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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쇼를 해라
신옥철
서연비람 20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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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역사/인물 top10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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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1부 백남준이 걸어 온 길
2부 백남준의 사람들
3부 백남준의 작품들
4부 미래를 내다본 백남준

소설 백남준 해설
백남준 연보
소설 백남준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1

소설가, 시인. 충청남도 예산 출생.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미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미학과 수료. 1996년 심훈문학상 소설 「상록수에 내리는 비」 당선, 1996년 [월간문학] 신인문학상 시 부문 「꿈과 슬픔」 당선, 2020년 김기림 문학상 수상. 시집 『결 고운 먼지』, 소설집 『상록수에 내리는 비』, 동화집 『대영박물관으로 간 돌멩이』 외 출간. 전 경기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현 안산여성문학회 부설 안산시민문학대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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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12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33쪽 | 148*210*20mm
ISBN13
9791189171834

책 속으로

조문객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장례식 진행을 보는 사람은 그의 조카이다. 조카는 그날 장례식에 참가한 주요 인사를 소개했다. 휠체어를 타고 참석한 머스 커닝햄과 제자 빌 비욜라, 그와 함께 플럭서스 멤버로 활동했던 오노 요코, 그리고 한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여러 나라의 인사들. 평소 가까웠던 지인들이 돌아가며 죽은 이와의 회고담을 들려준다.
먼저 오노 요코가 말한다.
“1970년대 초기 뉴욕에서 나는 백 선생과 함께했습니다. 그의 예언자적 기질과 천재성은 여러분도 모두 잘 아시지요.”
조문객들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손뼉을 친다.
나무, 다리, 섬까지 천으로 싸 버리는 대지 예술가 크리스토와 그의 부인 잔 클로드도 장례식에 와 주었다.
“나는 언젠가 남준에게 피아노를 빌려 붕대로 싸는 작업을 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전시를 마치고 돌려주었더니 남준이 골이 나서 그걸 다 풀어 버렸지 뭡니까? 아마 지금 저기 누워서 남준은 그 일을 가장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조문객이 웃었다. 그러자 크리스토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걸 그대로 놔뒀더라면 아마 지금은 수백만 달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깝습니다”
조문객들이 다시 한번 크게 웃는다.
그렇다. 그때 그는 골이 나 있었다. 다른 친구에게 빌려준 피아노가 엉뚱하게도 광목 쪼가리에 칭칭 감겨서 크리스토의 전시장에 있었으니까.
--- pp.19-21

남준은 아버지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왜 형들은 놔두고 자가를 데리고 간 것일까? 하는 불만도 있었지만, 음악에만 빠져 있는 관심을 돌려 보려고 했었다는 걸 후에 알게 되었다. 당시 남준은 17세였고 여권번호는 7호 아버지가 6호였다. 한국전쟁 6, 25가 발발하기 1년 전이다.
아버지는 인도의 한 상인을 만났다. 그리고 남준에게 통역을 하라고 시켰다. 하라고 하니 꼼짝없이 하기는 했지만 그건 신통치 않은 통역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스스로 상대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때 사업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다음에 무엇이 될 것인가는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는 때였지만 홍콩 여행은 아버지를 이어 사업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는 것에는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때 아버지가 인삼거래를 하는 짐 속에서 무기가 들어있는 상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큰 사업가로서 해방 후 서로 다른 이념으로 갈등하던 정세에서 남한 정부의 요청을 들어주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어린 학생의 눈에 사업가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 이면에 다른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일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튼 마르크스를 읽던 남준은 자연히 아버지와 멀어졌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일이 흥미롭지도 않은 일이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마치 속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뜻밖의 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일이 끝났으니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너는 홍콩에 남아 있거라.”
“네? 저 혼자서요?”
“그래 다 큰 녀석이 아버지가 먹고살 수 있도록 마련해 줄 것인데 뭐가 두려워. 넌 여기 남아서 국제적인 학교에서 여러 나라 학생과 함께 공부를 더 할 거야. 이미 등록을 마쳤으니 이 주소로 찾아가기만 하면 돼.”
거역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속셈을 이제야 알았다. 한국에 돌아가 음악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남준은 하는 수 없이 홍콩에 남아 본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조기 유학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다음날 아버지의 지시대로 찾아간 학교는 영국계 고등학교 ‘로이든 스쿨’이었다.
--- pp.48-49

남준이 TV를 이용한 비디오 아트를 창시하게 된 배경은 1960~ 1970년대 미국 사회의 급속한 TV 보급으로 정치, 사회, 개인에 이르기까지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현상에 주목하면서부터였다. 이 시대 TV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획일적 정보를 공급하여 바보로 만든다는 이유로 ‘바보상자’로 불릴 만큼 대중적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하는 예술가인 만큼 바로 가장 흔한 TV로 창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바보상자라고 말하지만 모두 그 바보상자 앞에 앉아 있고, TV를 보며 이야기하고, TV를 보며 웃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들조차도 TV는 과학 기술의 분야로만 생각할 뿐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서로 조합이 안 될 것 같은 것에서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 새로운 것을 찾는 방법이었기에 가장 매력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쇼게츠 홀 공연 후 일본에서 TV 예술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뉴욕에서 초청장 한 장이 날아왔다. 뉴욕의 플럭서스 공연에 중요한 멤버로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준은 1964년 난생처음 미국에 갔다. 뉴욕 도착 당시 1958년 독일에 있을 때 동료로 지내던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이미 대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앤디 워홀이라는 새 인물이 등장하였다. 앤디 워홀은 ‘팝 아트’의 유명인으로 활동하며 고전 예술의 권위에 정식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뉴욕은 활기가 넘쳤다. 일본에 비해 열정적인 예술가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활동은 서로 자극하며 각자의 새로움을 경쟁하고 있었다. 존 케이지, 마리 바우어 마이스터, 샬롯 무어만, 스톡 하우젠 등의 동료들도 뉴욕에 정착하라고 붙들었다. 남준은 뉴욕에 남았다.
나중에 보이스가 남준에게 물었다.
“뉴욕에서 지내기가 어떤가?”
“독일에는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있는데 뉴욕에서는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모르겠어. 여기서는 비단 장갑을 끼고 사람을 죽이는 것 같아.”
그만큼 뉴욕은 치열했다.
--- pp.81-83

지금까지 레이저는 대부분 다른 영상을 쏴 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레이저 자체가 아닌 레이저가 쏴 준 영상, 인간의 얼굴, 풍경 등이 예술이 되는, 즉 예술을 보여주는 역할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것이다. 레이저 광선 자체가 예술이 되게 하는 것이니까.
이 무렵 남준은 뉴욕에 세계의 스튜디오와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고 있었다. 스튜디오는 뉴욕 현대미술가 중심지인 소호 일대 그린가와 브롬가에 있었고 아파트는 머서가에 있었다. 브롬가 스튜디오는 초창기 비디오 아트 작품들이 제작되었던 곳이고 차이나타운 근처 그랜드가 4층 스튜디오는 드로잉 작품을 그리거나 갤러리 관계자를 만날 때 이용하였다. 반면 그린가의 작업실은 훗날 자신의 작품을 모아놓을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사 둔 것이었다. 이곳에서 레이저 작품을 만들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전시 컨셉이 회고전인 만큼 이전에 제작한 작품 모두를 보여주자고 하였다. 그러니 새로운 레이저 작품은 물론 과거 작품들도 모두 손을 봐야 했다. 남준은 조수들과 함께 의논에 의논을 거듭했다. 남아 있는 의지와 열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아내는 개막식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했다. 옷 제작은 마르셀 뒤샹의 손녀이며 색채의 대가 앙리마티스의 증손녀가 맡았다. 세간에는 병중인 남준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이슈였다. 뉴욕 지하철에는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수백 장 나붙었고, 길거리에도 전시회 깃발이 나부꼈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을 선보일까? 그러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제목은 「달콤하고 우아한」 이다. 이 작품은 천국을 상징한다. 흰색, 빨간색, 파란색 여러 가지 빛의 레이저 광선이 돔 형의 미술관 천정으로 쏘아 올려졌다. 광선은 오묘한 기하학적 문양을 쉴 새 없이 만들어냈다.
--- pp.118-120

샬롯 무어만과 남준은 1965년 유럽 순회공연을 통해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샬롯 무어만과의 일화는 아주 많다. 그중 재미있는 일은 한 공연 중에 그녀가 무대에서 잠들어 버린 것이다. 깨워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흔들고, 소리치고…. 자는 그녀를 뒤집어엎어 보고…. 깨우기 위해 10분 넘게 그야말로 무대 위에서 ‘쇼’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남준은 지쳐 깨우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척하다가 찌증이나 피아노에 엎드려 자 버렸다. 그녀와 몸 씨름을 하여 피로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한참 자다가 깨어나도 그녀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남준은 화가 나서 될 대로 되라고 아예 무대에서 내려와 방에 가서 자버렸는데 관객들은 그게 설정인 줄 알고 잠시 감상하다가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순서 아닌 순서를 밟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샬롯 무어만이 불안해하여 스태프가 공연 직전에 강한 진정제를 먹였던 것이었다. 그녀는 2시에 일어나 혼자 멋지게 연주를 마쳤다고 한다.
1996년에는 다른 도시로 장소를 옮겨 공연하기 위해 스태프 전원이 이동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남준은 짐을 챙겨 먼저 떠나고 샬롯 무어만은 다음 열차를 타고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기차를 잘못 탄 것이었다. 서너 정거장 가서 이를 깨달은 그녀는 막무가내로 기차를 세워 거꾸로 가게 하였다고 한다. 출발한 기차가 되돌아온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때의 상황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그녀는 기차를 잘못 탄 것을 알고 큰일 났다 싶어 출입문으로 가 비상시 수동으로 작동하는 손잡이를 강제로 작동시켜 기차를 세웠다는 것이다. 승무원이 달려오자 사정을 얘기했지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하는지, 다음 공연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영어로 막 떠들어 댔고 그래도 통하지 않자 그동안 매스컴을 탄 공연 사진과 다음 공연 포스터와 티켓을 보여주며 대성통곡 난리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도저히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자 승무원들은 비상 사고로 정리하여 열차를 돌렸다고 한다.

--- pp.14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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