많이 봤어요. 개화기 신문들인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보』, 『만세보』 등 여러 신문을 다 섭렵해서 봤어요. 그걸 봐야지 편찬이 되니까요. 이 과정에서 내 눈에 계속해서 국채보상운동이 들어오는 거예요. 이렇게 큰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왜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이 여기에 눈을 맞추질 못했는가? 그런데 그중에서도 놀랍게도 그 국채보상운동이 활발하게 이뤄진 데는 여자의 힘이 컸더라고요. 너무나 의외로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에서 여자의 존재는 굉장히 미미한 걸로 생각했고, 나도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봤더니 국채보상운동은 완전히 여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남자들이 국채보상운동 단체를 만들고 취지문, 성명서 뭐 이런 걸 쓰잖아요. 그러면 거기에다가 ‘쌀을 절약을 해서 그래서 그 남은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 반찬값을 남겨서 뭐 어떻게 하자. 살림을 아껴서 어떻게 하자.’고 썼어요. 근데 그런 내용이 실제 보면 다 여자가 하는 거지, 남자가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근데 남자들이 말로는 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런 걸 보면서 ‘아, 이거는 아니다. 이거는 정말 여자의 정치참여, 여자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다’이렇게 생각을 하게 됐어요 --- p.112 일제강점기 연구 항일여성운동에 비중을 두어 일제강점기에 대한 박용옥의 연구는 여성운동보다는 항일여성운동에 더 비중을 두었다. 이 분야에서 여성독립운동가와 여성독립운동단체에 대한 연구는 선구적인 업적으로 기록된다. 일제 강점기의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운동과 여성독립운동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박용옥은 이 중 여성독립운동을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먼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였다. 이를테면 윤희순의 의병활동, 남자현의 의병 및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 차미리사의 독립운동 등을 연구하여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이 외에 김마리아의 독립운동(『김마리아 :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03) 등도 괄목할만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 일제강점기 여성들은 3.1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1920년대 이후 여성단체의 조직과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특히 독립운동전선에서 여성들의 활약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박용옥은 이러한 여성독립운동단체들의 활동에 주목하고 국내 및 해외의 여성단체에 대해 활발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우선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간도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연구(1996)를 발표했다. 이는 한국여성들의 진면목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20년대 초 항일부녀단체 지도층 형성과 사상연구」(1976)를 통해 여성단체를 이끄는 여성지도자의 사상과 운동론을 정리했다.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따른 여성들의 활동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연구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해외 여성 독립운동에도 눈을 돌려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 여전사 연구」(1995)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세상에 알렸다. 그밖에 미주한인여성단체의 활동(「미주한인여성단체의 광복운동지원연구」, 1996), 여자광복군연구의 일환으로 「광복군 제3지대의 오광심에 대한 연구」도 발표하였다. 박용옥의 일제강점기 항일여성에 대한 지속적 연구는 『한국여성항일운동사연구』(지식산업사, 1996),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1: 여성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등의 저서로 정리되어 이 분야 연구자들의 기초 참고자료가 되었다. 박용옥의 여성항일운동연구는 사료연구에도 미처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1, 3.1운동 편』(국가기록원, 2016)으로 이어져 후학들의 연구에 활력을 가져다 주었다. --- p.93~94 어머님의 위대함 보고 여성사 연구에 관심 가져 나는 늘 생각하기를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생각했어요. “여성들이 이렇게 남의 지배를 받고. 특히 남자의 지배를 받고 그 휘하에서 산다는 건 안 된다.” 늘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우리 가정을 보더라도 해방 후에 아버지가 안 계셔서 어머니가 경제활동을 해서 우리 4남매를 다 키웠거든요. 그 시대에 그렇게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자가 가진 것도 없이 장사도 하고, 어찌어찌해서 4남매를 공부도 할 만큼 시켰고, 먹이고, 입혔어요. 우리는 피난 다닐 때도 한 번도 배곯아본 일이 없어요. 며칠 전에 우리 여동생이 전화해서 미국에 있는 동생과 얘기하다가 우리 어머니 얘기가 나왔대요. “아마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엄마의 기도 덕택이야”라고 말했대요.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엄마야 여장군이지.” 이렇게 어머니 얘기를 했어요. 내가 그랬어요. “얘, 6.25전쟁 때 사람들이 배가 곯아서 못 먹고 고생할 때, 한 번이라도 배곯아본 일이 있냐?”이랬더니 “없다”고 해요. 우린 정말 배곯아본 일이 없어요. 어머니가 어쨌든 극성스럽게 해서 자녀를다 먹여 살린 거죠. 그래서 그런 걸 보면, 우리 엄마를 보더라도 ‘아, 여자가 참 위대하다. 아, 우리가 엄마 대신 아버지만 있었다? 아버지 휘하에 있었으면, 우리가 이만큼 자랐을까?’ 이런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나는 ‘여성들이 참 위대하다. 능력이 있다’라고 생각해요. 특히 저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굉장히 높이 평가하죠. --- p.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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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대학과 대학원 시절, 우리는 박용옥 선생님을 만나 여성사 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박 선생님은 한국 여성사의 선구자로, 『이조 여성사』와 같은 저서를 통해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셨다. 특히 우리는 『이조 여성사』를 통해 역사 속 여성의 삶과 역할을 깊이 있게 다룬 연구에 큰 감명을 받았고, 박 선생님이 여성사 연구에 끼친 지대한 영향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박용옥 선생님은 한국 고대부터 현대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며 여성의 주체성과 역동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연구를 진행했으며 선생님의 연구는 당시 여성사 연구에서 '최초'로 시도된 경우가 많아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큰 주목을 받았다. 여성억압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선생님은 역사 속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주체적으로 활동했는지를 밝히며 한국 여성사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셨다. 1990년대부터 여성학이 대학에 본격적으로 개설되고 여성권익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박 선생님의 지도 아래 여성사 연구를 심화해 갔다. 1998년 한국여성개발원(현재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기획한 『한국 역사 속의 여성인물』 집필에 참여했을 때, 박 선생님은 시대별 여성 연구자들을 추천하고, 역사적 여성 인물을 선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각 시대의 여성사에 대한 연구를 심화할 수 있었고, 박 선생님의 지도와 조언은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여성사학회가 출범하고, 국립여성사전시관이 설치되면서 여성사 연구는 더 체계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우리는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의 발기인으로서 여성사의 보급과 확산을 위해 힘썼으며, 박 선생님은 연구자로서뿐만 아니라 여성단체 기관지, 신문,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사에 대한 글을 꾸준히 발표하셨다. 2020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 구술자료 수집사업의 일환으로, 박용옥 선생님의 구술생애사 자료를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해 선정되었다. 이를 통해 박 선생님의 생애와 학문적 연구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여성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연구 자료를 어떻게 찾아내고 분석했는지, 그리고 그 연구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이번에 발간된 책은 박용옥 선생님의 구술생애사 자료를 토대로, 선생님의 학문적 여정과 연구 성과를 후배 연구자들과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기획되었다. 선생님의 연구는 한국 여성사의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을 통해 박 선생님의 업적이 후학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로 구술생애사 기록 정리 편집은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의 이사로 있는 정현주 강영경 강영심이 담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