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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머리말 대림절과 성탄절 대림절 첫째 주일: 눅 21:25-26 대림절 둘째 주일: 눅 3:1-6 대림절 셋째 주일: 눅 3:7-18 대림절 넷째 주일: 눅 1:37-45(46-55) 성탄절 후 첫째 주일: 눅 2:41-52 성탄절 후 둘째 주일: 요 1:(1-9), 10-18 주현절(현현절) 주님의 수세주일: 눅 3:15-17, 21-22 주현절 후 둘째 주일: 요 2:1-11 주현절 후 셋째 주일: 눅 4:14-21 주현절 후 넷째 주일: 눅 4:21-30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 눅 5:1-11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 눅 6:17-26 산상변모주일: 눅 9:28-36(37-43) 사순절 사순절 첫째 주일: 눅 4:1-13 사순절 둘째 주일: 눅 13:31-35 사순절 셋째 주일: 눅 13:1-9 사순절 넷째 주일: 눅 15:1-3, 11b-32 사순절 다섯째 주일: 요 12:1-8 사순절 여섯째 주일(고난주일): 눅 22:14-23:56 사순절 여섯째 주일(종려주일): 눅 19:28-40 부활절 부활절 요 20:1-18 부활절 둘째 주일: 요 20:19-31 부활절 셋째 주일: 요 21:1-19 부활절 넷째 주일: 요 10:22-30 부활절 다섯째 주일: 요 13:31-35 부활절 여섯째 주일: 요 14:23-29 부활절 일곱째 주일: 요 17:20-26 성령강림절 성령강림절 요 14:8-17(25-27) 삼위일체주일: 요 16:12-15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눅 8:26-39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눅 9:51-62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눅 10:1-11, 16-20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눅 10:25-37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눅 10:38-42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눅 11:1-13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눅 12:13-21 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눅 12:32-40 성령강림절 후 열째 주일: 눅 12:49-56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 눅 13:10-17 성령강림절 후 열두째 주일: 눅 14:1, 7-14 성령강림절 후 열셋째 주일: 눅 14:25-33 성령강림절 후 열넷째 주일: 눅 15:1-10 성령강림절 후 열다섯째 주일: 눅 16:1-13 성령강림절 후 열여섯째 주일: 눅 16:19-31 성령강림절 후 열일곱째 주일: 눅 17:5-10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 눅 17:11-19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 눅 18:1-8 성령강림절 후 스무째 주일: 눅 18:9-14 성령강림절 후 스물한째 주일: 눅 19:1-10 성령강림절 후 스물두째 주일: 눅 20:27-38 성령강림절 후 스물셋째 주일: 눅 21:5-19 성령강림절 후 스물넷째 주일: 눅 23:33-43 옮긴이 노트 지은이 프로필 성서정과 교회력(2025년, 2028년) 〈말씀의 잔치〉 시리즈 해제 |
David L. Bartl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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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교인들이 성서를 읽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잘 알려진 지침이 있다. 예를 들어 “성서를 읽을 때 항상 약속을 찾아보라”든가 “성서를 연애편지처럼 읽어라” 등이다. 그렇다면 대림절 본문을 읽을 때 도움이 되는 지침도 있지 않을까? “본문을 항상 성탄절과 연관시켜라”는 어떤가? 대림절 본문은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니 이는 당연히 도움이 되는 지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지침은 전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절반의 도움만 준다. 이 지침은 독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독자를 잘못 인도할 수도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성서 안에는 이번 주일 본문처럼 상식적인 지침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본문도 있다. 오늘의 본문은 21장 전체를 덮고 있는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주제에 깊게 영향을 받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연애편지를 운운할 정도의 낭만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다. 여기에는 일종의 ‘약속’이 나오는데, 이 약속은 묵시론적인 특징을 지닌 강력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 소개되고 난 후,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야 드러나게 된다.
--- 「대림절 첫째 주일」 중에서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29). 예수의 영광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면서 그의 신성이 강조된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유일한 요점은 아니지만 중요한 요점 중 하나이다. 그러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 사실을 놓쳤다. 그들은 이미 이전에 한 번 예수에 대한 이해에 실패했다. 예수가 장차 고난당하고,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일어나리라는 선언을 이해하지 못했고(22), 지금 이들은 산에서 졸고 있다(마치 겟세마네의 장면을 예견하듯). --- 「산상변모주일」 중에서 이런 기도는 기독교의 생생한 역사 속에서 늘 중요하게 여겨졌다. 4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 주교 크리소스토무스(Chrysostomus)는 예수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풀어서 설명했다. 제자들이 예수에게서 배운 평화를 그들 스스로 지킬 수 있다면, 주위 사람들이 제자들을 통해 그들의 스승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그들 안에 다툼이 있다면 그들이 평화의 하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도 부정하게 된다. 이것은 교회의 분열을 많이 봐 왔던 주교로서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씁쓸한 충고였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와 제자들 간의 일치에 관한 기도는 역설적으로 오래전부터 수많은 분열의 원인이었다. 오랜 논쟁의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사람들 간의 연합이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이 논쟁은 때로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완전한 신성에 가까운지, 완전한 인성에 가까운지에 관한 논쟁으로 불거져 유혈사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중에서 확실히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던지는 결정적 요점은 이것이다: 죽음은 많은 것의 끝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끝이 아니다. 한 독일 찬송가에서 폴 게하르트(Paul Gerhardt)는 이처럼 노래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계신다/ 흔들림 없이;/ 그의 생각과/ 그의 말씀과 그의 뜻은 영원한 기반 위에 서있다.” 우리는 특정한 시간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홀로 영원하시다”(딤전 6:16). 이것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이 하나님은 많은 신 중의 한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분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품으신다. 피조물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다. 우리 인간은 영원하지 않으나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영속하지 않으나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비는 영원하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그들은 지금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었고 악으로부터 깨끗게 되었다. --- 「성령강림절 후 스물두째 주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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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내적으로는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고, 외적으로는 한국 사회에 다양한 기여를 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교회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교회의 성장도 멈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교회와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는 한마디로 ‘강단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주 수만 편 외쳐지는 강단의 설교가 성서 본문과는 동떨어지고 시대적 의미를 갖지 않은 죽은 말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단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교에 있어서 익숙한 말씀만 전하는 ‘말씀의 편식 현상’과 신학적 편향성을 지양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매주 세계 교회가 함께 정하는 성서정과(聖書程課, Lectionary)에 따라 성경의 다양한 본문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추천의 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