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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망국의 청년 2장 펜과 메가폰 3장 맥반총명일지언정 눈치 보지 않고 4장 타오르는 상록수 5장 그날이 오면9 장편소설 심훈 해설 심훈 연보 장편소설 심훈을 전후한 한국사 연표 참고 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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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통로에 놓인 궤짝을 발로 걷어찼다. 궤짝이 뒤집혀서 놋수저와 빗, 옷 꾸러미가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보이는 대로 짐을 발길로 걷어차고 굴리고 엎어놓고 제쳐놓았다. 형사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통로 저편에서 형사에게 귀퉁이를 쥐어박힌 바지저고리가 쩔쩔매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여인네가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다. 그는 황급히 곁에 벗어놓은 모자를 집어서 깊숙이 눌러썼다.
이윽고 형사는 그가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아낙과 여학생을 훑고 창가 자리에 앉은 그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래위로 청색 치파오를 입은 차림새에 둥근 테 로이드안경을 쓰고 중절모로 얼굴을 반이나 가린 그를 중국인으로 여겼는지 이내 눈길을 거두고 다른 칸으로 넘어갔다. 나름 변복을 했다지만 기민한 그들의 눈초리에 재수 없이 걸려들까 싶었던 그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창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철수 신호인 듯 형사들이 서둘러 열차에서 내려갔다. 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창을 내다보니 어느새 창밖은 어두워졌다. --- p.14~15 “짝.” “짝.” 손뼉을 크게 마주치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그는 뒤돌아서기 전에 먼저 단상을 쳐다보았다. 오까모도 교장의 당황하는 얼굴과 교장 뒤에서 교사들이 동요하는 모습이 화면을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기울어 보였다. “뭐야? 뭐야?” 당황한 선생들이 허둥지둥 달려 내려오는 순간은 찰나지만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윽고 귓전으로 소나기처럼 밀려드는 함성이 있었다. “나가자!”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은 교장과 선생들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들은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 탄 호랑이 같은 기세였다. 놀란 교사들은 교문 쪽으로 달려 나가 학생들을 막아보려 했지만 둑이 터진 듯 쏟아져 나가는 학생들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날, 3월 1일은 여느 날과 다른 날이었다. 어제와 다르고 과거의 어느 날과도 다른 날이었다. --- p.24~25 전차에서 내린 그는 천변을 따라 걸었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추운 날씨에 축대 아래 개울가에 빨래를 하러 나온 여인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축대를 바람막이 삼아 하천가 흙바닥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그 위에 솥 가마를 걸어놓고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솥 가마 안에서 빨래가 삶아지고 무럭무럭 솥뚜껑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한 발 폭 물길에 벌건 듯 퍼런 손을 담갔다 올리며 쪼그려 앉은 여인들의 흰 치마저고리 등줄기와 쪽 찐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김 너머로 겨울의 개울이 낮게 흘러갔다. 시민에게 생활용수를 공급하며 흘러왔던 저 개천은 조선왕조의 몰락 이후에는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개천은 이제 일본인들의 거주 구역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개천 남쪽으로 일본인 거주지가 있는 쪽은 활기가 넘치고 점점 일본풍 집이 늘어났다. 이제는 어디 가나 일본인 집이 많아졌다. 상대적으로 북쪽은 점점 낙후한 구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손에 입김을 불어 넣으며 청계천을 내려다보며 걷던 그는 형을 떠올렸다. 열한 살이나 위인 큰형은 아버지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다. 서슬 푸른 관제 신문의 기자로 일하는 형은 요즘 그를 자꾸 불러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취직을 한 것도 아니지만 습작에 매진하면서 유학을 꿈꾸고 있는 동생의 속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시로 불러들여 심부름을 시켰다. 약을 사 와라, 어서 병원에 가서 주치의를 모시고 와라, 그러다가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는 교동에서 종로까지 하루 열 차례나 오르내려야 했다. 그날은 한파의 연속이었다. 언덕길을 달릴 때 그의 볼은 누군가 다가와 뺨을 갈기고 간 듯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가 걸어가면 점점 새파래져 갔다. --- p.50~51 모두 맑은 하늘 아래 출렁이는 배 위에서 동지나 해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각자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 야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익히고 외국어대학을 거쳐 금릉대학에 진학하리라,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선생을 하리라, 프랑스로 유학을 가리라, 러시아 문호처럼 위대한 창작가가 되리라, 블라디보스토크, 상하이, 항저우, 홍콩 등을 경유한 다국적 경로처럼이나 다양한 꿈이 대양을 향하여 뻗어나갔다. 스무 살의 나이만큼이나 푸르고 생생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바다 너머에 고국산천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한편으로 집에 대한 그리움도 사무쳤다. 모두 점점 감상에 빠져들었다. 귀밑머리를 서너 올 늘어뜨리고 곱게 틀어 올린 트레머리 정이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옆에 나란히 선 현과 주도 함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는 함흥이 고향인 여자였다. 그는 음악학교에 들어가 공부할 생각으로 고향을 떠나왔지만 지금은 혁명가와 사랑에 빠졌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들의 눈은 하염없이 고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p.76~77 이수일이 대학 교문을 들어가는 장면을 찍는 날에 촬영이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배역을 맡은 주연배우가 말했다. “감독님, 저는 기분이 좋지 않아 여기서 그만두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이는 당황했다. 그날부터 종적을 감춘 배우 대신 대역을 맡아줄 배우를 찾아다니다가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를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손사래를 쳤다. “형님, 제발 나 좀 살려주시오.” 이가 거듭 사정하자 그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가능할까 하는 마음 한편으로 솔깃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벗고 분장을 한 후 촬영이 중단된 대학 교정 장면부터 이수일 대역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앞서 촬영한 배우에 비해 그는 몸집이 컸다. 몸집 큰 그가 연기한 이수일이 교문을 들어서면 교정에는 키 작은 배우 이수일이 서 있었다. 큰 이수일이 심순애를 대동강 변으로 끌고 가면 그다음에는 작은 이수일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을 연기한 장면이 앞뒤로 뒤섞인 편집으로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지만 대부분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영화가 완성되었던 시기였다. 그때 이는 어떻게든 영화를 완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이다.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놀랍게도 영화는 흥행했다. 소설의 인기 때문인지, 영화의 초창기라 그만큼 장안에 볼거리가 없었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두 사람은 일생의 진기록을 갖게 되었다. “이제 영화 쪽으로도 한 발 들이셨으니 영화평만 쓰시지 말고 시나리오나 영화 소설을 한 편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원래 영화예술에 관심이 많지 않으셨습니까?” --- p.10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