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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왜 돌봄에 관해 이야기하는가
들어가며 모두가 모두를 돌보기 위하여 1장 돌봄은 서로 교환한다 아이를 돌보는 일 돌봄의 기쁨과 슬픔 누가 돌보아야 하는가 돌봄의 대가와 진정한 돌봄 서로의 생을 지탱하는 돌봄의 가능성 돌봄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인간의 기본적 조건으로서의 돌봄 2장 돌봄은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다 돌봄은 하나의 능력이다 돌봄 이야기, 치매 앞에서 의료를 바꾸다 어떤 죽음은 돌봄이라 할 수 있을까 누가 더 아프냐고 묻기 전에 아이를 환대하는 사회란 대화의 윤리: 나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는 3장 돌봄은 보살핌받는 이의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돌봄,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인 장애의 도전 앞에 서는 일 망가진 것들의 애도, 새로운 것들의 피어남 돌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예정된 죽음 앞의 돌봄 자율성을 존중하는 돌봄은 가능한가 4장 돌봄은 피어나게 한다 타인을 피어나게 한다는 것 다음 세대의 피어남을 위하여 고통을 함께 상대해야 하는 이유 우영우에겐 장애가 없다? 로봇과 인공지능이 돌봄을 대신할 수 있는가 행복한 삶과 피어나는 삶 5장 돌봄은 구조 속에서 순환한다 여기엔 왜 돌봄이 없는가 죽음 돌보기와 돌봄의 순환 구조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할 수 있는 이유 파괴를 감내하고 견디는 것의 존엄함 타인의 삶으로 건너간다는 것 6장 나는 돌보며 돌봄받는다 돌봄,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 돌봄을 받는 마음에 관하여 민감한 돌봄 나가며 함께, 좋은 돌봄을, 모든 곳에서 참고문헌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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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위기를 넘어서려면 우리는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돌봄 책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모두에게 돌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책임의 근거를 내가 돌봄을 받았으며 앞으로도 받을 것이므로 그에 응답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언젠가 돌봄 서비스를 요청할 때 그것을 받기 위한 확정적인 방법으로 돌봄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다른 관점에서 찾는다. 인간으로서 나는 취약하다. 질병과 굶주림, 가난과 재난으로 인해 언제든 쓰러질 수 있다. 취약함 때문에 돌봄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처할 수 있다. 취약함은 상황적인 이유로 주어지는 것이면서(즉,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의 존재에서 덜어내거나 지울 수 없는 짐이다. 취약함은 곧 인간 본연의 조건으로, 우리를 돌보는 존재로 이끈다. 우리는 취약하기에, 본연의 취약함은 돌봄으로만 해결할 수 있기에 서로 돌보아야 할 책임을 지닌다. 그러나 모두 각자의 노동으로, 여러 책임과 역할로 가득 찬 시간표를 꾸려 살아가고 있는데, 여기에 돌봄을 넣을 자리가 있을까. 따라서 그저 “돌보라”라는 명령은 현실성이 부족하다. 모두가 돌보려면, 이를 위한 돌봄 구조와 돌봄 사회가 필요하다. 돌봄은 사회 전체를 통해 순환되어야 하고, 내가 준 돌봄은 타인의 돌봄으로 인해 보충되고 지원되어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각자의 돌봄 책임을, 한편으로 사회 전체의 돌봄 확대를 말할 수 있다.
--- p.21~22 나는 지금 딸을 돌보는 아빠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아빠였을까.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아니다. 나는 아이와 돌봄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게 해준 것은, 그리하여 나를 변화시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이다. 물론 다른 모든 부모와 같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딸의 필요와 요구에 반응해왔다. 하지만 딸의 고유한 존재 없이, 나는 딸을 돌보는 ‘아빠’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온 것이 다른 아이였다면, 예컨대 다른 시점에 아이를 만났다면 사뭇 다른 이해에 도달했으리라. 그러므로 나는 나의 어떤 특성이나 능력으로 아빠가 된 것이 아니라 딸이 나를 지금의 아빠로 빚어낸 것이다. 당연히 어느 하나의 사건으로 아빠가 된 것도 아니다. 딸과 함께한 오랜 경험이 나에게 고유한 것들을 부여했다. 밥을 만들어주고, 선물을 고르고, 서로 장난을 치고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조금씩 딸로 인해 아빠로 빚어졌다. 나는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 p.35 우리는 이 논의에서 돌봄의 근원적 필수성을 발견한다. 돌봄은 무력한 나의 생존 조건이어서만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돌봄은 나로부터 출발하여 나로 돌아오는 회귀의 여행, 동일자의 무한 반복이 만들어내는 공포를 깨뜨리기 위해 요청되는 필수적 조건이다. 오직 돌봄으로만 우리는 나와는 다른 것, 내가 알 수 없는 것, 예컨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 p.77 그 ‘부드러움’이야말로 조력사망의 핵심이다. 베개로 살해하는 것은 무방하다거나, 편안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간병살인이나 조력사망은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조력사망은 상대방에게 더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그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을 줄여줄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행위다. 그렇다면 그것은 부드러운 행위여야 한다. 조력사망은 상대방이 처한 참혹함을 그보다 덜한 고통으로 치환하는 일이지, 개인의 선택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행위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따라서 조력사망에 대한 논의에서는 현재 보살핌받는 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돌보는 이와의 관계 속에서 그는 무엇을 누리는지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한다. --- p.111~112 ‘돌봄이 왜?’라고 물으신다면 돌봄은 ‘이과 더하기 문과’이기 때문이다. 특히 건강이나 질병과 관련된 돌봄 문제를 생각할 때 그렇다. 전통적인 의과학적인 지식만으로는 돌봄이 필요한 환자를 충분히 보살필 수 없다. 돌보는 이는 보살핌받는 이를 이해해야만 하고, 과학은 개인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소용이 없다. 한편 전통적인 문과적 지식, 이를테면 환자의 개인적·사회적 상황에 관한 이해(심리학, 사회학)나 의사소통에 관한 논의(커뮤니케이션학), 환자와 돌보는 이의 세계관(철학)이나 우리의 돌봄이 놓인 자리(역사학), 돌봄의 표현에 관한 이해(문학)는 돌봄에 있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돌봄이 이루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 아무리 상황이나 관계를 잘 이해하더라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면 돌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54 먼저 키테이가 들었던 식물의 비유에서 출발하려 한다. 식물의 씨앗이 발아하여 땅을 뚫고 나와 줄기와 잎을 뻗고, 자신의 충만한 상태에 도달한 다음 후속 세대를 만들기 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그 식물이 만개했다고, 오롯이 피어났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 여러 가능성을 담은 채로 태어나 여러 돌봄들(과 돌봄 관계들), 양육, 교육, 가족과 친구 관계, 사회에서의 인정 등을 받으며(맺으며) 자라나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까지를 삶의 과정이라고 할 때, 이 과정을 오롯이 누리는 것이 바로 피어남이다. 그것은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성취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성공, 많은 쾌락, 행복감의 달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작은 가능성이라도 그가 외적인 제한이나 억압, 폭력 등에서 벗어나 그것을 온전히 펼쳐낼 때 우리는 그가 피어났다고 말한다. 그렇게 다음 세대의 삶이 오롯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여건과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때, 그것은 누군가의 피어남을 위한 돌봄이다. --- p.227~228 이들이 환자를 향한 공감에 경계를 표하는 것은 의료인이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심리학자 로렌 위스페는 공감이 타인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왜 들어가고자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 심지어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발로는 아닌가. 따라서 나는 공감 대신 타인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 즉 민감성이 돌봄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돌보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보살핌받는 이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돌봄은 타인을 향한 민감성을 통해 그의 필요와 욕망을 살피고,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실천이어야 한다. --- p.349 따라서 난 두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우리는 돌보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해야 하고, 그에 따라 자기 삶에 돌봄을 들여야 한다. 바로 ‘함께-돌봄’이다.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나 열외가 되지 않는다. 보살핌받는 이 또한 어느 순간에는 다른 이를 돌보기 때문에, 돌보지 않아도 되는 이는 없다. 사회문화적인 요소가 특정 개인을 돌봄에서 면제하고 있다면 그 요소를 바꾸어야 한다. 경제적 상황이 개인의 돌봄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이유가 되어선 안 된다. 돈으로 돌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야 한다. 제도적 결정이 개인을 돌봄에서 배제해서도, 돌봄 책임에서 면책해서도 안 된다. 모두 다 돌봄에 참여하고 그리하여 돌봄은 중첩적이고 반복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p.375~376쪽 |
“돌봄은 관계 맺음에서 출발해 ‘피어남’을 지향한다”
-‘삶의 보존’에서 서로의 생(生)을 지탱하는 ‘좋은 돌봄’으로 돌봄이 주어지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 혹은 착오는 단순한 돌봄의 공급을, 노인을 돌보는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돌봄 위기의 대안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는 돌봄의 역할을 ‘삶의 보존’으로 축소하고 돌봄을 ‘수요와 공급’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것이다. 당장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신체적 필요는 충족할 수 있겠지만, 자칫 돌봄의 지향점이 로봇과 인공지능의 감시 아래 생을 연명하는 시설 사회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지향이 아니라면, 돌봄의 목표를, 곧 ‘좋은 돌봄’을 구체적으로 규정해야 한다. 모든 돌봄은 관계 맺음에서 시작한다.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는 돌봄이라는 실천으로 맺어지며, 이때 우리는 돌보는 이의 관점(혹은 ‘공급’의 관점)에서 관계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다. 즉, 돌봄은 부모가 아이에게, 요양 보호사가 노인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며 어떻게 보살필지 선택하는 것 또한 돌보는 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봄을 일방통행으로 바라볼 때, 돌보는 이가 돌봄으로 얻게 되는 타인과 자신의 삶에 대한 깨달음, 보살핌받는 이와 나누는 애정이나 함께한 추억, 돌봄의 과정에서 피어난 유대감 등은 간과되고 보살핌받는 이의 관점은 지워질 수 있다. 이처럼 돌봄 관계에서는 일종의 ‘교환’이 일어나는데, 이에 주목할 때 돌봄은 타인을 위한 헌신이 아닌 서로의 생을 지탱하는 연대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돌봄은 깨끗한 옷을 입고 양질의 음식을 먹고 충분히 자는 것 등 타인의 신체적 필요를 일방적으로 채워주는 것을 넘어서서, 보살핌받는 이의 욕구를 들여다보며 그의 재능과 가능성, 꿈과 노력이 꽃피도록 돕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단순한 ‘삶의 보존’이 아닌 서로의 ‘피어나는 삶’을 위한 돌봄의 자리가 생긴다. 이때 돌봄의 효율적인 ‘공급’ 아래 시설로 귀결되는 노인 돌봄에서, 약자에게 전가되는 ‘독박 돌봄’에서, 입시를 위한 획일화된 양육에서 벗어난 ‘좋은 돌봄’의 가능성이 열린다. “돌봄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차릴 때 시작된다” -돌보는 이와 보살핌받는 이가 뒤섞이는 ‘민감한 돌봄’ 보살핌받는 이를 피어나게 하는 섬세한 돌봄은 어떻게 가능할까? 많은 이가 ‘공감’을 답으로 내놓았지만, 저자는 대신 ‘민감함’을 강조한다. 돌봄은 배고픔과 불편을 호소하는 아이의 울음을, 고통에 시달리는 일그러진 얼굴을 알아차릴 때 시작된다. 이때 출발점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일지도 모르나, 타인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맞대어보는 공감은 나와 타인의 공통점에 매몰되어 상대를 위한 돌봄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대신 돌봄에는 그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아픔을, 고통과 아픔을 얼마나 겪고 있는지 예민하게 살피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민감함’이다. 이러한 민감함은 돌보는 이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돌보면서 보살핌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한편으로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이기도 하다. 요양시설의 노인은 보살핌받는 동시에 같이 생활하는 노인들을 돌본다. 돌봄 노동자 역시 누군가의 보살핌 아래 살아간다. 이처럼 우리는 돌봄 속에서 뒤섞이기에, 언제나 나와 다른 삶을 헤아릴 수 있는 민감함이 필요하다. 민감함의 부족으로 돌봄에 실패한 대표적 사례는 의료다. 전문화와 과학화를 거친 의료는 환자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대신 진료 방침에 맞는 치료만을 제공하였고, ‘의학’에 포함되지 못한 돌봄을 배제했다. 그러나 우리가 병원을 찾으면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증상에 따른 의료 행위가 아니라 질환을 마주한 ‘나’의 삶을 살펴보는 진료다. 의료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단순한 ‘돌봄 서비스의 수요자’가 아닌 ‘나’를 돌보는 손길을 원하고, 이는 ‘민감한 돌봄’을 통해 이루어진다. “모든 생은 돌봄에서 출발하여, 돌봄으로 맺어진다” 모두가 돌봄 책임을 다하는, 지속가능한 ‘함께-돌봄’의 사회로 아이가 태어나려면 먼저 아이를 돌볼 사람이, 돌봄을 가능하게 만드는 환경이 있어야 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고통을 덜어줄 도움이 필요하다. 모두에게 돌봄이 필요한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는 말은 동시에 누구나 타인을 돌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보살핌받는 이를 피어나게 하는, 타인의 삶을 민감하게 살피는 ‘좋은 돌봄’을 실천하려면 타인 역시 나를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해 돌봄을 실천하는 건 지속가능할 리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돌봄이 순환할 수 있는 사회 구조다. 저자는 ‘보살핌받는 이-돌봄 노동자-지역사회-정부’로 이어지는 돌봄의 순환 구조를 제시한다. 정부는 보살핌받는 이, 곧 개별 시민들의 역량으로 운영되기에, 어떤 주체도 돌봄을 일방적으로 떠안지 않고 소외당하지 않는다. 여기서 논의는 다시 돌봄 책임을 수행하는 개인으로 돌아온다. 돌봄이 순환하는 사회와 돌봄 책임을 다하는 시민이 동시에 존재할 때에만, 지속가능한 ‘함께-돌봄’의 사회는 가능하다. 그래서 돌봄의 위기라는 거창한 문제를 분석하며 시작한 저자는 다소 소박한, 하지만 선명한 결론을 남긴다. ‘우리 함께, 지금부터 돌봄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어요.’ 돌봄의 역설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지금 돌보는 나와 여러분이라고. |
저자는 의료윤리학자로서 양육, 교육, 요양, 그리고 의료에 이르기까지 돌봄의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고 연결하며, 오늘날 돌봄의 핵심 문제들을 남다른 철학적 깊이와 인문학적 통찰로 분석하고 이를 넘어설 돌봄의 윤리를 제안한다. 이 책은 돌봄이 단지 아이를 키우고 노인을 보살피는 일에,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는 ‘노동’에 머물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가 말하는 돌봄은 상호 공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의지적 실천이자 개인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민감한 보살핌이며, 노인 돌봄과 조력사망, 양육과 부모됨, 공교육과 학교폭력, 장애와 ‘치료’, 동성애자 커플의 출산 등 첨예한 돌봄의 문제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 이현정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외로움의 모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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