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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 : 강릉 전주이씨 선교장 고문서의 현황과 특징
1. 敎令類 白牌/ 告身/ 追贈敎旨/ 官誥/ 差帖 2. 疏·箚·啓·狀類 上疏 抄/ 上言 草/ 上書/ 狀啓/ 所志/ 原情/ 白活/ 題音 3. 牒·關·通報類 關/ 傳令/ 書目/ 告目/ 節目/ 報告 4. 證憑類 戶口單子/ 準戶口/ 試券/ 立案/ 不忘記/ 手記/ 手標/ 料標/ 尺文 5. 明文·文記類 明文/ 牌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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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전주이씨 선교장 고문서는 강원도 강릉시에 세거했던 전주이씨 선교장 가문에서 대대로 소장한 자료이다. 이 가문의 ‘선교장(船橋莊)’이라는 당호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당호와 다르다. 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택호에는 당(堂), 헌(軒), 각(閣)이 붙지만, 선교장 당호에 ‘장(莊)’이 붙은 것은 장원(莊園)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즉, 당시 일반 상류 주택이 가족만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선교장은 가족, 친족을 포함하여 손님을 위한 접객 공간, 집안일을 돌보는 이들이 거주하는 농막 등의 부속 공간까지 갖춘 대규모 장원을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선교장을 세운 자는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李乃蕃)이다. 그는 본래 충주 법왕(法王)에 거주했으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뒤에 어머니 권씨를 모시고 외향(外鄕)인 강릉으로 왔다. 처음에 이내번은 외가인 강릉 오죽권씨의 둔포촌(遯浦村) 묘막에 의탁하여 거주했다. 그러나 이후 가업을 이룬 이내번은 1756년(영조 32) 6월에 선교장의 집터를 구입했고, 1762년(영조 38)에 선교장을 완성했다. 선교장이 있는 배다리골은 창녕조씨의 세거지로 이내번은 조하행(曺夏行)에게 집과 집터를 매득할 뿐 아니라 배다리골 근방의 전답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이러한 선교장 터는 명당으로도 알려져, 초기에 터를 잡은 이후로 6대에 걸쳐 오랜 시간 증축과 확장을 통해 건물을 조성하고 운영했다. 이러한 이력은 높은 평가를 받아 일찍부터 전통 건축과 정원 양식 면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전주이씨 선교장은 강원도에서 보기 드문 만석꾼 집안으로 강릉을 대표하는 사족가문 가운데 하나였다. 전주이씨 선교장 가문의 고문서는 17세기 전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까지 주로 강릉을 중심으로 선교장 인근뿐 아니라 북쪽으로는 주문진, 남쪽으로는 묵호 일대의 사회 · 경제적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다수 존재한다. 이외에도 장계는 의주부윤과 평안도 관찰사가 작성한 문서로 19세기 평안도 일대의 현안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 가문의 경제적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토지매매명문과 관련 패지, 불망기가 대량으로 잘 남아있다. 이외에도 1758년(영조 34)에 양인 초정(草正)이 이내번에게 의탁한 뒤에 스스로를 파는 자매(自賣)와 관련된 소지, 원정, 불망기, 명문도 주목된다. 이 문서에서 당시의 자매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18세기의 흉년과 친족의 번포(番布)가 개인에게 미친 사회 · 경제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고문서집성』에는 1910년을 기준으로 하여 1910년 이전의 문서만 영인을 수록했으나, 교령류부터 명문 · 문기류에 해당하는 근현대 문서의 경우에는 목록에 기재했다. 강릉 전주이씨 선교장 가문의 문서는 이내번을 중심으로 한 개인 가문의 역사를 넘어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의 지역사까지 확장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