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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부_ 법흥왕 인터뷰: 아버지와 아들, 강국 신라를 향한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다 풍수는 개혁의 산물이다 지증 마립간, 신라 개혁의 횃불을 들다 법흥왕, 아버지의 개혁 정책을 확대 계승하다 강국 신라를 향한 개혁의 방점을 찍다 2부_ 법흥왕 인터뷰: 급진 개혁의 마지막 산물, 무덤 조영의 풍습을 혁신하다 돌무지덧널무덤, 거대한 봉분과 화려한 껴묻거리 내 무덤을 산 아래에 만들어라 법흥왕릉 여행, 풍수의 원형을 만나다 신라 왕경 도시 계획의 기반을 마련하다 3부_ 진흥왕 인터뷰: 신라 왕경의 풍경과 도시 계획, 새로운 역사 상식을 세우다 높고 웅장하고 화려한 월성의 건축물, 상상해 본 적 있는가? 황룡사, 세계의 중심에 높고 웅장하며 화려하게 만들다 신라 왕경의 도시 계획, 사고의 사대주의를 버려라 경주 시내 도시 계획의 확장 토대를 만들다 4부_ 선덕여왕, 문무왕 인터뷰: 풍수가 사찰로, 크고 웅장한 목탑에서 작은 석탑으로 바뀌다 북천의 수호신, 분황사를 만들다 거대한 황룡사 구층 목탑을 세우다 감은사의 건설, 탑이 작아지다 하늘-산-감은사의 3단계 풍경 5부_ 문무왕, 김대성 인터뷰: 풍수사찰의 확산,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 석탑이 만들어지다 월지정원, 조선에선 볼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인공 정원 밖에서 보이지 않는, 산속에 폭 안긴 불국사 삼층 석탑이 늘씬해지다 다듬는 것보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다 도판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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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그 자체는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하늘-산-궁궐의 3단계 풍경 속의 웅장하고 화려한 산을 통해 임금의 권위 표현을 절대 포기하지 않은 것
--- p.15 풍수의 탄생은 권위의 표현에서 누구든 시각적으로 금방 인식할 수 있는 크고 웅장하며 화려한 건축물을 짓는 것으로부터 탈피하는 일이죠. 그러면서도 건축물 그 자체는 시각적으로는 크지도 웅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게 짓는 것으로의 변화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랍니다. --- p.18 순장의 폐지로부터 시작해서 정치, 사회, 국제 관계를 차례대로 개혁한 다음, 마지막으로 불교의 공인이란 신앙 체계의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 p.53 경주의 대릉원은 평지를,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은 산의 능선 위를 선택했지만, 둘 다 어떻게든 무덤들이 크고 높게 보이도록 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 p.70 황남대총이나 봉황대총, 서봉황대총이라고 해도 산 아래에 있었다면 시각적으로 거대한 느낌이 확실히 약해졌을 거예요. 그러니 산 아래에 만들라는 나의 유언은 아무리 크게 만들어도 더 큰 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남긴 것이죠. --- p.90 첫째, 경주 시내의 거대한 고분군 안에는 초기의 일부를 제외하면 더 이상 무덤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일부를 제외하면 경주 시내 서쪽의 선도산과 장산과 옥녀봉, 동쪽의 낭산과 명활산과 토함산, 북쪽의 소금강산, 남쪽의 남산 등 도시 외곽의 산속이나 산 아래에 만들어졌습니다. 셋째, 초기의 일부를 제외하면 돌무지덧널무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습니다. 넷째, 진지왕의 무덤 이후에는 높이 10미터를 넘어가는 초대형의 무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 p.110 우리 신라의 궁궐이었던 월성의 건축물들은 서울의 궁궐들과 전혀 다르게 크고 웅장하며 화려하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 p.131 지금 두 직선의 교차점에는 황룡사의 대웅전이, 그중에서도 본존불인 장륙존상의 석조대좌石造臺座 유적이 있어요. 그래서 석조대좌에서 정북쪽을 바라보면 소금강산의 정상이, 정서쪽을 바라보면 선도산의 정상이, 정동쪽을 바라보면 명활산의 정상이 보입니다. --- p.140 첫째, 우리 신라의 궁궐은 조선의 궁궐과 달리 멀리서 바라봐도 그 권위가 느껴질 정도로 높고 웅장하며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요. 둘째, 월성 북쪽의 만월성이 발굴된다면 직선의 넓은 간선도로가 도시 중심의 월성과 만월성 궁궐을 향해 당나라, 백제, 고구려 등과 연결된 서쪽, 그리고 국제 무역항이었던 울산항과 연결된 동쪽, 그리고 발해와 동해안과 연결된 북쪽에서 모여드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 p.160 홍수 때 서천, 북천, 남천의 범람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되어 있어야 경주 시내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다 --- p.165 경주 시내 평지로의 도시 확장을 염두에 두고 불교 사찰의 이미지를 하천 범람으로부터 도시를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 만들어 갔어요. 그러면서 귀족과 백성들에게 더욱 친근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을 갖추도록 했죠. --- p.167 천 범람으로부터 경주 시내의 신라 왕경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으로서의 사찰, 그게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난 사찰이 분황사라는 말씀이네요. 그리고 그 분황사가 임금님의 권위와 밀접한 관련하에 만들어졌으니, 결국 임금님은 경주 시내의 신라 왕경을 보호해 주는 존재로서 우뚝 서게 된 것이고요. --- p.184 아~ 사찰에도 무덤에 적용시킨 하늘-산-건축물의 3단계 풍경을 적용시키면 건축물 자체는 소박하면서도 전체 풍경은 그리 소박하지 않게 보이는 그런 사찰을 지을 수 있겠구나 싶었죠. 탑도 그런 구상 속에 있었고요. 석공이 저의 이런 명을 받아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면서 만든 탑이 지금도 여러분들이 직접 볼 수 있는 두 개의 감은사 삼층 석탑입니다. --- p.219 월지정원은 완벽한 인공 정원입니다. 구체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다른 문명권이나 나라에서도 인공 정원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이미 이야기했듯이 창덕궁의 비원 같은 자연 정원은 조선에서는 일반적이고 흔한 반면에 다른 문명권이나 나라에서는 없거나 간혹 볼 수 있는 희귀한 것이었습니다. --- p.237 종교 건축물이 산의 정상이나 산등성이가 아니라 산속에 흔하게 있는 사례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문명권이나 나라에서는 종교 건축물이 산의 정상이나 산등성이에 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 보이고 웅장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사찰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 보이지도, 웅장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산속에 폭 안겨 있는 느낌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 p.249 불국사는 그 토함산에 폭 안겨 일체화된 느낌으로 존재하는 거죠. 옛날 사람들은 불국사를 올 때 걷거나 말을 타고 왔기 때문에, 높고 거대한 토함산은 아주 멀리서부터 보였답니다. 그래서 불국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불국사는 토함산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토함산과 불국사는 하나가 되어 ‘토함산 불국사’가 되는 것이죠. --- p.256 가로와 세로의 틀은 직선으로 다듬은 돌로 쌓았고, 그 안에 다듬지 않고 다른 자연석을 층층이 채워 넣어 딱딱한 직선의 인공과 부드러운 곡선의 자연을 절묘하게 대비시켰기 때문이죠. 이런 대비를 극대화하기 위해 아래층의 축대에서는 딱딱한 직선의 인공과 부드러운 곡선의 자연이 맞닿는 부분에서 인공을 자연에 맞추는 건축 공법인 그랭이질이 행해졌습니다. --- p.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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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법흥왕의 개혁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지증 마립간의 개혁을 계승해 시호 제도를 도입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둘째, 병부를 설치해 사병 체제를 약화하고 국가 중심의 군사 체계를 확립하였다. 셋째, 율령 반포와 백관의 공복 제정을 통해 법치주의 기반을 다졌다. 마지막으로 불교를 공인해 신라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2부 법흥왕은 지증 마립간의 개혁을 이어받아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무덤을 평지에서 산 아래로 옮겨 왕권의 상징성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신라의 도시 계획과 무덤 배치의 원칙을 세웠다. 경주를 재편해 무덤, 궁궐, 사찰을 하늘-산-궁궐 구조로 배치하고, 돌무지덧널무덤을 도입해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려 했다. 3부 진흥왕은 법흥왕의 개혁을 이어받아 신라의 국력을 강화하고 도시 계획을 추진했다.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공세를 시작해 영토를 확장하고, 551년에 연호를 '개국'으로 변경하였다. 553년에는 월성 동북쪽에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여 왕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경주를 설계하고 사찰을 세워 정치적 권위를 확산시켰으며, 그의 개혁은 신라의 도시와 사회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4부 선덕여왕은 분황사와 황룡사 구층 목탑을 건설해 왕권을 종교적 상징으로 강화했다. 분황사는 경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사찰로, 풍수와 종교가 결합된 사례이며, 황룡사 구층 목탑은 신라의 국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문무왕은 이를 이어받아 감은사를 건설하고, 소박한 구조를 통해 부처님께 귀의하려는 소망을 반영했다. 감은사는 '하늘-산-감은사'의 3단계 구조로 신라의 권위를 자연에 녹여내고자 했다. 5부 문무왕은 감은사를 통해 신라 왕권의 상징을 표현하고, 자신의 유골을 바다에 묻어 백성을 수호하겠다고 결단했다. 김대성은 불국사의 석가탑을 세련되게 설계하고, 불국사를 자연 속에 위치시켜 신라의 권위를 자연과 조화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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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수는 신라의 정치, 사상 개혁의 산물로 법흥왕 때 탄생했다
- ‘하늘-산-무덤 · 사찰’로 왕의 권위를 풍경에 조영한 ‘풍수’의 탄생 『산을 품은 왕들의 도시 3: 신라편』은 한국의 독특한 풍수 개념, 즉 '하늘-산-궁궐'의 의미구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탄생하고 확산되었는지를 추적한다. 1권과 2권에서 조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과 도시의 풍경에 ‘산’이 있었고, 커다란 ‘산’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궁궐을 어떻게 임금을 상징하는 권위를 갖도록 조성했는지를 항공지도와 궁궐 배치도를 꼼꼼히 살펴 알아보았다. 이번 세 번째 책 역시 역사 인물인 법흥왕, 진흥왕, 선덕여왕, 김대문을 환생시켜 묻고 답하는 가상 인터뷰 형식을 빌린다. 법흥왕은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기준에 맞춘 강국 신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 정책을 시행한다. 시호 사용, 율령 반포, 병부 설치, 중국과 외교 관계 복원, 불교 공인, 골품제와 화백제도 개혁 등 당시 토호와 귀족들에 맞서 ‘임금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저자 이기봉 박사는 환생한 법흥왕의 말을 빌려, 이런 급진적인 개혁의 마지막 산물이 ‘풍수의 탄생’이라고 말한다. 이전에 황남대총, 봉황대총처럼 경주 왕경 한복판에 거대한 봉분을 만들고 순장과 함께 많은 깨묻거리를 묻던 ‘돌무지덧널무덤’ 전통을 개혁해, 자신의 무덤을 도시를 벗어나 경주 서쪽 선도산 아래 ‘굴식 돌방무덤’으로 조성하라고 유언한다. 이후 후대 왕들의 무덤은 대체로 ‘굴식 동방무덤’으로 산속과 산 아래에 짓고 무덤의 규모도 작아지게 되었다. 무덤은 작아졌지만 ‘산’이 그 역할을 대신함으로서 임금의 권위를 알렸다. ‘풍수’ 즉 전통사회에서 하늘로부터 받은 임금의 권위를 산을 매개로 조성하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기봉 박사는 법흥왕의 무덤은 현재의 경주 서악동무덤군의 앞자리에 배치되어 있고, 풍수의 주산-좌청룡-우백호 구조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기봉 박사는 이런 무덤 구조의 개혁이 진흥왕, 선덕여왕을 거치면서 경주 주변을 에워싼 선도산, 명활산, 소금강산이 직선으로 만나는 곳에 거대한 신궁을 당나라의 장안처럼 조성하는 왕경의 도시 계획을 수립했지만, 신라의 융성을 상징하는 사찰인 황룡사로 짓게 된다. 또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했던 매년 반복되던 경주 북천과 남천의 홍수를 예방하는 지점에 분황사, 영묘사 등 사찰을 지어 예방함으로써 임금의 권위를 사찰에 투영했다. 나아가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을 기리는 사찰인 감은사를 산을 배경으로 조성해 먼 거리에서는 산이 보이고 가까이 가면 사찰이 점점 크게 다가오는 구조로 지었다. 이는 1권에서 다뤘는데, 조선 초 경복궁과 한성을 지을 때, 종각에서 출발해 광화문사거리에서 꺾으면 북악산을 배경으로 광화문을 보게 하고, 경복궁에 가까이 갈수록 산보다 광화문이 더 크게 보이는 권위를 느끼게 하는 시각적 효과를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김대문의 인터뷰를 통해, ‘토함산 불국사’라고 이름하듯 산속에 사찰이 폭 안기는 사찰 풍수가 자리 잡게 되었음을 살피고, 크고 웅장한 목탑들이 단아한 늘씬한 삼층 석탑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살펴본다. 또 불국사 자하문 앞 석축들의 그렝이질, 동궁과월지의 조성 등 직선의 인공과 부드러운 곡선의 절묘한 조화로, 인공을 자연에 맞추는 한국 건축양식의 특징을 살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